구준(송나라)

1 소개

정강의 변을 100년 뒤로 늦춘 인물

구준(寇準,961년 ~ 1023년)은 북송시대 정치가이다. 자는 평중(平仲)이며, 화주(華州) 하규(下邽) 사람이다.
송진종을 섬기면서 ,전연의 맹 당시 강경론적인 주장을 펼쳐 송나라의 평화를 지키는 큰 공을 세웠으나 강직한 성품으로 한직으로 밀려난 인물이라 볼 수 있다.

2 초반 생애

태평흥국(太平興國) 5년(980) 진사가 되었고 워낙 총명해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과거를 볼 때도 나이가 너무 어린지라 나이를 보태서 과거를 보라는 권유를 받을 정도였고 송 태종은 그를 아껴 당나라 시절 명재상 위징에 비유했다, 참지정사가 되어 국정에 참여했지만 문제는 성격이 강직하여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관철시키는 것은 훌륭했으나 동료나 상사뿐만 아니라 태종에게까지 양보하려 하지 않아 결국 태종말년에는 지방의 지주(知州)로 좌천되었다. 그러다가 진종이 즉위하면서 중앙으로 복귀하여 삼사사에서 재상으로 승진하였다.

3 중원을 지키다: 전연의 맹

1004년, 동북방에 있는 요나라가 20만 대군을 일으켜 송나라를 공격해 오자 왕흥약과 진도수 등은 수도를 남쪽 금릉(남경)이나 사천으로 옮기자동진? 촉한? 개드립을 쳤지만 구준은 그것에 반대하고 맞서 싸움과 동시에 송 진종의 친정을 건의했다. 구준의 말대로 직접 진종이 친정을 하자 송군의 사기는 올랐다. 때마침 요나라 장수인 소달람이 송의 대장 이계륭과 맞서 싸우다 화살에 맞아 죽자 달아나게 되었고 요나라 군사는 대장이 죽자 사기도 떨어지고 황제가 직접 친정한 송군을 격멸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구준이 진종을 친정을 하게 해 요나라에게 강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만약 황제가 성도나 금릉으로 수도를 옮겼으면 요나라군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은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요나라는 대대적인 침공을 하여 오대십국 후진 때처럼 다시 한번 중원을 차지하였을 것이고 요나라로 인하여 100년 앞서 정강의 변이 일어나 위진남북조 이래 제 2의 북방민족의 중원 정복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송나라 역시 서북쪽에서 탕구트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계속 전쟁을 끌고 가기에는 어려웠다. 구준은 이에 반대하여 항전하여 끝까지 싸워 연운 16주까지 탈환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얼마 후 그가 전쟁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넓히려 한다는 비난의 소리가 올라왔고 결국 구준도 강화에 찬성했다. 요나라의 진영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은 조리용(曹利用)이었는데, 그는 요나라 진영에 사신으로 가기 전 진종이 그에게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라면 세폐를 100만이라도 허용하거라"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조리용이 궁을 나서자 옆에 있던 재상 구준이 조리용에게 "폐하께서 비록 백만의 세폐를 허용하셨을지라도 그대는 30만을 초과해서는 안 되오. 만약 30만을 초과하면 그대가 나를 보러 올 필요 없소. 내가 그대를 죽일 테니까."'라고 압박을 주었다.결국 거란과의 교섭 끝에 은 10만냥과 비단 20만 필. 즉 30만 선에서 합의를 본 조리용이 보고를 하기 위해 진종이 있었던 전주의 행궁으로 귀환하자 마침 식사를 하고 있었던 진종은 내시를 시켜 조리용에게 세폐가 얼마인지를 묻게 했다. 그러자 조리용은 '이건 기밀사항이니까 내가 직접 황제께 아뢰겠다'고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 대답을 들은 내시가 진종의 방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뒤 다시 나와서 "먼저 대략의 숫자를 말하시랍니다"고 황명을 전했다. 그러자 조리용은 여전히 말하지 않고 단지 3개의 손가락만 펴고 손짓으로 표시했다.이걸 본 내시는 진종에게 "3개의 손가락을 핀 것을 보니 대략 3백만이 아닌가 합니다"라고 전했고 진종은 멘붕하여 "너무 많다! 많아!"라며 큰 소리로 말하다가 잠시 후 "아냐. 이 정도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면 괜찮은 편이다"라며 정신줄을 놓은 혼란스런 반응을 보였다. 당시 진종이 묵던 행궁이 작아서 조리용 역시 진종이 너무 많다고 소리친 것을 들을 수 있었고 진종을 알현할 때 "잘못했습니다. 신이 수락한 액수가 너무 많사옵니다" 라고 용서를 빌었다. 진종이 30만도 너무 많다고 소리친 줄 알았기에 두려움에 떤 것이다. 백만까지 괜찮다고 한 건 뭐냐고 속으로 욕했을 듯 정신줄을 수습한 진종이 다시 한 번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조리용은 벌벌 떨며 30만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진종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조리용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또 요나라는 송과 군신의 관계를 맺지는 않았지만 송을 형으로 함으로써 송은 체면을 유지했고 대신 송이 요나라의 황태후를 숙모라 부르기로 했다.

4 최후

그 후 구준은 지나치게 강직한 성품때문에 적을 많이 만들었고 끝내 황태자를 모시던 정위와 전유연 두 사람을 아첨꾼이라 하고 이들에게 소주(少主)를 맡기게 할 수 없다고 한 일이 정위에게 알려져 중상모략을 받은 끝에 도주사마로 좌천되었고 진종이 죽은 후에는 뇌주의 사호참군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