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의 역대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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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 진종(眞宗) | |
시호 | 응부계고신공양덕문명무정장성원효황제 (應符稽古神功讓德文明武定章聖元孝皇帝) | |
연호 | 함평(咸平, 998년 ~ 1003년) 경덕(景德, 1004년 ~ 1007년) 대중상부(大中祥符, 1008년 ~ 1016년) 천희(天禧, 1017년 ~ 1021년) 건흥(乾興, 1022년) | |
성 | 조(趙) | |
휘 | 항(恒) | |
생몰기간 | 968년 12월 23일 ~ 1022년 3월 23일 | |
재위기간 | 997년 5월 8일 ~ 1022년 3월 23일 |
1 개요
파일:Attachment/송진종/(22)송진종조항어필.jpg
진종의 어필
북송의 3대 황제 (968 ~ 1022, 재위기간 998 ~ 1022), 휘는 항(恒)[1] 시호는 응부계고신공양덕문명무정장성원효황제(應符稽古神功讓德文明武定章聖元孝皇帝).
송태종은 태조 조광윤의 동생인데 반해 진종은 태종의 아들이다.형인 태조보다는 동생이 속이 좁은 듯(...) 원래 송태종의 셋째 아들[2] 하지만 첫째형은 폐서인되고[3] , 둘째형은 요절하는 바람[4]에 그가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카더라에 의하면 매일같이 낮잠만 자는 황제였다고 한다.
2 전연의 맹
건국한지 50년도 지나지 않아 국방력이 흐트러지고 요나라의 침입을 받아 굴욕적인 '전연의 맹'을 맺었다. 송은 거란의 형 나라가 되지만, 매년 거란에게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주고 진종이 요나라의 소태후를 숙모로 부르는 맹약을 한 것이다. 그나마 이것도 진종은 그냥 땅 떼어주고 도망가려 그랬는데 신하들의 강력한 반발로 떠밀리듯 친정하여 어찌저찌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굴욕적인 내용이긴 하지만 '전연의 맹'은 그래도 적이 자기를 형이라 불러주는 대가로 삥 좀 뜯기고 마는 내용이다. 영토를 반이나 뜯기고 자기가 적을 숙부라 불러야 되는 훗날의 일을 보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사실 유리한 상황에서 진종이 지레 겁을 먹고 굴욕적인 조건으로 화의를 맺은 것이다. 요나라가 의외로 적은 세폐를 순순히 받아들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냥 공짜로 화의를 해줘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돈까지 줘가며 화의를 했으니 고마워해도 모자랄 상황.
진종이 전연의 맹이 이뤄지기 전에 거란 측과 결정한 맹약 사항을 보고받았을 때는 이런 일화가 전한다. 거란 진영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은 조리용(曹利用)이었는데, 그는 거란군 진영에 사신으로 가기 전 진종이 그에게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라면 세폐를 100만이라도 허용하거라"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조리용이 궁을 나서자 옆에 있던 재상 구준이 조리용에게 "폐하께서 비록 백만의 세폐를 허용하셨을지라도 그대는 30만을 초과해서는 안 되오. 만약 30만을 초과하면 그대가 나를 보러 올 필요 없소. 내가 그대를 죽일 테니까."라고 압박을 주었다.
결국 거란과의 교섭 끝에 은 10만냥과 비단 20만 필. 즉 30만 선에서 합의를 본 조리용이 보고를 하기 위해 진종이 있었던 전주의 행궁으로 귀환하자 마침 식사를 하고 있었던 진종은 내시를 시켜 조리용에게 세폐가 얼마인지를 묻게 했다. 그러자 조리용은 '이건 기밀사항이니까 내가 직접 황제께 아뢰겠다'고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 대답을 들은 내시가 진종의 방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뒤 다시 나와서 "먼저 대략의 숫자를 말하시랍니다"고 황명을 전했다. 그러자 조리용은 여전히 말하지 않고 단지 3개의 손가락만 펴고 손짓으로 표시했다.
이걸 본 내시는 진종에게 "3개의 손가락을 핀 것을 보니 대략 3백만이 아닌가 합니다"라고 전했고 진종은 멘붕하여 "너무 많다! 많아!"라며 큰 소리로 말하다가 잠시 후 "아냐. 이 정도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면 괜찮은 편이다"라며 정신줄을 놓은 혼란스런 반응을 보였다. 당시 진종이 묵던 행궁이 작아서 조리용 역시 진종이 너무 많다고 소리친 것을 들을 수 있었고 진종을 알현할 때 "잘못했습니다. 신이 수락한 액수가 너무 많사옵니다" 라고 용서를 빌었다. 진종이 30만도 너무 많다고 소리친 줄 알았기에 두려움에 떤 것이다. 백만까지 괜찮다고 한 건 언제냐고 속으로 욕했을 듯 정신줄을 수습한 진종이 다시 한 번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조리용은 벌벌 떨며 30만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진종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조리용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3 평가
1022년 죽어 영정릉에 안장되었다. 도교에 대단히 심취한 황제로도 이름이 높은데 신하들에게 도교의 비문을 짓게 하거나 봉선을 올리려고 많은 돈을 쏟아붓기도 했다. 더구나 자기가 사후에 묻힐 영정릉에 지나치게 공을 들여 속자치통감에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뒷날 조선의 세종대왕은 진종에 대해 "허탄한 것을 좋아했으니 어리석은 임금. 그 양반 더 오래 살았으면 지 좋아하는 일만 해 댔을 거 아님?"이라며 통렬하게 비판하기도 했다.[5]
학문을 좋아한 군주였기에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한 권학문(勸學文)을 남겼는데 그 내용이 참으로 현실적이다(...).
富家不用買良田(부가불용매양전) : 집을 부유하게 하려고 좋은 밭을 사지 마라
書中自有千種祿(서중자유천종녹) : 책 속에 저절로 천종의 봉록이 있다.
安居不用架高堂(안거불용가고당) : 편안히 살려고 큰 집을 짓지 마라
書中自有黃金屋(서중자유황금옥) : 책 속에 저절로 화려한 집이 있다.
出門莫恨無人隨(출문막한무인수) : 문을 나설 때 따르는 자 없음을 한탄 마라
書中車馬多如簇(서중거마다여족) : 글 속에 거마가 떨기처럼 많다.
取妻莫恨無良媒(취처막한무량매) : 장가들려는데 좋은 중매 없음을 한탄 마라
書中有女顔如玉(서중유녀안여옥) : 책 속에 얼굴이 옥 같은 여자가 있다.
男兒欲逐平生志(남아욕축평생지) : 사나이 평생의 뜻 이루려면
六經勤向窓前讀(육경근향창전독) : 육경을 부지런히 창을 향해 읽어라.
4 가족관계
첫번째 황후는 장회황후 반씨[7](章懷皇后 潘氏/968~989)인데 황제가 되기 전에 요절했다. 두번째 황후는 장목황후 곽씨(章穆皇后 郭氏/975~1007)이다. 세번째 황후가 그 유명한 장헌명숙황후 유씨(章獻明肅皇后 劉氏/969~1033)이다. 추존황후로서 인종의 생모인 장의황후 이씨(章懿皇后 李氏/987~1032)가 있다.- ↑ 원래 이름은 덕창(德昌)이었다가, 원간(元侃)으로 개명하였고, 다시 항(恒)으로 개명하였다.
- ↑ 생모는 원덕황후(元德皇后) 이씨이다. 원덕황후는 원래 이현비(李賢妃)였다. 태종의 정처 두명(숙덕황후 윤씨, 의덕황후 부씨)이 잇달아 죽었기 때문에 황후로 책봉될 뻔했지만, 태조의 삼년상이 끝나기 전에 죽어버렸다. 진종이 즉위하자 황후로 추존되었다
- ↑ 진종의 동복형으로서 이름은 조원좌(趙元佐). 원래 송나라의 제위계승은 태종의 모후인 소헌황후 두씨의 유훈에 의해 태조에서 태종으로 그리고 태종의 아우인 진왕 조정미에게 이어진 후 다시 태조의 아들인 조덕소에게 이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태종은 동생에게 물려줄 마음이 없었고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줄 생각이었다. 결국, 태종은 조카인 조덕소를 자결케 하고, 동생 조정미를 귀양보낸후 조정미는 병사했다. 혈육을 죽이는 태종의 방법에 반대한 조원좌는 숙부인 조정미를 살려줄 것을 간청했으나 태종에게 거절당하고, 조정미가 유배지에서 병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열받아서 궁궐에다 불을 지르고 만다. 일설에는 광증이 있는 등 정신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그 결과 조원좌는 폐서인되어 감금되고 제위계승권도 잃었다. 후에 태종이 죽자, 환관 왕계은 등이 짜고 태후(명덕황후 이씨)를 설득하여 조원좌를 즉위시키려 했으나 재상인 여단이 태종의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며 반대하여 진종이 즉위하였다. 진종이 즉위하자 친형을 동정하여 다시 한왕에 봉작하였다. 이 사람의 7대손이 남송 영종대의 재상인 조여우이다
- ↑ 시호는 소성태자(昭成太子)로 이름은 조원희(趙元僖)
- ↑ 세종실록, 세종 12년(1430년) 11월 25일
- ↑ 여담이지만 짝수 행 한자들을 보면 '녹, 옥, 족…'인바 '-ok'으로
라임운율이 맞춰져 있다. 이른바 운자(韻字)를 맞춘 것으로, 한시의 특징 중 하나다. - ↑ 개국공신이자 명장인 반미의 6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