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강의 변

1 개요

영가의 난 이래 한족 국가가 다시 중국 남쪽으로 쫓겨난 사건
취미에 너무 심취해서 망한 예

1126년 북송금나라에게 패하여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이 함락되고 휘종흠종포로로 잡혀 중국 송나라 북부가 홀라당 생오랑캐로 취급했던 여진족에게 뺏아긴 사건. 당시 북송의 연호가 정강이었기 때문에 정강의 변이라 부른다. 영가의 난, 토목의 변과 함께 중국 한족 왕조의 3대 굴욕사건으로 친다.

2 전개

2.1 발단

1115년 여진족완안아골타가 통일국가 금을 건국하고, 당시 국가 막장 테크를 탔던 거란의 요나라를 쥐어패기 시작하자, 북송의 황제 휘종은 요에게 바치던 공물을 금에게 바치면서 협공을 제의했다. 물론 금 입장에서는 손해볼 것이 없는 제안이라 이를 수락했다.

당시 휘종은 여진을 써 거란을 제압하고 숙원인 연운 16주를 회복하여 북송의 입지를 강화시키려는 이이제이책을 생각했고, 애초에 문치위주의 통치방침과 방랍의 난을 진압하면서 너무 많은 군사력수호지 호걸들을 날려먹었던 까닭에 협공을 제의하며 금의 군사력에 편승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실력적인 면에서도 송군은 허수아비나 다름없어 송이 담당한 구역의 전선에서도 전진하기는커녕 오히려 역습에 후퇴하는 참상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북송의 태도에 열이 뻗친 금에서 사신을 보내 노발대발하자 연주 6주(송의 연산부)만 송에 넘기고 연주 내의 모든 재물이랑 금이 공략한 운주와 공물을 더 바치는 조건을 제시하여 일단 사태를 진정시켰다. 그렇게 1125년 요는 금과 북송의 협공으로 캐발살났다.

2.2 전개

문제는 요가 멸망하자 북송이 입을 싹 닦아버렸다.(...) 바친다는 공물은 바치지도 않고 아예 망했어요 상태가 된 요의 천조제랑 접촉하여 금의 내분을 조장하는 정치공작을 폈다. 이를 응징하러 금은 군대를 출동시켰으며 북송의 수도 변경(개봉)을 둘러쌌다. 이 때 도교에 심취한 휘종이 곽경이라는 사기꾼 도사에게 낚여 육갑신병을 만들어 막겠다고 육갑을 떨었지만 했지만 결과는 개박살(...)[1].

상황이 이렇자 원인제공자였던 휘종은 잽싸게 장남 흠종에게 양위하고 "아들, 똑똑한 네가 잘 해결하렴"이라면서 책임을 회피했다. 얼떨결에 제위를 물려받자 구원군들이 몰려오는 판세 하에서 흠종은 태원부, 하간부, 중산부의 하북 및 하동 영토 할양혹떼려다 혹붙인 꼴, 배상금 지불 등의 조건으로 화의를 맺어 일단 금나라는 철수. 흠종은 이러한 사태의 주범들인 간신들(동관, 양사성, 채경, 채유 등)을 유배, 처형한다.

2.3 절정

그러나 현실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잽싸게 구원군을 홀랑 해산시켜버리고 주전파 대신들의 파토 및 이에 더해서 간땡이가 부은 흠종이 주전론에 OK!를 불러버렸다. 이는 금을 제대로 빡치게 만들어 "이놈들이 또 통수를 쳐!"라면서 다시 군대를 보내 변경을 포위했으며 1126년 11월 함락시켰다. 그리고 송조의 재상 장창방을 니가 즉위하지 않는다면 개봉이 피바다가 돼도 상관없단 말이지?란 협박으로 괴뢰정권 (위초)의 황제로 즉위시키고 휘종과 흠종을 비롯한 북송의 황족 및 관료 3천명을 포로로, 또 대량의 서적, 보화, 재물, 보물, 그림 등을 가지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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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송은 일단 멸망하고 수도 개봉을 비롯한 화북 지역은 금나라의 점령 하에 들어간다. 역사

2.4 결말

그러나 장창방의 위초는 괴뢰국가로써 인심이 전혀 없었으며 송나라는 다행히 수도 변경에 없었던 흠종의 동생이 고종으로 다시 선양받아 즉위하면서 남쪽에서 명맥을 이어 나라가 완전히 말아먹는 꼴을 겪지는 않게 된다. 그리고 강제로 황제에 즉위당한 장창방은 자살을 명받는다. 안습.

송의 중흥으로 격노한 금나라는 여세를 몰아 다시 침공하여 송의 고관인 유예를 황제로 또다른 괴뢰국가 (위제)를 세워 고종을 추격하여 양자강을 건너 계속 쳐들어와 양주, 남경, 임안[2]. 월주[3], 명주[4]을 잇달아 점령하고 일군은 강서성까지 진격하였으며, 도망친 고종을 온주에서 급기야 해상으로 내몰아 캐스트 어웨이를 찍게하며 전 중국을 정복할 기세였으나 화북이랑은 다른, 강과 숲이 많은 화남의 기후 지리 및 악비, 한세충 등을 주장으로 한 송군의 반격, 벼락출세한 여진족들이 화북을 점령해 통치하면서 살육과 약탈을 하도 저질러 화북 전체를 초토화시켜 버리는 바람에 일어난 한족들의 반란으로 고전하게 된다. 금은 관중을 점령하고 사천성 입구까지 침입하는 등 금과 송이 양자강을 경계로 에워싸고 일진일퇴를 전개하였지만 이에 금은 개봉 및 황하 이남 하남을 포기하고 다시 하북으로 퇴각하려다가 X맨 진회를 위시한 송의 화전파가 악비 등의 주전파를 배제시키고 금과 강화를 체결함으로써 회수[5]에서 대산관을 경계로 삼아 유예의 위제를 폐하고 금나라가 정식으로 화북을 통치하게 되어 중원 대륙은 본격적으로 2차 남북조시대의 형세를 이루게 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역사는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나왔다 평한다.역시 어디서 역사

3 여담

한편 금태종은 붙잡아온 휘종에게 혼덕공(昏德公, 덕을 망친 자), 흠종에게 중혼후(重昏候), 덕을 따블로 망쳤다)란 작위를 내려 조롱했다. 공과 후는 작위로 보자면 왕보다도 아래이니, 제왕의 지위도 부정하는 것 또는 강등한 것이다. 황제라는 작자가 판단 하나 그르쳐서 받는 엄청난 굴욕.(흠종의 경우는 억울한 데가 있지만) 또한 휘종과 흠종을 포함하여 붙잡힌 인원들은 금의 영토에서도 동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오국성, 즉 현재의 하얼빈 이란현 근처에 단체로 모여서 귀양살이를 했다.[6] 오국성에서 남송까지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어 구사일생으로 일부 쇼생크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을 빼면 대부분 금나라 땅에서 생을 마쳤다. 여담으로 탈출한 사람 가운데 남송의 재상에 오른 진회가 악명으로유명하다.

뒷날 고종의 노력으로 고종의 어머니 위씨가 돌아오고 아버지 휘종의 유해 등을 비롯하여 포로로 잡혔던 사람들 대부분은 유해의 일부라도 송환했다. 현재 회령 고령진역 인근 주요 지역에 황제총이 두 곳이나 있는 등 상당수의 무덤이 남아있는데, 모두 오국성에서 생을 마감한 황족들의 무덤들이라는 설이 있다. 특히 이 가운데 황제총 두 곳은 오국성에서 죽은 휘종과 흠종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국성의 위치가 만주 하얼빈 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이는 단순히 지역 설화일 가능성이 크다.[7] 금나라의 초창기 수도가 오늘날 하얼빈시 아청구에 위치했던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였기 때문에 금나라 입장에서도 황족급의 중요한 죄수들을 수도와 멀리 떨어진 외딴곳에 안치 시키기 보다는 수도 가까운 곳에 수감시켜 엄격하게 감시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 추측이다. 휘종은 원래 금나라 영토에 묻혔다가 고종에게 유해가 돌아와 남송의 영우릉에 묻혔다. 그러나 채 200년도 안 지나 나라 때 영우릉이 라마승이자 강남석교총통 양련진가에게 도굴되었으니 안식을 누리지 못했다. 흠종의 무덤은 정확히는 회령은 아니고, 두만강 건너 만주 지역에 있다. 사서에서는 흠종은 오늘날의 허난 성에 매장됐다고 하며 중국 학계는 오국성의 위치를 함경도가 아닌 헤이룽장성 이란현으로 보고 있다.

흠종은 송나라 예법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던 적장자계승원칙으로 정통성 문제가 불거질 염려가 있다는 까닭에 아예 송환조차 못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흠종같이 불행한 사례가 대다수였고, 선택받은 소수만 유해의 일부가 귀향에 성공했으니 매우 안습하다. 특히 황족 여자들이면 거의 대부분 금나라의 여자가 되어 황제, 황족, 고관대작, 장군들의 첩을 했다. 거기다 그 남편이 죽으면 다른 사람(남편의 형제, 친척 등)에게 가기도 했으며, 더 최악이면 세의원(기방)으로 넘어가 기생이나 창녀도 했다.

사조영웅전에서 구처기곽정양강의 이름을 이 치욕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지었다.
양강은 치욕이라 생각 안하는건 안 자랑

수호전에서는 수호후전에서 나온다.[8]

4 휘종과 흠종의 여생

금나라로 끌려온 휘종과 흠종은 금나라 관헌들로부터 인간 이하의 학대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귀양지에서 얼마 되지 않는 작은 땅에서 생거지꼴로 비참하게 살았고 황후랑 고종의 다섯 딸 황녀들이 모두 금나라에 끌려가다가 죽은 때가 아니면 모두 세의원에 가 기생이 되어 여진족의 씨를 받아 혼혈아를 낳은 성노예가 되었으며 휘종의 황후가 병에 걸려서 휘종이 의원을 보내달라고 애걸했는데 금나라 병졸들이 무시하는 바람에 황후가 죽어 아무곳에 대충 시신을 매장 했다거나 썩은 음식을 먹으며 살았다던가, 심지어 흠종이 해릉왕의 화살 과녁이 되거나 말발굽에 밟혀 죽었다는 흠좀무한 내용들이다.[9][10] 중국 사극 정충악비에서는 이 이야기를 충실히 반영하는것을 넘어 휘종과 흠종, 그 외 종친들이 돼지 우리에 갇혀 썩은 음식을 먹는걸로 묘사 된다. 충공꺵 무슨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를 보는것 같다.

하지만 휘종과 흠종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내용은 남신기문록(南燼紀聞錄)이라는 책에서 나오는 내용인데 이 책이 위작이자 야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책의 내용대로 금나라에게 학대를 받았다는 기존 주장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졌다. 대송선화유사에 수록된 이야기 역시 그렇게 신빙성 높은 편은 아니다. 오히려 두 황제를 따라 금나라로 간 채경의 아들 채조가 기록한 북수행록(北狩行錄)과 신음어(呻吟語)등 다른 서적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기존에 알려진 내용과 달리 휘종과 흠종은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복수의 기록에 따르면 그동안 첫번째 학대 가해자로 지목되었던 완안아골타의 차남 완안종망[11]은 오히려 휘종에게 연회를 베풀며 대접을 했다.[12]휘종이 금나라에 도착할때 금나라로부터 비단과 생견을 하사 받았으며 금태종의 명령으로 휘종 부자가 폐서인되어 평민 계급으로 떨어진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의 베이징 근처인 연산부에서 머무를 때 상당히 편하게 머물렀다고 한다. 후에 남송에서 북진 움직임을 보이자 휘종 일가를 후방으로 이동시켰으며 이때부터 휘종 자신이 직접 초가집 지붕을 잇고 농사에도 참여하는 등 이전보다 궁핍하게 산 건 사실이나 역시 학대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지붕 위에 올라가 자신에게 편지를 전해주러 온 하인에게 "도 초가집에 살며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호기롭게 말하기도 했다. 그나마 이런 빈궁한 생활[13]도 희종의 딸과 며느리들이 금나라 종실의 처가 되면서 금태종이 휘종에게 말년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제공해 안락한 생활을 하도록 해 주겠다는 칙조[14]를 내리며 끝나게 된다. 거기에다 휘종은 금나라에 가서도 아들과 딸을 또 낳는다..[15] 다만 저 칙조를 받은 그 해에 휘종의 아들 중 한명인 조악(趙咢)이 아버지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금태종에게 무고했다가 휘종의 부마와 함께 맞아 죽었다.[16]

다만 휘종 등이 금나라로부터 어느 정도 대접을 받으며 지낼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황제 일가를 제외한 송나라 종실들과 수행원들은 개봉에서 금나라로 이동하면서 많은 수가 풍토병과 추위, 굶주림으로 죽었으며 [17] 휘종이 금나라에서 하사받은 옷감들과 자신의 재산을 팔아 이들을 치료 받게 하려 했다는 기록이 전해져 온다.

흠종 역시 금태종의 뒤를 이은 금희종이 태종 때 흠종에게 내린 중혼후라는 모멸적 칭호 대신 천수군공(天水郡公)으로 봉해 주었으며 희종은 흠종에게 녹봉도 줬다.[18]

비단 이런 기록들뿐 아니라 금사(金史)에는 흠종이 죽자 장례를 치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등 물론 금사의 기록임은 감안하더라도 화살 과녁으로 삼아 화살을 쏜 후 말발굽으로 밟아 죽였다는 등의 후일담은 괴담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황제로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던 사람이 평민으로 강등되어 농사 짓고 살게 된 점웰빙은 휘종이나 흠종 자신에게 있어 매우 고되고 비참한 일이었겠지만 금나라측에서 의도적으로 학대한 일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제 일가의 비참한 말로는 애국 애족심을 고취하기 위한 한족 지식인들의 과장이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고 있다.
  1. 그리고 이 곽경은 수호지의 후속작 후수호지에 등장해 양산박 산적들에게 죽는다. 이렇게 정신승리해봐야 현실은 시궁창.
  2. 현 절강성 항주
  3. 현 절강성 소흥
  4. 현 절강성 영파
  5. 현 회하
  6. 함경도 회령이라는 설이 있으나 한국쪽 사서에서만 주장하는 이야기고 중국 학계에서는 오국성이 하얼빈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
  7. 증거라는 것이 중국 동전등이 나왔다는 것인데 이런 유물은 만주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8. 재미있는 것은 전호편에서 전호의 부하인 범권이 병주 옆에 있는 금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자고 말하자. 농민 출신의 변상우린 반란군이지만 그렇다고 금나라에게 투항해서 힘을 얻는것은 큰 파멸을 일으킬 겁니다!라고 말했다. 정작 농민도 알고 있고 반란군도 이런 짓을 안하는데 이걸 한 북송조정은 답이 없는 인물들이란 것을 알수가 있게 묘사하고 있다.그리고 변상은 스포일러죄로 작가에 의해 구멸한테 죽는다.
  9. 바리에이션으로 요나라천조제 역시 해릉왕 앞에 끌려나와 똑같은 방식으로 죽었다는데 그럴 리가 있나(...) 천조제가 죽을 당시 해릉왕은 7살 이었다.
  10. 이 이야기의 출처는 대송선화유사인데 이 책은 휘종의 정치를 비판하고 애국주의를 고취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목적이 목적이니 만큼 해당 에피소드는 창작하거나 과장시켰을 가능성이 농후.
  11. 여진명 '알리불'
  12. 정충악비에서도 다른 여진인들이 포로가 된 송나라 사람들을 학대하고 능욕할때 알리불만이 동참하지 않고 심란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본다. 그리고 아무리 포로라도 황족들인데 예우는 갖춰야 하는거 아니냐고 말한다.
  13. 송나라 사람들이 받았다는 논밭이 45경이라고 하는데 1경이 3000평 정도 되는것을 보면 빈궁하고 고되기는 했어도 야사에서 말한 것처럼 억지로 썩은 음식을 먹고 지냈을 리가 없다.
  14. "예전에 의 여자 여섯 명을 종실의 부인으로 취했으니 너의 말년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주고, 인척에게는 장사를 시켜 돈을 벌어 말년에 의식이 풍족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도록 해 주겠다. 그대의 딸과 며느리가 궁궐 침소에서 시봉을 든 지 이미 2년이 지났는데 조심하고 경계하여 잘못됨이 없어 은혜를 베풀어 돌보아 주고 있다. 이렇게 정숙한 자세는 본래 그대가 키워 준 것이므로 비단 10단을 내려 천자의 은총을 보여 주겠다." - 신음어(呻吟語) -
  15. 청나라때 '만주 8성'으로 불렸던 이이근각라(伊爾根覺羅)씨는 자신들을 휘종과 흠종의 자손이라고 주장했다.
  16. 역시 금나라에 의해 해빈왕(海濱王)으로 봉해진 천조제의 노비들이 천조제를 무고했다가 똑같은 꼴을 당했다.
  17. 3천명중 2천명이 죽었다고 한다.(...)
  18. 일부에서는 아예 희종이 흠종을 귀양지인 오국성에서 금나라의 수도인 상경 용천부로 불러와 살게 해줬으며 흠종을 너그럽게 대해 줬다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