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채

1 인물

權採. 1399~1438. 세종시대의 문신이자 집현전학자. 당시 최고 문장가로 뽑힐 정도로 학문도 깊고 매사에 반듯하여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저서로 삼강행실도를 편찬하는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훗날 무오사화, 갑자사화에 가담한 인물인 유자광고모부이다.

2 오해

그가 조선 세종때 엽기적인 살인 사건의 주인공이라는 내용이 떠돌아 다니는데 사실이 아니다. 일단 소문은 요런 내용.

의금부에서 계하기를, "권채(權採)가 비첩(婢妾) 덕금(德金)을 고랑으로 채워서 집안에 가두었는데, 그 아내 정씨(鄭氏)가 덕금을 질투하여, 머리털을 자르고 똥을 먹이고 항문(肛門)을 침으로 찌르며 하루 걸러서 밥을 주는 등, 여러 달을 가두어 두고 학대하여 굶주리고 곤고(困苦)하여 거의 죽게 되었으니, 형률에 의거하면 권채는 장 80, 정씨(鄭氏)는 장 90에 해당합니다." 하니, 권채는 직첩을 회수하고 외방에 부처(付處)시키고, 정씨는 속장에 처하게 하였다.

세종실록에 그의 아내가 범죄를 저지른 기록이 남아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권채의 비첩이었던 덕금[1]을 권채의 아내 정씨가 질투해서 감금하여 똥을 먹이고 항문에 침을 넣는 둥 여러달 학대를 한 사건이다. 이 당시에는 가정의 개인사를 모두 개인의 허물(정확히는 집안 어른의 허물)로 보았기 때문에 "권채가 여종의 학대를 알면서도 방종하였으므로 죄를 받아야 한다"라는 식의 여론이 일었고 그것이 권채가 여종을 학대하여 죽였다는 이야기가 퍼진 모양.

권채는 이에 처음에는 자신은 그런 일을 모른다고 주장하였으나 첩이 학대당했다라는 내용이 밝혀져 처벌 받았고[2], 권채의 처는 사대부의 아내라서 속전(현재로 보면 보석금과 같은 것)을 내고 풀려났다. 어느 시대나 유전무죄, 무전유죄.

피해자인 첩이었던 덕금은 살았으나 그후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하긴 저런 사건을 당하고 정상적으로 살아갈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신(臣)이 길에서 한 노복이 무슨 물건을 지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사람의 형용과 비슷은 하나 가죽과 뼈가 서로 붙어 파리하기가 비할 데 없으므로 놀라서 물으니,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 권채(權採)의 가비(家婢)인데, 권채가 그의 도망한 것을 미워하여 가두어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본조(本曹)에서 이를 조사했으나 마치지 못하여 즉시 계달(啓達)하지 못했사오니, 그의 잔인(殘忍)이 심한 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권채를 성질이 안존(安存)하고 자세한 사람으로 여겼는데, 그가 그렇게 잔인했던가. 이것은 반드시 그 아내에게 제어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니 모름지기 끝까지 조사하라."

당시 저 사건에도 부민고소금지법을 적용해야 하느냐는 문제로 큰 논쟁이 벌어졌었는데, 세종은 '법 해석을 다르게 해서라도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라고 주장했다. 사실 부민고소금지법은 지방 호족들이나 토착세력에 의해 중앙관리들이 살해당하거나 악의적인 고소로 골머리를 앓던 당시 상황 때문에 어쩔수가 없었던 정책이었고 세종은 본인이 직접 실시하였으나 부민고소금지법에 해당되는 내용이라도 최대한 그에 대한 검토후 처벌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을 악용한 사례는 실록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1. 여종인데 첩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2. 정확히는 부인이 "다른남자와 간통하고 있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어느정도 방조 혹은 협조했다는 이유에 의해 처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