戊午士禍/戊午史禍.[1]
조선 시대의 4대 사화 | ||||
무오사화 | 갑자사화 | 기묘사화 | 을사사화 |
목차
1 개요
연산군 4년 (1498년)에 일어난 조선 최초의 사화(士禍).
2 무오사화에 대한 일반적 인식
급기야 사국(史局-실록청)을 열어 (이)극돈 이 당상(堂上)이 되었는데,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보니 자기의 악한 것을 매우 자상히 썼고 또 세조조의 일을 썼으므로, 이로 인하여 자기 원망을 갚으려고 하였다.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9일, 후대 중종때 무오사화의 전말을 밝힌다고 정리한 기사
무오사화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훈구파 이극돈과 유자광이 손잡고 청렴 결백한 사림파들을 탄압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 인식이 반영된 기록은 연산군 일기에서 무오사화를 총정리한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해당기록에서 무오사화의 시작을 이극돈과 김일손의 갈등으로 보고 있다. 《성종실록》 편찬과정에서 편찬총책임자이던 좌의정 이극돈은, 김일손이 사초에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서술(이극돈이 불경을 잘 외워 출세했고, 성종 사망 시 국상 중에도 기생이랑 놀아났으며, 뇌물을 받아먹었다는 기록)을 보고 김일손에게 수정을 요청하나 거부당하자, 이극돈은 김일손에게 원한을 가졌는데, 마침 성종의 사초에서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보게 된다. 이극돈은 조의제문이 초 회왕의 사례를 들어 세조의 계유정난을 돌려까는 비판하는 내용임을 알게 되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극돈은 훈구파였고, 김일손은 사림파였다.
이극돈은 위에서 언급한 일과 그 외에도 사림파와 자주 대립했는데, 이 일을 계기로 사림파들의 스승격의 위치였던 김종직과 엮어서 사림파를 숙청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극돈은 사초에 실린 《조의제문》을 유자광한테 전해준다. 그리고 유자광도 《조의제문》의 엄청난 파괴력을 느꼈고, 마침 김종직과 개인적으로도 경상도 관찰사 시절에 함양의 학사루에 걸어둔 자신의 시를, 함양군수 김종직이 부임하자마자(아직 유자광이 경상도 관찰사로 상관이던 시절이다!) 떼어내어 불살라버린 일로 김종직에게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던지라, 어느 날 새벽에 몰래 연산군을 찾아가 이를 고해바친다. 이에 단순, 무지했던 연산군은 유자광의 부추김에 넘어가 당장 김일손을 잡아들이라 명한다. 여기서부터 무오사화가 시작된다. 즉 단순한 연산군을 조종한 이극돈, 유자광 등의 훈구파가 힘들이지 않고 사림파를 제거했다는 것이다.
2.1 과연 사실일까?
일단 위의 갈등도 1차 사료인 연산군 일기에 쓰여진 서술이지만 위의 서술은 중종때 사관이 무오사화 과정을 총정리한다고 모아서 쓴 서술이다. 신빙성이 아주 없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일기에서 이극돈의 행동들을 날짜별로 하나하나 뜯어보면 상당히 모순적인 기록이 많다.
일단 이극돈과 사림파의 관계를 살펴보면 관계가 안 좋긴 했다. 김일손이 이극돈을 까는 사초를 썼고 그것이 국문과정에서 드러나 추궁받은 것도 사실이다. 한편 이극돈도 이조판서 시절 사림파의 승진을 가장 적극적으로 막았고, 특히 사림의 영수(領袖) 격인 김일손을 이조정랑에 임명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극돈이 김일손과 사림파의 임명을 반대한 이유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사림파 특히 김일손의 능력에 대한 불신과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장 사림파는 해당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정치적 목적으로 등용된 세력이지, 그 능력을 인정받아 등용된 자들은 아니었고 실무능력 역시 형편 없었다. 그 중에서도 김일손은 후술할 사초(史草) 건(件)만 보더라도, 춘추관의 사관이라는 인간이 국가관료라기보다는 황색언론의 기레기 수준에, 그나마 사초도 알아먹을 수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 쓰는[2], 관료로서의 능력이라곤 없는 인간이었다. 근데 그런 인간을 당하관(정 3품 이하) 인사를 즉 실무관리직의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3]인 이조정랑에 앉히라고 하니 상식적으로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김일손의 이극돈 비방도, 만약 사실이 아니었다면, 황희의 경우처럼 공식적으로 이를 알리고 수정하면 될 일이었고[4],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공문서인 사초를 개인의 청탁만으로 함부로 수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일례로 이극돈이 초보관료이던 예종 시절에 사관이 몰래 세조의 사초를 수정하려다[5][6] 걸려서 사형당한 일도 있었다. 그러니 개인적으로 사초를 고쳐달라는 부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라는 것은 실록청 당상이고 초임관료시절에 충격적인 경험을 했던 이극돈이 뼈저리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덤으로 당시 김일손의 사초는 내용이 너무 난잡해서, 실록청 직원들에게 소위 개무시를 당하던 상황이었다. 이극돈 입장에서는 자신에 대한 김일손의 사초가 기분나 빴더라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될 일이지, 대남방송처럼 그냥 사라질 이야기를 굳이 (정치적이든 진짜든) 생명까지 걸어가며 공론화 시킬 이유가 없었다.
이극돈 개인의 능력을 살펴보면, 이극돈이 능력이 없는데 아부를 잘해 승진했다는 김일손 등의 주장 또한 억측이다. 이극돈은 학식, 판단력, 실무능력 등 어느 하나 빠지는 데가 없는 실무형 관리였다. 집안자체도 보면 본인을 비롯해 다섯 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라고 재상의 지위에 오른 인물들인데다가[7] 실록에서도 이극돈이 '숭정대부 행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된 소식을 전하면서 '이극돈의 정밀함은 그의 형제들이나 심지어 그의 아비보다도 정밀하여… 이때(예순이 넘은 나이)에 이르러 이극돈이 윗자리에 나아가니 사람들이 당연히 여겼다' 라고 언급할 정도이다.[8][9] 이조판서를 절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이조판서는 현대로 비유하면 행정자치부 장관 격으로, 행정조직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어서 암묵적으로 육조(六曹)의 수장을 맡을 정도의 중책인데, 이런 자리에 아무나 설혹 앉힌다 해도 문제만 일으키고 얼마 못 버티니 무능한 자를 앉힐 리가 없다. 그러니 이극돈이 사림파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능력자들 중에서도 일급으로 인정받던 자신이 실무 경력과 능력이 미미한 사림파들을 깔보는 건 어찌 보면 당연지사. 다시 말해 사림파에 대한 태도는 증오나 분노가 아니라, 무시와 경멸에 가까운 것이었다. 사관이라는 인간이 카더라 통신급 기사를 사초에 싣고도 뭐가 문제인지조차 모르니, 이극돈도 갑갑함을 넘어 울화통이 터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거기에 후술하겠지만, 이극돈의 행동은 무오사화를 키웠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이극돈은 연산군을 최대한 말리려고 애쓴 사람이다. 사초를 보려는 연산군을 저지하고 무오사화 전개과정에서 이후 문제가 되었던 다른 사관들의 사초를 내놓지 않은 것도 이극돈이다. 물론 그가 사림파를 옹호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강경처벌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연산에게 밉보였는지 그는 사화 이후 삭탈관직을 당하게 된다. 다시 말해 그에게 무오사화의 책임을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 결국 이극돈은 사림파가 치기어리고 능력 없는 인간들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권력에 위협을 느끼고 숙청하려 했다는 근거는 부족하다.
유자광의 경우는 애매하다. 그가 무오사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한 것은 사실이다. 내용이 난해했던 《조의제문》의 뜻풀이를 한 사람도 유자광이고, 왠지 야사에서 남이의 시를 뒤집을 때가 생각난다. 이걸로 많은 김종직의 제자들과 사림파들을 잡아들인 건 사실이다. 사림파와 사이가 안 좋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성종시절 유자광과 김종직의 기록을 보면 크게 갈등을 빚은 적은 없다. 오히려 (성종 때) 유자광이 파직 후 복귀할 때 복귀를 지지해준 사람들 중 한명이 김종직이었고, 위에서 말하는 현판사건도 구체적인 근거가 없이 (중종 때) 사관의 평으로 넣어둔 사건이다. 그리고 유자광은 무오사화를 일으킨 주범은 아니다. 유자광은 이미 일어난 사건을 확대하는 데에는 지대한 역할을 했지만, 사건의 발발원인은 《조의제문》이 아니다. 그리고 《조의제문》을 사초에다 쓴 것도, 이 《조의제문》이 단종과 연결되어 있다고 밝힌 것도 유자광이 아니라 김일손이었다.
3 무오사화의 배경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과 달리, 강한 문제의식과 신하들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즉위한 임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는 정통성에 약점이 있었고[10] 강한 신하들에 눌려 살았지만[11] 연산군은 조선왕조에서 궁궐 출신 적장자(嫡長子), 즉 현직 왕이나 왕세자의 정실(正室)에게서 태어난 장남 출신의 임금으로, 확고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다.[12] 이는 성종 때 사사건건 대립했던 대간들에 대한 반발의식으로 이어진다. 별별 시답잖은 것까지 이리저리 물고 늘어지면서, 우리들 말을 들으라고 설치기까지 한 대간에게 짜증과 울화통은 터뜨리더라도, 직접적인 제재를 가하지 않고, 결국은 다 들어주었던 성종[13]과 달리, 연산군은 대간의 말이 자신의 생각에 이치에 맞지 않으면 매우 단호하게 물리쳤고, 이에 경계심을 가진 대간들은 왕을 길들여보겠다고 평소 같으면 문제 삼지 않을 문제까지 거의 게거품을 물며 덤벼든다.[14] 성종 대의 무분별한 대간들의 태클에 문제의식을 가졌던 연산군과, 그 태클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대간들의 인식 차는 거의 안드로메다 수준이었고, 그 인식차가 좁혀질 가능성도 전무했다. 이 때문에 연산군 초기의 국정은 거의 개판이 되어간다.[15]
이 과정에서 '위를 능멸하는 풍조'를 혐오했기에 대간을 통제하려 들었던 연산군[16]과, 국왕 권력을 제대로 견제하겠다는 명분과, 조선 역사상 가장 대간에게 관대했던 성종조(朝) 25년 동안에 익숙해진 나머지 말도 안 되는 부분까지 시시콜콜 잔소리를 매우 위험한 수위로[17] 해댄 대간들이 치열한 대립만을 일삼았다.
아주 좋은 예가 연산군 즉위 해에 벌어진 불교 문제이다. 연산군은 즉위 초기에 성종을 위해서 수륙제(水陸祭 혹은 수륙재水陸齋)를 지냈는데, 개국 이래 모든 왕들이 다 지냈고, 숭유억불(崇儒抑佛)의 기치 아래 불교타도를 외치는 신하들도 자신들이 죽을 때는 공공연하게 지냈으며, 인수대비까지 찬성한 일에 대간들이 벌떼 같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18] 심지어 성균관 유생들까지 상소를 올려서 연산군을 거든 노사신을 파직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연산군은 상소가 과도하다하여 성균관 유생들을 모조리 하옥하고 추국(推鞫)하는데, 대간들이 다시 반발, 성균관 유생들을 하옥하면 안 되고, 대간들은 말을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하루에 한번 정도 비율로 이어진다. 다른 예로는, 윤탕로를 통해서 불경을 편찬하게 하는데, 이 문제로 대간들의 반대가 다시 반복. 그 외에 정미수를 당상관으로 임명하는데, 정미수가 문종의 외손(정종과 경혜공주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대간들이 반대하여 몇 개월을 끌었고, 정도전의 후손 정문형이 우의정에 임명되는데, 그 인간은 나이만 많지 한 게 뭐 있냐는 요지로 결사반대, 그 다음에는 노사신에 대한 탄핵이 다시 몇 개월. 대충 이런 식이었다.
문제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세자로서 자부심이 강했으며, 성종이 대간들에게 휘둘려서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을 보아왔던 연산군과, 말발과 비판이 자신의 존재근거라고 믿었던 대간들 사이에서 양보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19] 자연히 즉위 이후부터 성종과는 다르게, 대간에 대해서 강성(强性)인 연산군과 대간의 충돌은 당연한 것이었다.
다만 연산군 치세 초기부터 대간과 연산의 충돌이 시작되어, 그것이 점점 고조되어갔다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다. 연산은 대간들을 하옥하고 정거[20]하는 등 어느 정도 채찍을 쓰기도 했지만, 우의정 정문형의 임명을 취소하고 그럴듯한 비판은 칭찬하는 등 당근도 많이 제시했다. 노사신, 윤필상 등의 피혐[21]에는 다 내 결정이었으니 내 책임이다, 라고 보호해주어 대신들과의 사이도 좋았고, 승지급들을 매개로 제어도 시도했다. 하지만 연산의 성격상 이런 식의 부드러운 대응에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대간은 조금의 양보나 물러섬이 없이, 툭하면 사표를 던지고 물러서는 등 즉위 후 4년 내내 이런 상태였다. 왕이 기가 꺾일 때까지는 결코 안 물러서겠다는 거?? 무오사화는 결국 연산의 분노가 쌓이고 쌓이던 것이 폭발한 것이다.
3.1 김일손의 사초
김종직의 제자로 김일손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성종 때는 사관으로 주로 활동했다. 다만 능력은 정말 떨어져서 김일손이 사초를 자기 멋대로 뒤죽박죽 써버렸고(…), 이 때문에, 후술하겠지만, 성종실록을 집필할 때 실록청 당상 윤효손(尹孝孫)은 '(김일손의 사초는) 날짜에 따라 기사(記寫)하지 아니해서, 어느 날 아래에 편입해야 될는지 모르겠다' 고 언급하는 등 실록청 관리들에게 무시당할 정도였다.[22]
문제는 이런 개인일기장만도 못한 사초에 심각한 내용들이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하나 같이 세조를 모독하고 집권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글들이었고, 일부는 왕실을 모욕하는 글들도 있었다. 그나마 근거라도 정확히 썼으면 모르겠는데, 하나같이 소문에 불과한 카더라급이거나, 근거? 그게 뭔데? 식의 내용이었다.
- "권귀인(權貴人)은 바로 덕종(德宗)의 후궁(後宮)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권 씨가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23]
- 김일손은 허반에게서 들었다고 증언했는데, 정작 허반은 자기 집안의 소문(…) 중 '의경세자의 상(喪)을 끝마친 뒤에 세조가 의경세자의 후궁 권 씨에게 육식(肉食)을 권하고, 권 씨가 안 먹자 세조가 화를 내고 권 씨가 달아났다'는, 김일손의 기록과는 전혀 다른 내용의 소문을 알려 줬는데, 김일손은 이것을 가지고 한편의 소설을 써냈다. 김일손의 사초 중 가장 근거 없는 내용이자 위험한 내용으로, 당장 세조는 정희왕후 외에는 별다른 후궁도 두지 않았는데, 그런 막장불륜을 저질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24] 무엇보다도 이걸 들은 연산군이 "실록은 직필이어야 하거늘 어찌 들은걸로 썼느냐?" 라고 할만큼 공정성에 문제가 있는 일이다.
- 소릉의 재궁(문종의 부인인 현덕왕후의 관)을 꺼내 바닷가에 버렸다.[25]
- 현덕왕후를 소릉에서 다른 곳으로 이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터가 크게 좋은 자리가 아니었을 뿐, 바닷가와는 크게 거리가 있다. 뭣보다도 정말 바닷가에 버렸다면 중종때 현덕왕후를 다시 소릉에 묻을수 있었을리가 없다.
- 노산군의 시체를 숲 속에 버렸는데, 한 달이 지나도 염습하는 이가 없으니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다. 한 동자가 어느 날 밤에 와서 시신을 짊어지고 달아났는데,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 없다.[26]
- 최맹한(崔孟漢)에게 들었다고 진술했는데, 이건 김일손의 찌라시들 중에서 그나마 사실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당시에 세조는 단종의 시신을 그냥 방치했고 이를 엄흥도가 몰래 묻었기 때문에 시신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즉 그나마 진실에 가까운 편인것이다.
- "황보(皇甫)·김(金)이 죽었다"[27]
- 이 구절은 당시에는 역적취급을 받았던 황보인과 김종서에게 역적이라는 칭호를 안 쓰고 일반인처럼 써서 문제가 되었는데, 김일손은 그 이유를 두 사람이 절개로써 죽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이 두 사람을 죽인 세조를 비난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사실에도 어폐가 있는게 두 사람은 절개를 지킬 새도 없이 죽었다.[28]
- "영응대군 부인 송씨가 중 학조와 사통(私通)을 했다"[29]
- 김일손은 이것을 박경에게 들었다고 진술했고, 박경은 이것을 동대문(東大門)에 ‘영응 대군 부인 송 씨가 중 학조와 사통(私通)을 했다는 찌라시가 붙어있기에(…), 이것을 김일손에게 알려줬다고 진술했다.
그야말로 감히 왕을 능멸했다고 할 정도의 위험수위였고,[30] 현대에도 기래기들이 이런 짓 했다가는 명예훼손 등 형사에 민사까지 소송을 푸짐하게 받을 만한 일인데, 왕조국가인 조선에서, 더욱이 자존심이 강하고 왕의 권위를 다시 찾으려고 노력했던 연산군으로서는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큰 문제였다. 그리고 왕실의 권위 문제는 둘째 치고, 이 과정에서 김일손의 처사는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실록은 엄연한 공식 역사기록인데, 거기에 확인이 불가능한 소문성 기사를 1차 기록인 사초에 제멋대로 집어넣은 건, 대놓고 "세조! 엿이나 먹어라!" 라는 짓이다. 당시에는 사초를 중요히 여겨서 쉽게 삭제하지도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31] 세조의 부당한 집권을 사림 출신으로서 개인적으로는 비판할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사관으로서 본분을 잊고 확인 없이 소문성 기사를 집어넣은 것은 현대의 기준으로도 분명히 문제가 있다. 하물며 그 세조의 증손이 왕이고 그 왕이 연산군인 시절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32]
4 무오사화의 주요과정
성종 사후(死後) 연산군은 이극돈 등에게 성종의 실록을 쓰도록 지시한다. 따라서 1차기록인 사관들의 사초를 모으고 이중에는 김일손의 사초도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대로, 김일손의 사초는 훈구파와 사림파와의 갈등과 전혀 관련 없이, 김일손이 사초를 너무 못써서(…) 국가기록물인 실록에 넣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성종실록 편찬 초기에는 묻혔다. 그러나 1498년 실록 편찬이 마무리가 되어갈때 즈음에 성종실록의 편찬 책임자인 이극돈은, 한치영의 언급을 계기로 김일손이 뒤죽박죽 쓴 사초에 뭔가 이상한 것을 쓴 것을 알게 된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기록의, 이극돈이 해당사건을 항변한 상소에 따르면, 이극돈은 이후 노사신 등과 의논하여 공식적으로 이를 수정할 것을 논의하고, 이후 7월 9일에는 좌의정 어세겸 등과 같이 김일손이 쓴 이 초특급 찌라시를 목격하게 된다. 이극돈은 상소에서 자신은 16일에 이 사실을 알리려고 했다고 항변했지만, 이건 연산군한테 안 죽으려고 항변한 것으로 보이며, 실제 이극돈의 행동을 살펴보면 (실제로는 그렇게 되었지만) 조정에 피바람을 몰고 올 수 있는 이 찌라시를 숨기거나, 적어도 김일손 주변인으로 사건을 축소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난다.
이극돈은 김일손의 터무니없는 이 기록을 보고, 노사신과 더불어 "어쩌다 세상이 이렇게까지 되었냐?"라고 울었다(!!)고 한다. 능력도 없는 사림이 세조가 싫다는 김일손은 대의명분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철없음에 북받쳐서 쓴 글이나 다름없었는데, 이런 자가 사림의 영수씩이나 하고 있으니, 정말 답이 없다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건 단순히 김일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성종실록을 자신들의 목숨도 위협하는 초특급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극돈은 이것을 연산군에게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그냥 넘길 경우 자신에게도 책임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 이극돈은 여러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었는데, 그 중 마지막으로 물었던 유자광이 이 이야기를 듣자, "아니, 이 어찌 머뭇거릴 일입니까" 라며, 노사신, 윤필상, 한치형과 같은 대신들에게 우리들은 세조 대왕께 큰 은혜를 입었으니 이를 두고 볼 수는 없다고 설득했고, 이 사실을 연산군에게 알렸다.
1498년 7월 11일, 김일손의 스캔들 기사는 결국 연산의 귀에 들어가서 연산의 분노가 폭발했고, 연산군은 바로 김일손이 쓴 사초를 가져오라고 지시한다. 원칙적으로 국왕이 사초를 직접 보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기에, 이극돈은 처음에는 극렬 반대하였으나, 역모에 준한 사안의 심각성을 감안, 이극돈 등 대신들이 김일손의 사초에서 문제되는 부분을 직접 선별하여 연산군이 이를 보는 것으로 절충되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기에 결국 무오사화라는 헬 게이트가 열린다.
그리고 다음날, 7월 12일, 고향으로 낙향해 있던 김일손과 허반을 잡아와서 연산군이 직접 국문(鞫問)했는데, 의경세자의 후궁 기사를 시작으로 김일손에게 문제의 기사의 출처를 묻기 시작했다. 김일손이 출처를 밝히면서 연루자들이 하나하나 체포되었고, 왕에게까지 깡다구를 부리던 대간들조차도 단체로 버로우를 탄 채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문제의 초점은 그 스캔들 기사의 출처였다. 그런데 사초에 적혀있던 김일손의 다른 기사 부분이 추가로 적발되면서,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게 된다.
5 핵폭탄 《조의제문(弔義帝文)》
바로 이 과정에서 《조의제문》이 걸려들게 된 것이다.
7월 13일에 김일손을 심문하던 도중 단종의 시신에 대한 기사를 추궁하자, '김종직이 단종의 일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분개했고, 때문에 김일손이 조의제문을 사초에 넣었다고 김일손이 증언했다. 《조의제문》은 사실 처음에는 그렇게 중요한 글이 아니었다. 워낙 내용도 어렵고 은유가 많아, 도대체 김종직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아본 사람이 없었다.[33] 하지만 김일손의 증언을 계기로 유자광은 《조의제문》을 해석하기 시작했고, 이틀만인 7월 15일, 연산군에게 《조의제문》의 숨은 뜻을 해석해서, 《조의제문》이 세조의 쿠데타를 비난하는 글임을 고한다. 연산군은 분노하면서, 17일에는 대신들에게 《조의제문》과 그 뜻을 알려주면서, "이 새끼들 봐라!? 이 따위 생각을 품고 있던 주제에 그걸 숨기고 내리 세 조정을 섬겼단 말이냐? 무서워서 내 몸이 다 떨린다!"라고 일갈했고, 이에 신하들도 동조했는데, 영의정 윤필상이 즉각 "글이 너무 사악해서 감히 입으로 읽지 못할 뿐 아니라, 두 눈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대역죄를 적용하시어 김종직을 부관참시하소서" 라고 청했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신하들이 그들을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김종직의 제자인 표연말과 홍한까지 앞을 다투어 김종직을 부관참시할 것을 청했다. 표연말과 홍한은 연산조 초기에 연산에게 사사건건 트집 다 잡았던 양반들인데도, 자기 스승을 찢어발기라고 스스로 고할 정도로 깨갱한 것이다.[34] 심지어 가장 온건한 의견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는 않은데 이미 죽은 애를 또 찢을 거나 있습니까? 작호만 거둡시다" 정도였다.[35] 그리고 김종직의 제자들이 역모죄로 잡혀 들어오면서 무오사화는 절정에 이른다.
일부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아니, 뭐 이런 걸 가지고 그러냐?’ 라는 식으로 스스로 무식을 인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조선건국에 반대하여 낙향하여 은둔하던, 사림의 시초가 된 선비들과는 근본부터 다르다. 그리고 그런 선비들은 별 다른 처벌도 받지 않았다. 반면 이들은 지금의 왕은 모리배들이 세운 것에 불과하니, 그런 자는 왕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히 그 왕이 주는 벼슬을 받고 먹튀 국가의 녹을 먹어온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벼슬살이를 하면서 그 관직을 이용해 몰래몰래 비난을 일삼아온 셈이다. 이는 기군망상(欺君罔上)의 죄로, 당연히 전근대 시대엔 대역죄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아무리 세조가 부당한 쿠데타를 저질렀다고 해도, 연산군은 세조의 증손자다. 그 당시에 단종은 노산군이라 불렸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단종이 복위된 것은 수백 년 후인 숙종 시대의 일이다. 그랬기에 당시 김일손의 행동은 왕실을 능멸한 행위였다. 한마디로 왕실에게 있어서, 김일손의 행동은 왕실 전부가 반란의 무리들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고, 연산군 개인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감히 증조부를 까버린 역적과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해석 여지에 따라서는, 아예 세조의 뒤를 이은 왕통을 부정한다는 혐의까지 받을 수 있었다. 《조의제문》이 핵폭탄급의 위력을 발휘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성군(聖君)이라 불리던 선왕인 성종도, 만약 자기 생전에 이 일을 알게 되었다면, 평소 신하, 특히 터무니없는 것조차도 꼬투리 잡아 괴롭히던 대간들에게 마지못해 져주던 모습과 달리, 그냥 조용히 넘어갈 가능성은 극히 낮았을 것이다.[36] 성종은 정통성 문제로 평생을 골머리를 썩였던 인물이었다. 이런 와중에 자기 일족의 역린을 잡아뜯어버리는 이런 글을 알았다면 분노는 둘째치고 성종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어쩌면 무오사화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대숙청을 벌였을 것이다.
그리고 김종직을 부관참시하라 했다 하여 연산군이 폭군이어서 그렇다는 평도 무리가 있다. 만약 연산군이 아니라 다른 왕이었어도[37] 왕실을 능멸한 자에게 그러한 조치를 하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가령 명군이라 칭송되는 영정조도, 사초에 자기 어머니가 무수리이고, 터무니없는 내용을 적어 그녀를 모독한 것이 발견되어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비방하거나 모욕한 게 나왔다고 한다면? 역시 무오사화와 같은 일이 발생하고 똑같이 부관참시를 명했을 것이다. 특히 성종의 아들인 연산군 입장에서는 김종직이나 김일손을 불쾌하고 혐오스럽게 여길 수밖에 없는데, 증조할아버지한태 헛소리했다가 개털된 김종직을 아버지가 성은을 베풀어 주었는데 이따구 글이나 쓰고있었으니 연산군으로선 선왕의 조부를 모독한 배은망덕한 자들이라고 치를 떨 만하다.
실제로 나중에 중종반정으로 즉위한 중종도 갑자사화의 피해자들은 반정후 3일만에 무죄로 인정해주고 갑자사화의 장본인이라 생각하던 임사홍은(실제로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바로 연좌해 가족들을 처벌했지만, 무오사화를 주도했던 유자광은 공신으로 그뒤 수년간 자리보존을 했고 김종직과 김일손은 반정공신들도 그 죄를 죽어마땅하지만 연좌는 너무했다고 죄를 인정하는 상황이였고, 결국 반정후 1년 가까이 지나서야 신원을 받을 수 있었다(중종실록 1507년 6월 11일 기사). 신원할때도 사림들은 조의제문이 성종이 알고도 인정했던거라고 거의 왕실모독급 구라를 쳐야했다[38]. 중종도 이런 결정이 떨떠름했는지 두사람을 신원할때도 두사람은 성종한테 죄를 지었다고 밝혔고 나중에는 위 소문의 제공자였던 허번의 딸에게 노비를 주는 건의를 거부하거나 유자광을 다시 공신으로 복권시키고, 그 후 이극돈도 신원하려다 실패하는 등(중종실록 1511년 06월 16일 기사) 중종도 무오사화를 떨떠름하게 본 행동들이 있었다.
6 무오사화의 결과
이후 줄줄이 사초(史草)들이 공개되었다. 김일손의 동료였던 다른 사관들의 사초에도, 김일손만큼은 아니지만 비슷한 정도의 악의적인 소문 정도에 지나지 않은 걸 역사랍시고 기록해놓은 세조 까는 기사들이 기록되었음이 밝혀진다. 물 만난 유자광은 사태를 확산시켰고, 사초에 불순한 말을 쓴 사관들이 차곡차곡 걸려들었다. 물론 여기에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썼다가 걸려든 사관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역모급으로 확장된 이상 용서는 없었다.
무오사화로 인해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는 거열형. 이목, 허반, 강겸은 참수형, 표연말, 홍한 등은 곤장 100대의 유배형에 처해졌고, 이들의 스승이었던 김종직은 부관참시까지 당했다. 또 사관이었지만 무오사화 이전에 죽은 신종호는 관작 삭제를 당했다. 이 밖에 사림파의 무수한 사람들이 대부분 유배를 당했고, 김일손에게 소재를 제공해준 사람들도 유배를 당했다.
이들이 형을 당하는 과정은 모든 관리가 지켜보게 했고, 이 과정에서 낯을 가리거나 참석하지 않았던 관리들도 처벌받았다. 실록청 관리들 중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등은 파직 당했고, 홍귀달, 조익정, 허침, 안침은 좌천되었으며, 조위는 유배당했다. 이후 유자광은 8월에 다시 이 일을 끄집어내, 남은 김종직의 제자들을 유배시켰다.
사실 이때 사림파는 역모 혐의 등으로 가루가 될 뻔했다. 이때 유자광은, "이자들의 악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니 간당들 일체를 뿌리 뽑아 버려야 조정도 깨끗해지고 뒤탈도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하며 사림을 초토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훈구파이며 사림과 자주 갈등을 일으켜, 사림으로부터 소인배 소리를 듣던 노사신이 이들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최대한 죽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앞에 했던 유자광의 말에는, "무령군은 무슨 말을 그리하십니까? 청론(淸論)하는 선비가 마땅히 조정에 있어야지 없는 게 나라의 복은 아닙니다" 라고 답했다. 진정한 대인이랄 수 있는 이런 사람 덕분에 사형이 확실시되던 인물들 중 상당수가 유배형으로 끝났다. 사림파도 그의 은혜를 생각해서, 나중에 《연산군일기》 등에서 유자광 등 다른 훈구파는 죽어라 욕하고 비판하지만, 노사신은 잘 비판하지 않는다.[39]
노사신은 김일손의 사초 파문이 대형 옥사로 번질 듯하자 사안을 축소시키려고 노력했으며, 다음과 같은 말들로 사림을 옹호했다. "연루자를 국문해야 하겠지만, 제자라고 모조리 국문하면 소요가 일까 걱정이 되옵니다", "종직은 대역죄로 논하는 게 당연하지만, 일손 등은 사문만을 찬양했으니 종직과 죄를 같이 하는 것은 부당하옵니다." "청론하는 선비는 조정에 마땅히 있어야 합니다." 노사신이 자신을 공격하던 사림을 이렇게 적극 옹호한 이유는 대간이 약해지면 신권 자체가 약해지고, 지나치게 강화된 왕권은 유교 정치 자체를 흔들 수 있다는 대승론(大乘論)적 시각에 근거한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이후 노사신은 무오사화가 마무리되고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는데, "신의 소원은 상벌이 적절히 행해지게 되는 것과 전하께오서 부지런히 경연에 납시는 것뿐이옵니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여담으로 이극돈은 당대 최고 명문 광주 이 씨로서, 무오사화 당시 그의 벼슬은 좌찬성이었다. 다시 말해 정승 1순위 자리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여파 때문에 다시는 정승 직에 못 오르고 판서로 관직을 마치게 된다. 거기다가 어찌 보면 아무 잘못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데도, 후세에는 무오사화의 원흉, 주모자로 낙인찍히게 되니… 어떻게 생각해 보면 무오사화의 가장 큰 피해자들 중 하나다.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로 둔갑해 버리고 만 셈이다.
7 사화(士禍)냐, 사화(史禍)냐?
사화(士禍)란 말 그대로 선비[士]가 불행[禍]을 당한 것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무오사화는 무오년(戊午年)에 일어난 사화(士禍)라 하여 무오사화란 이름이 붙은 것이고. 그러나 상술(上述)되어 있듯, 이는 사실이든 아니든 일단 내 입맛에 맞으면 사실로 기록하겠단 식의 무개념 태도로 서술된 사초(史草)가 방아쇠가 된 면이 크다. 그래서 무오사화만은 사화(士禍)라고도 하지만, 사서(史書)에 관련된 필화(筆禍), 혹은 사필(史筆)로 인해 비롯된 옥사(獄事)라 하여, 무오史禍라고도 하는 것이다.
또한 결과론적이긴 하나,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왕조실록》에 대해 역대 임금들이 함부로 실록을 읽거나[40] 집필에 간섭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무오사화가 '폭군 연산군과 간신 유자광의 악행'이란 평가를 받게 되면서[41], 연산군 이후의 임금들이 만약 실록에 손이라도 대려 하다간, "아니 되옵니다! 그건 연산군과 같은 폭군이나 하는 짓거리입니다!"란 아주 훌륭한 방패막이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의 사관들은 보통은 김일손처럼 막나가지도 않고 적당한 선에서 행동한 것도 있었다. 반대로 보면, 무오사화 자체는 다른 사화에 비해 사림파들이 갈려나갈 명분이 충분했기에, 만약 연산군이 무오사화 이후 무난히 왕 노릇 하다가 임종했으면, 역으로 후대 왕들이 사초를 들춰 보는 선례가 될 뻔했다.
그리고 역사의 인식을 수정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연산군과 훈구파가 죄없는 사림들을 모함했다는 편견과 달리, 이 사건은 김종직과 김일손 일파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이다.
8 무오사화를 표현한 콘텐츠
사극 《왕과 비》 후반부에 무오사화의 과정이 잘 나와 있다. 더불어 거열형과 참수형 등 고어한 처형장면도 묘사된다.
- ↑ 무오사화에 한해 역사 史자를 넣어 史禍라고도 부른다. 왜 이렇게 부르는지는 본문 참고.
- ↑ 애초에 조의제문 같은 잡글을 역사 기록인 사초에 끼워 넣는 것 자체가 할 짓이 아니다.
- ↑ 정 3품 이상부터는 국왕이 직접 관리하기 때문에 이조정랑은 최고의 요직이였고, 훗날 동서붕당의 원인이 될 정도로 조선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요직이었다.
- ↑ 다만 황희는 수정하기로 합의까지 한 기록도 실록에 있는데, 합의가 잊혔는지 그대로 실려있다.
지못미 - ↑ 훈구파를 비방하던 내용을 너무 많이 써서 후환이 두려웠다고 진술했다
- ↑ 예종실록 권5 예종 1년 4월 4일 정축 1번째 기사
- ↑ 한 집안의 형제5명이 다 국무총리를 해봤다고 가정하고 생각하자
- ↑ 성종실록 권261 성종 23년 1월 22일 계사 3번째 기사
- ↑ 당시 둘째형인 이극증과 셋째형인 이극감은 죽고 없었지만 제일 큰형인 이극배가 살아있을때였다!
- ↑ 세조의 계유정난 운운이 아니라, 한명회의 사위라서 원래 즉위할 수 없는데도 즉위한 것이 컸다. 특히 (당)숙부 제안대군의 존재는 더욱 더 정통성에 의심을 품게 하였다.
- ↑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서 '대간'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하면, 단 4명의 군왕만이 1천 건이 넘는 검색어를 보여주는데, 성종, 연산군, 중종, 그리고 선조이다. 중종이 9천 건이 넘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고, 그 다음이 2천 건이 넘는 성종, 1,500여건의 연산군, 1천 건을 간신히 넘긴 선조로 이어진다. 참고로 세조는 100여건 정도이고, 태종이나 세종, 재위기간이 길었던 영조 등은 600여건 정도.
- ↑ 최초의 적장자 임금이었던 문종은 세종이 사가에 있었을 때 태어났고, 단종은 연산군 즉위 시점에는 반역자로, 폐위 상태였다. 연산군이 태어난 날 임사홍은 "지금까지 세자 저하들이 모두 사저에서 태어나 이런 경사가 없었습니다" 라고 경하를 올렸다.
- ↑ 성종(조선) 항목에 자세히 나와 있지만, 대간이 그렇게 할 수 있을 정도로 키워주고 밀어준 게 성종 본인이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 ↑ 연산군 즉위 초기의 기사를 보면,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대간들이 더 문제이다. 대간들은 연산군 즉위 초기에 소위 신고식 모드에 들어갔다.
- ↑ 당시 국왕의 인사업무는 최종적으로 대간이 동의해야 확정되었다. 그런데 대간들이 툭하면 연산군이랑 싸우면서 총파업을 해버리는 바람에, 국가의 인사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이러니 행정이 제대로 될 리가…. 그나마 실무적인 부분은 그나마 굴러가서 백성들의 삶은 괜찮았다고 하는데, 이는 우리들 대부분에겐 놀라운 일로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연산군이 자제를 하면서 국정을 운영하였기 때문이다.
- ↑ 연산군일기 권2 연산군 1년 1월 30일 갑인 3번째 기사
- ↑ 성종(조선) 항목을 보면, 다리 셋 달린 닭 태어난 것도 왕 잘못이니 반성하라고 대간들은 악다구니를 써댔다. 사실 이쯤 되면 연산군이 특별히 까칠한 성격이었다기보다, 성종이 좀 이례적으로 관대한 군주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 연산군일기 권1 연산군 즉위년 12월 26일 신사 5번째 기사
- ↑ 아닌 게 아니라 성종 대에는, 대놓고 요약해보면, 좋은 대간이란 왕이 분노하여 화를 내는데도 그에 굴하지 않고 바락바락 대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온갖 구실로, 엄청난 수위의 비판들이 왕에게 가해졌다. 성종 문서 참조.
- ↑ 停擧. 유생에게 일정 기간 동안 과거를 못 보게 하던 벌로, 대개 과거시험장에서 부정행위를 하다가 걸릴 때 내리는 벌이었다. 심할 경우 평생 과거를 못 보게 하는 영영정거(永永停擧)가 있었다.
- ↑ 避嫌. 탄핵을 받은 자가 혐의가 풀릴 때까지 벼슬에 나가지 못하는 것.
- ↑ 연산군일기 권30 연산군 4년 7월 25일 기미 2번째 기사
- ↑ 연산군일기 권30 연산군 4년 7월 12일 병오 2번째 기사
- ↑ 물론 왕가의 간통 여부는 왕가에서 증명해주지 않는한 알 수는 없다. 그렇기에 더욱 조심히 해야했을텐데 그러지 않았다.
- ↑ 연산군일기 권30 연산군 4년 7월 12일 병오 5번째 기사
- ↑ 연산군일기 권30 연산군 4년 7월 13일 정미 3번째 기사
- ↑ 연산군일기 권30 연산군 4년 7월 12일 병오 5번째 기사
- ↑ 김종서는 세조가 건네준 글을 읽다가 세조의 종인 임어을운의 철퇴에 맞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후 세조 측이 보낸 무사들이 오자 자기를 그냥 체포하는건줄 알고 갔다가 죽었고 황보인은 명에 의해 궁에 갔다가 매복하고 있던 세조의 무사들에게 죽었다.
- ↑ 연산군일기 권30 연산군 4년 7월 12일 병오 9번째 기사
- ↑ 한마디로 "나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요." 이다.
- ↑ 어느정도냐면 세종실록 편찬때 영의정이었던 황희의 기록에 악의적인 부분이 있었는데 내용이 '황희는 재산도 넉넉하지 않고 장인에게 노비 셋만 물려받았는데 저리 잘사는데 매관매직해서이다. 또 박포의 아내와 간통을 했다.' 인데 논란 끝에 삭제하자는 분위기가 우세했으나 끝내 삭제되지 않아 세종 10년 6월 25일자에 실려있다.
- ↑ 당연하겠지만 설령 성종이 알았다 해도 이건 적어도 교살형 감이다.
- ↑ 다른 한편으론 이따위 알아먹지도 못할 글을 국가 기록인 사초에 끼워 넣었단 자체가 김일손의 관료 부적격성을 보여준다.
- ↑ 이렇게 노력을 했지만, 표연말과 홍한은 단단히 찍힌 탓에 유배형에 처해져 유배지로 가던 도중 비참하게 객사했고, 사후 갑자사화에도 연루되어서 부관참시를 당한다. 안습.
- ↑ 이 인간들은 곧장 국문장으로 끌려나갔다.
- ↑ 아니, 그 어질기로 유명한 세종대왕마저도 만약 태종의 정통성을 부인했다면? 결과는 비슷했을거다.
- ↑ 심지어 그 세종대왕이었어도 가만있지 않았을거다. 그리고 연산군이 진짜 폭군이 되는 건 갑자사화 이후 폐위 당할 때까지 2년 동안이다.
- ↑ 조의제문의 본 뜻이 알려진 것은 김일손의 증언 이후다. 그리고 만약 성종이 알았더라면 위에서 언급한대로 피바람이 났을 것이다
- ↑ 이런 점들이 사림이 전가보도(傳家寶刀: 대대로 전해진 귀한 칼)처럼 휘둘렀던, 소인배이니 군자답지 못하다느니 하는 비판이 반대를 위한 반대, 공격을 위한 공격임을 보여준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이런 사례는, 사림은 자신들과 대립하면 소인배라고 비난하며 끌어내리려 한 것이지, 사람됨이나 능력, 학문적 소양 등을 보고 판단한 게 아니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 ↑ 국정 운영에 참고하기 위해 실록의 내용을 찾긴 했지만, 임금이 직접 실록을 읽어보는 게 아니라, 사관에게 지시하면 사관이 실록에서 필요한 내용을 찾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 ↑ 이는 이후 사림이 다시 권력을 쥐고, 그것이 조선 말기까지 계속된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