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사화

甲子士禍

조선 시대의 4대 사화
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

갑자사화라고 쓰고 갑자훈화라고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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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산군 10년(1504년)에 일어난 조선 두번째 사화(士禍).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와 관련되어 많은 선비가 숙청된 사건이다. 사화라는 명칭처럼 사림의 피해는 당연히 있었고 추가로 윤필상, 이세좌, 이극균, 성준 등 화를 당한 훈구파들도 많다. 부관참시를 당한 한명회, 한치형, 정창손, 심회 등도 역시 훈구파로 연산군의 폭력성과 잔인성으로 화끈하게 사림과 훈구, 다같이 쓸려 나갔다고 봐야 한다.[2]

아울러 이 시기를 이후로 연산군의 완전한 암흑화가 진행됐다.

2 배경

흔히들 이 사건이 연산군이 어느날 갑자기 자기 어머니의 죽음의 원인을 알게되어 한순간에 벌어진 사건이라 하지만,그래서 갑자(기 일어난)사화라 카더라 연산군이 이를 이미 알고 있었으며 이를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설도 있다. 연산군 항목을 참조하자.

여하튼 연산군이 일단 자식으로서 어머니의 복수를 생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높다. 또한 연산군이 무오사화로 대간들을 약간 누르기는 했으나 대신들의 힘은 여전히 건재했고 성종과는 달리 강력한 왕권의 추구를 외친 연산군으로서는 대간의 약화로 쓸모가 사라진 훈구대신들을 슬슬 토사구팽을 해야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단 연산이 자신의 친모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알게 된 것은 오히려 즉위 얼마 후 성종의 행장을 짓다가 "윤기견이란 자가 누구인가? 영돈녕 윤호를 잘못 쓴 것이 아닌가?'라고 물었는데 윤기견이 누군고 하면 연산의 외조부다. 신하들이 "그 사람은 폐비 윤씨의 아비됩니다." 라고 하자 연산은 자세한 정황을 보고받게 되고 그날 수라를 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단 몇년간은 별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폐비 윤씨와 관련한 시를 지어 바치게 하고 이세좌를 시켜 폐비 윤씨의 묘 복구를 하게 하는 등 몇몇 조짐을 드러내긴 했다. 하여튼 연산이 처음부터 폭주하지 않은 점은 분명하다. 뭐냐...더 무섭다 원래 폭풍이 일기 전의 고요함이 더 무서운 법이다.

3 불길한 징조

연산 9년 양로연이 열렸는데 당시 예조판서였던 이세좌는 술을 잘 하지 못하는 걸 임금이 내린 술을 억지로 마시다 그만 술을 흘려 연산의 곤룡포를 적시고 만다. 이에 연산은 이세좌를 파직시키고 유배를 보내는 등 분노했다. 이세좌가 폐비 윤씨의 사약을 내린 것을 기억하고 있던 대신들은 불안에 떨었으나 몇 달 후 성준의 외손자에게 벼슬을 내리고 이세좌를 방면해 화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대신들은 연산이 단순히 심술을 부린 것으로 해석하여 안심해 버린다. 그러나...

4 복수의 시작

연산 10년 3월 간택령이 떨어져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홍귀달에게도 손녀딸을 입궐시키라는 명이 내려졌으나 홍귀달은 이를 거부하고 들여보내지 못하는 이유를 해명하는 글을 올렸는데 이걸 본 연산이 "시밤, 이것들이 오냐오냐하니까 감히 머릿꼭대기까지 기어오르네?? 이게 다 그 때 이세좌에게 제대로 벌을 안 준 것 때문이야!!"라고 하면서 이세좌까지 물고 늘어져서 이세좌를 유배보내고 그의 아들과 사위들까지 모조리 곤장을 쳐서 유배보낸다. 홍귀달: "알아서 기었어야 했는데 너무 까불었네.."

이세좌를 유배보낸 이후 연산군은 폐비 윤씨를 모함했다는 이유로 성종의 후궁인 엄숙의와 정소용을 끌고 와서 피떡이 되도록 두들겨 팼고, 이것도 모자라서 정소용의 자식인 안양군 이항과 봉안군 이봉에게 칼을 씌운 채, 엄숙의와 정소용을 가리키며 죄가 매우 큰 여자들이니 몽둥이로 때리라고 시켰다. 이항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때렸으나, 이봉은 맞는 사람이 자기 어머니라는 것을 알고 끝내 몽둥이를 들지 못했는데, 이를 본 연산군이 사람을 시켜서 계속 몽둥이질을 하도록 지시해서 결국 둘 다 그 날 죽고 말았다.[3][4] 그 뒤에 엄씨와 정씨의 시신을 갈기갈기 찢어 젓을 담가서 산과 들에 뿌려버리게 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5][6][7]

이후 장검을 뽑은 연산이 계모 자순대비의 침소로 가 만나고 싶다며 나오라고 소리쳤으나 공포 분위기에 아랫사람들은 모두 도망치고 자순대비는 겁을 먹고 나오지도 못했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중전 신씨가 만류하여 연산은 발걸음을 돌려 안양군과 봉안군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대왕대비전으로 끌고 간 후 인수대비에게 억지로 술을 올렸다. 이어 어째서 자기 어머니를 죽였냐는 등의 매우 불경한 언사를 내뱉었다고 한다. 이때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죽였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이건 공식적 기록 어디에도 없는 100% 순수한 야사다. 그래도 할머니인지라 차마 신체적 폭행을 하진 못하고 욕설만 한 모양. 이 날의 충격 때문인지 인수대비는 한달 후 세상을 떠났다.

KBS 2TV의 사극 한명회에서는 병석에 누워있던 인수대비가 술상을 들고 처들어온 연산군을 진정시키려고 해명을 하나 연산군의 패드립에 결국 분노해 쉬지 않고 나무라다 연산군의 포효(...)와 동시에 소반 킬 당하는 걸로 마무리 된다. 반면 KBS 대하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의복을 단정이 갖추고 인수대비가 앉아서 연산군을 엄하게 나무라고 이에 연산군이 인수대비의 태도를 비꼬면서 거친 말을 퍼붓다가, 호위무사의 칼을 뽑아들고 달려들다가 인수대비를 발로 걷어차는 장면이 나온다.[8]

그리고 이날을 시작으로 연산군의 피의 숙청이 벌어지게 된다.

4.1 논란?

죽었다는 두 명은 이후에 다시 서인으로 내려지는 장면이 실록에 등장한다? 좀비? 연산군 옹호파, 다시 말해 불쏘시개 항목에 나오는 바로 그 책을 쓴 자들은 엄 숙의를 때려죽인건 야사라고 하거나 혹은 이런 차이 때문에 사실 둘은 자살했고 살해된 것은 조작이라는 설을 주장하는데 사실 살해 장면도 생생하게 실록에 나온다.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해서 명예를 박탈하는 건 조선시대에 자주 있는 일이다. 이 케이스는 사형을 내린 것도 아니고 고문치사에 가까운 일이니까 사망 후 명예박탈이 일어나는 건 모순은 아닌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영조 때의 조태구, 유봉휘 등은 경종 때 죽은 사람들인데 영조 31년이 되어서야 역적으로 몰려 추죄되었고 이광좌도 죽은지 20년 가까이 되서야 직첩이 거둬졌다. 선조 때 죽은 정개청의 사당은 숙종 때까지 허물어졌다가 세워졌다가를 반복했고 윤선도, 윤증고종 시기까지 역적으로 몰렸다가 유현 자격이 박탈되었다 말았다 등을 반복했다.

다만 이런 경우는 정치적 입장의 문제로, 이런 사례의 절대 다수는 죽은 다음에 생전의 평가가 달라지고, 평가하는 세력이 달라지기 때문에 생긴다. 일주일 정도 차이를 두고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절대로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기적 문제가 골치아파지고, 논란의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연산군의 의사가 바뀌지 않았다는 가정하에서 문제의 두 사람이 죽은 것은 3월 20일이고, 서인으로 직첩이 떨어진 것은 3월 26일이다. 고문치사가 되었건 뭐가 되었건 죽은 것은 죽은 것이고, 이 처리는 반란죄급으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그 사망한 사람이 후궁 직첩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것은 상식을 초월한 부분이다. 1주일 정도 늦어질 수도 있지 않나 싶을 수도 있지만, 왕실의 시스템을 고려하면 택도 없는 소리이다. 무엇보다 이 시기의 연산군의 행적을 보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이 시기의 연산군은 그야말로 미친듯이 날뛰었다. 이세좌나 홍귀달을 벌 주라고 하지 않은 사람들을 다 잡아오게 했고, 대관들이 이세좌와 홍귀달을 비판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치죄했다.[9] 그리고 이봉과 이항은 이미 곤장 맞고 유배를 떠난 뒤이다. 이런 상황에서 후궁의 직첩을 거두라는 이야기는 연산군이 하지 않아도 목숨이 아까운 당시 관료들이 했어야 했다. 나중에 이걸 빌미로 죽이려고 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때문이 이 사건에 의문이 존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5 무자비한 숙청

폐비 추숭을 시작으로 연산은 당시 폐비를 동의한 신하들을 모두 찾아내라는 하교를 내리고 그들을 모두 사사한다. 먼저 사약을 전달한 이세좌에게 자진명령을 내렸고[10] 폐비에 동의한 윤필상도 자진하게 했다.[11] 심지어는 이미 사망한 남효온,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어세겸, 심회, 이파 등은 부관참시에 처해지고 한치형은 부관능지당했다. 또한 폐비에게 사약을 들고간 이세좌가 광주 이씨라는 이유로 이극균 등 광주 이씨들도 상당수 쓸리고 말았다.[12] 이중에서 이극균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사이의 기간에서 영의정을 한 삼인방(나머지 둘은 한치형과 성준)중 하나로 역시 폐비론에 힘을 쓰지 못한 것과 영의정하면서 연산에게 개겼다는 이유로 개발살난다. 그런데 죽으면서 "오냐 죽으라니까 죽겠는데 내가 죽을죄 지은게 뭐가 있냐?"라는 유언을 남겨 그야말로 불에다 기름 한 드럼통 쏟아얹은 격이다...연산이 개빡친 나머지 살아남은 가족들까지 죄다 변방으로 보내버렸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대신인 성준도 폐비와 관련된 익명서를 바쳤다는 게 발각되어 목이 잘리고 집안이 박살나고 만다.

이후로도 피의 숙청은 계속되어 연산군에게 밉보였던 이들이 모두 별별 이유로 목이 달아나고 사사당했으며 이미 죽은 대신들의 재산은 전부 몰수당하고 남은 가족들도 대부분 사사당하는 피의 나날이 계속되었고 궁중에서는 계속 국문받는 이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 이세좌 등 이미 벌을 받고 자진하거나 사사된 이들도 다시 파해쳐 능지하거나 아예 뼛가루로 갈아버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6 결과

갑자사화 때는 사림보다 오히려 훈구파들이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건 말만 사화이지 실질적으로는 훈구대신들이 주축이 되어서 죽어나갔고 사림은 덤으로 묻어서 처리된 것이나 마찬가지다.[13] 이쯤되면 갑자사화가 아니라 '갑자화'다 훈구대신들이 전부 연산군에 의해 사사당하고 가문도 멸문당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14] 이렇게 유래가 없는 피바람에 신하들은 조금만 트집이 잡혀도 목숨이 달아날 것을 우려해 연산이 무슨 일을 하던 감히 거스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렇게 피의 바람을 일으킨 결과 연산군은 사림파와 훈구파들을 모두 억누르고 전무후무한 절대왕권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연산군은 자신이 가진 권력에 걸맞는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그릇이 크거나 책임감이 강한 인물이 아니었고, 결국은 그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하라는 일은 안 하고 그냥 놀아제끼기 시작하면서 조선은 막장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7 기타

갑자사화 후 폐비론에 반대한 임사홍이 중용되었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임사홍을 갑자사화의 실질적 주동자라고 여기기도 했으나 여러가지 정황을 보았을 때 갑자사화의 주동자는 연산이며 임사홍은 그다지 존재감이 없다. 여하튼 임사홍은 그렇게 공공의 적으로 낙인이 찍혀 결국 중종반정때 살해당한다.

앞의 무오사화에 비해 규모가 더 크고 출생의 비밀 등 막장 드라마의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에 연산군 시절을 다루는 드라마에서는 무오사화가 종종 짤리거나 비중이 축소되는 일이 벌어져도 갑자사화는 무조건 중요하고 비중있게 다룬다. 게다가 갑자사화 이후 연산이 본격적인 폭군이 되기 때문에 연산군 시대 사극에서 가장 중요한 엑기스를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때까지 나름대로 무난한 정치를 펼쳤던 연산군이 이후로 완전 폭군으로 돌변하여 난잡한 정치를 펼쳤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대체로 '절대권력을 손에 넣고 비뚤어졌다'는 평이 대세이나 갑작스러운 진실과 피바다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폭력적으로 변해버렸다는 일부 동정론 및 재해석도 잔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연산군의 폭정이 절대로 정당화 할수는 없으며, 그런 동정론을 펼치기엔 연산군이 너무 막나간것도 사실이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는 위의 두 후궁 사건이 약간 각색되어 등장한다. 경극을 공연하는 과정에서 공길이 모함을 받아 사약을 받고 죽는 황후, 즉 연산군의 친모인 폐비 윤씨와 매우 비슷한 역을 연기하자 감정에 북받친 연산군이 분에 못이겨 두 후궁을 직접 칼로 살해해 버린 것. 그리고 인수대비는 그 충격으로 사망하고 만다.

영화 간신은 폐비 윤씨의 모친으로부터 임사홍, 임숭재 부자가 폐비 윤씨의 피묻은 적삼을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갑자사화 크리. 영화 중반에 한가지 반전이 드러나는데 임사홍이 받은 피묻은 적삼은 사실 폐비 윤씨의 것이 아니었다. 폐비 윤씨는 자신이 죽고 난 후, 궁궐에 엄청난 피바람이 일 것을 걱정하여 자신의 모친에게 부탁해 유품들을 모두 소각케한다. 그리고 폐비 윤씨의 모친도 임사홍에게 폐비 윤씨의 뜻을 전한다. 하지만 임사홍은 자신때문에 음독 자살한 자신의 아내가 남긴 피묻은 적삼을 폐비 윤씨의 것으로 속여 연산군에게 건낸 것. 여기서 다시 반전이 드러나는데 연산군은 피묻은 적삼이 모친의 것이 아닌 임사홍의 아내가 남긴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산군은 왕권강화를 위해 그냥 넘어간 것이다.

  1. 왜 이 사화만 폭력틀이 있는지는 해당항목 참조
  2. 사실 어떻게 본다면 계유정난으로 인해 일어났던 단종의 폐위, 그리고 그의 비참한 죽음에 일조했던 자들이 사후로나마 단죄를 받은, 단종의 입장에서는 복수의 성취였던 셈이고 이 때문에 위의 취소선대로 사화의 이름을 빙자한 단죄였던 것이다. 단지 이때 연산군이 보인 잔악하고 폭력적인 반응으로 인해 사화란 의미가 강해보이지만.
  3. 이항은 이 날 잘 때렸다는 이유로 연산군에게 말을 선물받았다. 병주고 약주네? 그러나 이항과 이봉 둘 다 나중에 연산군에 의해 살해당한다.
  4. 사실 이 장면이 상당히 잔인한 패드립이라서 일부 창작물에서는 연산이 손수 때려죽이는 걸로 묘사된다. 유일한 예외는 신봉승의 조선왕조 5백년 소설판, 여기서는 사람도 아니고 이항과 이봉이 둘 다 때려죽이는 것으로 그리고 있고 현장에서 두 시체의 옷을 완전히 벗긴 후 완전히 사지를 갈라버린다.
  5. 절대 야사의 내용이 아니다. 진짜 연산군 일기에 적힌 내용이다.
  6. 이세좌를 유배보낸 당일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아니다. 이세좌가 유배를 간 것은 10년 3월 13일이고, 관련 기사는 3월 20일 이봉과 이항을 곤장 때렸다는 기사에 등장한다. 때문에 실제로 이 사건이 벌어졌다면 3월 20일일 것이다.
  7. 사실 이 내용이 좀 골치아픈데, 기사를 보면, 이봉과 이항을 잡아오게 곤장을 때려서 유배를 보내게 하고, 또 창경궁으로 끌고 오게 했다. 그리고 이봉과 이항은 삼경이 되어서야 궁밖으로 나온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을 모두 물리쳤다라고 나온다. 그리고 이후에 연산군의 관련 행동이 시간을 무시하고 이어지는데(젓을 만들어서 산야에 뿌렸다는 기사까지가 이 기사 하나에 다 나온다) 이것은 실록편찬 시기에 정리 되어서 추가되었다는 이야기이다.
  8. 나레이션에서는 실록에 '연산이 칼을 빼들고 인수대비를 밀쳤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여, 실록의 실제 기록을 왜곡하고 있다.
  9. 오죽하면 이세좌를 비판하지 않았다는 빌미로 잡아들인 관리들 중에서 알고보니 당시에 병으로 누워있었던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이 밝혀져서 풀어주는 대목이 있을 정도이다.
  10. 이세좌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은 연산군은 그가 평상시처럼 평안한 모습으로 죽었다는 말을 듣고 태도가 건방지다며 분노했다고 한다.
  11. 윤필상은 이날을 대비해 비상을 소지하고 다녔으나 정작 자진할때는 비상이 효력이 없어서 결국 목을 매어야 했다. 안습.
  12. 실제로 이세좌의 아들들이 모두 사형당한다. 이준경은 그 중 하나인 이수정의 아들. 같은 광주 이씨인 이극돈은 갑자사화가 일어나기 전 해에 사망해서 화를 피할 수 있었으나 중종반정 이후엔 오히려 사화의 주범이라며 시호를 박탈당했다.
  13. 갑자사화 후반기에 무오사화의 생존자들을 죄다 죽이라고 해서 사림의 희생이 커지긴 했다.
  14. 정말 사육신보다 더 처참했다. 농담이 아니고 8촌까지 싸그리 말살당한 집안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