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진

祿眞

1 개요

헌덕왕 시대의 문관.

아버지는 일길찬 수봉(秀奉)이다. 성씨는 알 수 없다.

2 생애

23세에 관직생활을 시작해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고 한다.

각간 충공이 병이 들어 그 핑계로 아무도 만나주지 않을 때 찾아가 다음과 같은 말로 설득해 병을 고쳐주었다고 한다.

“목수가 집을 지을 때 큰 재목으로는 들보와 기둥을 만들고 작은 재목으로는 서까래를 만들며, 눕힐 것과 세울 것이 각각 적당한 곳에 자리잡은 뒤에야 큰 집이 지어집니다. 옛날에 어진 재상이 정치를 하는 것도 또한 무엇이 이와 달랐겠습니까? 재주가 큰 자는 높은 자리에 앉히고 재주가 작은 자는 가벼운 임무를 주어, 안으로 6관(六官)과 온갖 집사(執事)들로부터 밖으로 방백(方伯), 연솔(連率), 군수, 현령에 이르기까지 조정에 비어있는 직위가 없고 직위마다 적임자가 아닌 경우가 없어, 위아래가 정해지고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가 구분되어 그렇게 한 뒤에야 왕정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사사로움을 좇아 공적인 것이 없어지고 사람을 위하여 관직을 고르므로, 아끼는 사람이면 재목감이 아니더라도 아주 높은 직을 주려 하고 미워하는 사람이면 유능하더라도 구렁텅이에 빠뜨리려 합니다. 취하고 버림에 있어서 그 마음이 혼란스럽고 옳고 그름에 있어서 그 뜻이 어지러우니, 나라 일이 혼탁해질 뿐 아니라 그 일을 담당하는 사람도 수고롭고 병이 나는 것입니다.

만약 관직을 맡아 청렴하게 하고 일에 임해 삼가고 공손하게 하며, 뇌물이 오가는 문을 막고 청탁의 폐단을 멀리하며, 승진과 강등을 오로지 그 사람의 능력에 따라 하고 관직을 주고 빼앗는 것을 애증에 의해서 하지 않는다면, 마치 저울처럼 가볍고 무거움을 왜곡할 리 없고 먹줄처럼 굽고 곧음을 속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형벌과 정치가 믿음직스럽고 국가가 화평해져서, 비록 공손홍(公孫弘)과 같이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조참(曹參)과 같이 잔치를 베풀어 벗들이나 오랜 친구들과 담소하며 즐겨도 좋을 것입니다. 어찌 꼭 구구하게 약 드시기에만 몰두하여 부질없이 시일을 소비하고 정사를 버려두실 일이겠습니까?”

이후 충공은 칩거를 그만두고 왕궁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김헌창의 난 때 큰 공을 세워 왕이 대아찬 지위를 내렸는데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성씨는 알 수 없다지만 대아찬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을 봐서 아마도 골품진골일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