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어 : Στάση του Νίκα
영어 : Nika riots
'니카 폭동'이라고도 한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재위하던 시기 동로마 제국에서 벌어진 대대적인 반란이다.
1 녹색당과 청색당
동로마 제국은 고대 로마 후기 진행된 전제군주정의 전통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전제 제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전통이 완벽하게 확립되기까지는 긴 세월이 걸렸다. 자유시민의 전통 역시 천 년을 지탱한 강력한 전통이었고, 이 힘을 온전히 억누를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전통을 대표하는 사례가 바로 동로마 제국 초기 존재했던 녹색당과 청색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당파의 기원 자체는 히포드롬(hippodrom), 즉 그리스-로마 시기의 문화 시설을 대표하는 전차경기장의 응원단에서 찾아볼 수 있다. 히포드롬에서 벌어지는 전차경주에서 각 전차는 자신의 소속을 색깔로 나타냈고, 이 색깔을 응원하는 데에서 청색당과 녹색당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두 당파는 본질적으로 응원단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없는 단체였다. 동로마 제국에서 히포드롬은 고대 로마의 포룸이나 아테네의 아고라처럼 민중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내세울 수 있는 장소였다. 이 장소를 장악한 두 당파는 현대와 비교하면 정당과도 같은 존재로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청색당과 녹색당은 기본적으로는 상호간에 대립을 이어가는 조직이었다. 청색당은 대토지를 보유한 고위 귀족층의 비호를 받았고, 녹색당의 경우 상공업자들과 궁정 관료들의 지지를 얻었다. 바꾸어 말하면, 청색당은 고대 로마 서부의 전통을 이어받은 자들의 정당이었고, 녹색당은 고대 로마 동부에서 새로 발흥한 이들의 정당이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양자는 산업 진흥책에서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이들이 갈등을 빚은 부분은 산업 분야 정책만이 아니었다. 종교, 특히 단성론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를 놓고 양자는 치열한 갈등을 벌였다. 청색당의 경우 칼케돈 공의회에서 공인받은 소위 정통 교리를 지지했고, 녹색당의 경우 오리엔트 지역에서 세가 강성했던[1] 단성론을 지지했다.
보통의 경우, 양 당 중 한 당이 정부의 비호를 받고 정부의 비호를 받지 못한 당은 반정부적인 기류를 형성하는 게 일반적이었다.[2] 하지만 두 당이 공동 전선을 펴는 경우도 있었는데, 중앙권력의 절대주의적인 지배가 나타나려 할 때 양 당은 손을 잡고 정부에 공동으로 대항하기도 했다. 양 당은 자유시민의 전통을 이어받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2 반란의 시작
532년 1월, 드디어 콘스탄티노플에서 반란이 폭발하게 된다. 당시 재위하고 있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숙부인 유스티누스 1세가 재위하던 당시까지만 해도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지지를 받던 녹색당 대신 청색당을 비호하던 인물이었고, 청색당은 그런 황제에게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제위에 오르게 된 유스티니아누스는 즉위와 함께 양 당 모두를 강력하게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양 당은 강력한 형사적 처벌 조치와 탄압을 받았고, 이는 양 당의 불만을 동시에 촉발시키기에 충분한 정도였다. 거기에 더해서 유스티니아누스의 고토 수복으로 대표되는 대사업은 필연적으로 제국의 주민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안겨주었고, 콘스탄티노플 전역에서 황제에 대한 반발심이 들끓고 있었다. 양 당은 서로 연대하여 황제의 절대권력에 대항할 것을 선포했다.
532년 1월, 양 당은 자신들의 근거지이자 정치적 의사를 전통적으로 표출해 온 히포드롬에 집결했고, 거대한 외침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자비로운 녹색당과 청색당이여, 부디 영속하라!"
3 진압
반란의 기세는 뜨거웠다.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화염에 휩싸였고, 양 당은 유스티니아누스의 폐위와 새 황제의 즉위를 선포했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조카가 새 황제로 선포되는 지경에 이르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수도를 떠나 도망칠 준비를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런 그를 가로막은 것이 황후 테오도라였다.(이 때 '황제의 옷은 가장 좋은 수의'라고 함) 테오도라의 단호한 만류에 정신을 다잡은 유스티니아누스는 반란에 대항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그런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주어진 두 칼이 있었다. 바로 제국 제일의 명장 자리를 놓고 겨룰 수 있던 장수들,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가 있었던 것이다.
우선 나르세스가 노회한 책략가다운 면모를 확실히 발휘했다. 나르세스는 반란 세력의 연대를 해체하는 게 선결과제라고 보았고, 청색당의 지도부와 접촉을 시도했다. 유스티누스 1세와 유스티니아누스의 공동통치기에 청색당에 베풀어진 은혜를 상기시킨 나르세스는 청색당의 지도부와 담판을 짓는 데 성공했고, 강력한 연대를 이루고 있던 양 당은 결국 분열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시점에 제국 최고의 용장이자 전술가라고 할 수 있을 벨리사리우스가 나섰다. 벨리사리우스는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던 병력들을 지휘하여 반란의 진원지였던 히포드롬으로 진격했다. 공격은 신속하고 기습적이었다. 허를 찔린 봉기자들은 벨리사리우스의 지휘를 감당하지 못했고, 수천여 명이 이 공격에서 학살당했다.
최종적으로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반란을 진압하면서 자유시민의 전통을 확실히 꺾고, 절대적인 황제권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이 반란의 와중에 불타오른 하기아 소피아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손에 의해 재건되었고, 그는 완공된 성당을 보고 "솔로몬이여, 짐은 그대를 능가했도다!"라 했다고 전해진다. 절대적인 황제로 자리매김한 유스티니아누스에게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