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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教
Religion
목차
1 개요
신성하거나 거룩하거나 영적(靈的)이며 신적(神的)인 것과 인간의 관계.[1] 종교가 반드시 무언가를 믿거나 집단을 이뤄야만 하는 건 아니다. 동양의 종교(宗教)라는 용어는 불교에서 왔으며 '으뜸되는 가르침'으로 해석된다. 반면, 서양 문명의 'religion'은 라틴어의 'religare' 혹은 'relegere' 에서 나온 말로 '다시 묶다' 혹은 '다시 읽다(생각하다)'를 뜻한다. 종교라는 명칭이 현재의 모든 종교 개념을 가리키게 된 것은 일본이 religion의 번역어로 '종교'라는 단어를 채택하면서부터다.
고전 종교의 경우 도그마의 설정, 즉 중심이 되고 기본이 되는 명제를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가르침이 존재하고 이에 대한 강한 믿음이 따르며 신도들간의 유기적인 집단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현재에 와서는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는' 믿음과 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유기적인 집합체를 종교, 종교집단으로 보고 있다.
비록 일부 철학자들은 여전히 종교를 정의할 때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빼먹지 않지만 이제 많은 학자들은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종교의 정의에서 제외하고 있는데, 많은 신흥 종교가 초자연적인 존재를 배제하고 있기 때문. 하지만 이렇게 할 경우 종교의 정의가 너무 막연해진다는 지적도 있다.
또한 중국에서 발생한 도 계열의 사상(유교, 도교 등)은 종교가 아니라 주장하는 경우도 많다. 다만 동양은 서양과 달리 모든 학문에 세세한 구분이 없었다는 걸 감안하고 보면 유교에서도 충분히 종교적 색채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종교로 구분한다. 대한민국에서도 종교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은데, 배울 때는 문화일 뿐 종교는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宗教"는 불교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높이기 위해 만든 말이고[2] 유교, 도교도 이것을 받아들여서 자신들을 종교로 칭했다. 이렇다 보니 "불교/유교/도교는 宗教가 아니다." 하면 어원을 따져보면 매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된다. 宗教의 원조들을 놓고 宗教가 아니라고 하는 꼴이다. Religion을 宗教로 번역하다 보니 생긴 아이러니한 상황인 것이다.[3] 그리고 사실 서양식의 종교 개념은 동양에서는 도(道)라고 불렀다. 삼국지 시대의 오두미도, 동학 농민운동 당시 전봉준을 현상수배하면서 내건 명분인 혹세무민의 도 같은 것이 해당된다.
항상 종교는 정치와 더불어서 논란이 되지만 문학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서양의 유명 문학 중에 기독교나 성경과 조금도 연관이 없는 것은 찾기 힘들 정도며 특히 판타지 소설에서는 불가피하게 들어가는 요소 중 하나로, 세계적이었던 양대 판타지 소설가로 꼽히는 톨킨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반면 C.S.루이스는 독실한 성공회 신자며 그의 대표작 나니아 연대기는 기독교적인 색채가 강한 소설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문학뿐만 아니라 기타 건축물, 조각, 미술, 음악 등 다양한 방면에서 종교가 끼친 영향을 보면 '문화' 자체와 연관이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2 종교의 기원
종교의 기원은 명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종교라는 분류 자체가 칼로 자르듯 나눌 수 있는 명확한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선사 시대부터 매장의식 등의 흔적이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굉장히 오래 전부터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볼 뿐이다.[4] 물론 초기의 이러한 흔적들이 현대적 의미의 종교와는 거리가 멀긴 하지만, 종교가 어떠한 경로를 통해 만들어지고 발전되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신앙이나 믿음은 인류가 모르는 것을 설명하고 도덕규범을 정하기 위해 존재해 왔다. 자연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경험을 문자의 형태로 보관할 수 없었던 시절엔 번개나 화산 폭발 같은 자연 활동은 인간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범주에 있었다. 또한 짐승들의 습격이나 외적의 침략도 한정된 정보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으며, 이는 불확실한 미래로 인한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화물 신앙에서 보이듯 신기하고 새로운 문명을 만나게 되면 그것이 신앙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류는 최초의 종교 형태라 여겨지는 토테미즘, 샤머니즘, 애니미즘 등의 형태로 자연 현상을 이해하고, 여기에 구전으로 내려오는 유용한 경험 등을 접목시키고 도덕 규범을 만들어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지식을 전승시키는 방법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종교의 본격적인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히 밝혀진 게 없으며, 사람만 종교를 가진 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대체로 오늘날의 추세는 크게 3가지로 나뉜다. 1) 종교를 가진 집단이 없는 집단보다 유리해서, 2)집단의 생존에 유리한 특성이 종교를 만들게 해서, 3)바이러스가 퍼지듯이 그 개념이 부모-자식으로 연결돼서. 물론 3가지 중 어느 것도 아직 결정적이지는 못하다.
한편 동물들도 무리지어 생활하는 종들은 유행가 같은 그들만의 문화가 있는 경우가 있고, 일례로 벌허스 프레더릭 스키너의 비둘기 실험에서 원시적인 형태의 미신이라고 생각 할 수 있을만한 일이 발견된 적도 있다. 다만 기억할 것은, 그런 상관관계의 착각이 원시적인 미신과 동일한 메커니즘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복잡한 종교로 발전되는 과정은 아직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내용이며 미지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대략적인 실험내용은 이곳에서 확인가능하다. 영문으로 된 원문
동물들의 지능을 감안하면 그들에게 종교라 할 정도로 복잡한 가치체계는 없는 것이 당연하다. 다만 침팬지나 보노보, 돌고래 같은 동물들은 인간에게 매우 근접한 수준의 인지적 처리와 사회성을 보이면서도 종교나 신앙과 관계 있어보이는 관찰 결과들은 나오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침팬지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공상(?)에 잠겨있더라는 보고는 많이 있지만, 그게 정말로 초월적 실재나 사후세계에 대한 상상일 것이라고 장담하긴 어렵지 않겠는가(…).
3 전세계 종교 분포도
세계 4대 주요 종교 | |||
60px | 60px | 60px | 60px |
기독교 | 불교 | 이슬람 | 힌두교 |
면적은 분홍색이 훨씬 많지만 인구는 노란색이 간발의 차이로 많다. 아시아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이 동네의 인구 밀도가 워낙 쩔어주기 때문에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의 인구를 모두 합치면 전세계의 절반을 넘는다.
아브라함교 계열 / 구도 계열의 분포도. 분홍색에 가까울수록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5]를, 노란색에 가까울수록 불교나 힌두교 등의 인도/다르마 계통의 종교를 나타낸다... 노란색 계열이 적은거 같지만 중국 인도만 합쳐도 인구수가(…) 그리고 북한은 주체교를 주민들이 반강제적으로 믿는다. [6] 그런데 정보가 없는 나라의 대부분은 분홍색으로 칠해진 국가의 자치령이거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들이라서 실제로는 분홍색 계열들이다.
그리고 북한의 주체사상은 중국의 마오이즘과 더불어 종교로 분류되므로 사실상 종교가 없는 나라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에 반해 대한민국은 유교, 도교, 불교 등 동양에서 유래된 종교를 근간으로 하지만, 지금은 불교와 기독교(천주교+개신교)를 비슷한 비율로 믿고있다. 심지어 인구 전체의 절반은 무신론 같은 비종교주의자를 자처한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은 상당한 세속주의적 국가로 보는 견해가 많다. 같은 민족도 휴전선 이남은 종교의 멜팅 팟이고 이북은 극단적으로 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집단이라니 이것도 또한 아이러니. 극과 극은 통한다 또 재미있는 사실은 둘로 뚝 잘랐을 때 미주지역은 모든 지역이 예수 계열의 유일신교라는 점이다. 반면 한반도와 중동을 제외한 인도 및 동아시아, 동남아의 많은 지역은 노란색으로 도배되어 있다.
통계적으로 세계 인구의 84%가 종교를 믿고 있다. 북, 동유럽, 미국의 동서부 같은 극히 일부의 지역을 제외하면[7][8] 의외로 아직도 지구는 '종교인의 행성'인 셈이다. 세계를 양분했던 냉전시대의 공산권의 공식적인 정책이 반종교 내지는 무종교주의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엄청나게 높은 수치다.[9] 하지만 공산주의 국가에는 종교는 인정하지 않으나 종교나 다름없는 강력한 공산주의 사상의 교조주의가 있었으며 그런 점에서 상당히 종교와 비슷한 면이 강했다. 중국의 경우 당국의 종교규제에도 불구하고 종교인(특히 기독교인)의 숫자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중이며,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중동, 남아시아, 아프리카 같은 곳은 현재도 워낙 종교가 위세가 강하다보니 위와 같은 수치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또한 종교인이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이러한 추세를 타고 갈수록 늘어날 것이라 전망된다. 사실은 원래 소수파인 무신론자 쪽에서 목소리를 높이려고 애쓰는 경우가 많다보니 무신론자가 많아보이는 착시현상이 보이는 것. 소속된 사회의 분위기에 따라 일코를 하는 무종교인/무신론자들도 있다.[10] 많은 사회에서 무종교인/무신론자들은 안 좋게 보는 경향이 존재하기 때문에 대충 해당 사회에서 가장 융성한 종교를 믿지만 상세는 잘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굳이 연구조사에서까지 일반인 코스프레를 할 필요는 없겠으나, 사회를 살면서 한국같은 지역과 달리 한 종교가 사회문화에 독점적인 이데올로기를 차지하는 문화권이나 국가에서는 제법 이런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
4 사회속의 종교
그동안 학계의 인식은 인구와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게 되고, 농경시대로 변환되면서 종교가 생겼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터키에서 12,000년전의 종교시설물이 발견되면서 가설이 깨지게 되었다. 수렵시대에 생존에 직결되는 것도 아니고, 수많은 돈과 인력이 필요한 것임에도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만큼 종교라는 것이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데, 큰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종교의 영향력은 다른 건축물로도 알 수가 있는데, 고대의 스톤헨지부터 모아이, 피라미드, 성 베드로 대성당, 불국사등등 종교 건물들은 항상 당대의 최고의 기술력이 총집합된 결과물이였다. 실제로 먼옛날 인류의 기원인 진화단계에서부터 종교의 영향으로 하나가 된 호모 사피엔스가 기타 유사 인류들을 물리치고 생존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가설도 존재한다.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종교는 사회체제의 보호장치로서, 혹은 사회체제의 강제장치로서 어느정도의 권능과 사회적인 책임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문자의 발명으로 지식이 쌓이게 되자 종교는 한층 체계을 잡아나가면서 사회적으로 커다란 권위를 가지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대 그리스를 중심으로 과학지식이 발달했지만, 여전히 자연현상을 설명할만한 충분한 기반 지식이 부족하고, 이를 연구할만한 인재를 기를 교육적 기반이 부족하여 과학에 대한 개념이 본격적으로 성립하는 근대까지는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으로서 종교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인류 역사와 함께 해온 종교는 인류 문명이 발달할수록 문화 및 행동 양식에 끼치는 영향이 점점 커졌는데, 집단 내에서 종교는 사회적인 불만을 해소하고 체제를 안정시키며 도덕, 양심, 박애, 사랑 같은 장치를 통해 사회적인 약자를 보호하는 복지 기능을 겸하기도 했다. 고대 로마인들은 빈민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빈민구제가 빈민을 더욱 타락시킨다고 보았다. 로마인들은 부양해야 할 사람들을 특별히 자신들이 베푼 서비스를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사람들만을 돌보았다. 정부에 의해 실시된 무료급식은 고도의 정치성을 띤 것이었고, 개인적으로 실시한 구제도 과시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다. 하지만 로마에 기독교가 들어서며 국가가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장기간 복지 정책을 행하기 시작했고, 로마가 멸망한 이후에도 천년 가까이 종교활동은 봉사에 상당히 기여하며, 20세기에 와서야 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 등의 형태로 다시 국가가 복지 정책을 행하는 주체로 돌아오게 되었다. 비록, 봉사 자체는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교세 확장에는 효과가 별로 없기는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 종교의 이미지를 좋게 포장할 수 있으므로 도움을 받는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고 반대로 보람이나 자기 만족등이 이유인 경우도 많다. 이는 일본의 종교 선교, 봉사의 예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한편, 사회 체제의 일부로서 자리 잡게 된 종교는 여타 사회제도가 그렇듯 선기능만이 아니라 악기능도 많이 가지고 있다.[11] 종교간의 분쟁은 유럽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했을 정도이며, 현대에 와서도 1990년 냉전이 끝난 이후부터 본격적인 분쟁의 원인으로 부각되고 있다. 특히 2001년에 터진 9.11 테러는 종교분쟁이 본격적으로 부각된 특이점으로서 매우 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종교가 민중의 편에서 지배계급의 탄압에 맞서 싸울때도 있었으나, 어느정도 자리를 잡게 되는 순간부터는 종교가 지배자의 편을 들어 그들의 지배를 정당화시키는 도구가 되기도 했고, 혹은 직접 지배권을 행사할 때도 있었기에 과거보다는 종교 자체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
실제로 선진국일수록 종교에 대한 열망이 줄어들고 후진국일수록 종교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영향이 강하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당연하다면 당연한게 비교적 오랜기간동안 민주주의를 경험하였고 먹고사는데 큰 걱정이 없으며 교육수준이 높으니 종교의 가르침에 의존할 필요도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종교를 사용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단, 이것이 선진국이라고 해서 무조건 비종교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래된 기성종교들은 수직적인 명령구조로 인해 종교가 현대사회에 맞춰 변하는 것을 방해받는 사이, 신흥종교는 이 틈을 타 현대 문명에 더 밀접한 신앙과 규범을 내세우며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고, 그 중엔 사이비종교도 급속히 퍼져서 사회 불안의 요인이 되고 있다. 또한 종교가 비록 자연에 대한 설명은 과학에게 그 권위를 넘겨주었지만 윤리적인 영역에 있어서는 아직도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현대 도덕 역시도 거슬러 올라가면 종교의 영향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에[12] 선진국이라고 무조건 비종교적인 것은 아니다. 사실 국가단위가 아니라 개인단위로 하더라도, 무신론자 마저도 부모님의 산소는 정성스럽게 돌보는 등 어느정도는 종교적인 행동이 관찰된다.
종교학자 찰스 킴볼(Charles Kimball)은 종교의 타락을 경고하는 다섯 가지 징후로 1)절대적인 진리 주장, 2)맹목적인 복종, 3)이상적인 시대 확립, 4)목적을 위한 수단의 정당화, 5)성전(聖戰) 선포를 각각 꼽았다.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 알 카에다 등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들과 주체사상이 여기에 딱 들어 맞는다. 이해하기 힘들면 그냥 사이비 종교를 떠올려보면 된다.
5 개인과 종교
5.1 개인의 행복과 종교
실제로 종교성은 행복 문제를 다루는 분야인 긍정심리학에서 매우 강조하고 있는 개념이다. 심지어 어떤 연구자[13]들은 "성공적 노화의 필연적인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종교성이다" 라고까지 주장하기도. 물론 이런 흐름에 있어서 비판이 없는 건 절대 아니지만, 웹상의 일부 반종교주의자들이 이런 트렌드에 당혹스러워하듯이 "어딜 감히 종교 따위가 인간의 행복을 논해?!"(…) 같은 유치한 공격은 하지 않는다. (특히 노인들의 경우에)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은 논문 한두 편 끄적인다고 쉽사리 반박될 수 있는 주장이 "이미" 아니다.[14][15] 가장 주된 비판은 역시 용어의 정의 문제. 종교성(religiosity)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협소한 개념이고, 그보다는 영성(spirituality)이나 초월성(transcendence) 같은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16]
그리고 외현적 종교성에 한정되기는 하지만, 종교는 또한 그 신자들을 사회적으로 결속시키고 자조집단을 형성하게 함으로써 소속감을 느끼게 한다. 이를 통해 신자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집단에 근거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 혹은 강화하고, 자신이 외톨이가 아니라 어딘가에 소속되어 서로 돕고 도움받는 관계임을 실감할 수 있다. 개인의 행복이나 인격의 도야, 수양 등도 중요한 순기능이지만, 사회의 일부로서 소속되어 관계성(relatedness)을 유지하며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자 하는, 가장 기본적인 측면의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점도 분명 간과하기 어렵다. 특히나 이는 사회적 연결망이 붕괴하기 시작하는 중장년~노년기 개인들에게 매우 반가운 소식이다.
어쨌든 행복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존재 이유 찾기, 가까운 관계에서 그 존재 이유를 나누기라는 두가지 활동을 지금까지 가장 잘 해소시킨 것 중 하나가 종교이기에 종교와 행복이 밀접한 상관관계를 보인 것이라고 연구진들은 말하고 있다. 종교가 비록 과거보다는 약화되었어도 여전히 가장 강력한 세력 중 하나인 이유는 이러한 데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들에게 행복감을 준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이지는 않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종교가 행복감을 주는데에 있어서 강력한 성능을 발휘한다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 종교가 앞으로도 무조건 쇠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유럽사회에서는 그러한 종교의 이점에도 불구하고 쇠락하거나 세속화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17]
5.2 개인의 친사회성과 종교
대부분의 종교는 공통적으로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하게 살면서 다른 사람을 위하라고 가르친다. 물론 교리부터가 개판 5분 전인 종교도 역사상에 존재하지만 그런 종교들은 대개 공동체에 해가 된다는 이유로 사회의 배척을 받았다.
그렇다면 종교는 과연 인류의 모든 갈등과 분쟁의 궁극적 원인일까? 유사 이래 종교는 넓게는 세계구급 전쟁부터 시작해서 좁게는 키배를 유발하는 떡밥 자리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다. 때문에 종교가 갈등의 선동자로 여겨지는 경우도 많지만 인류학자 스캇 에트란의 연구에 따르면# 3,500년 동안의 주요한 충돌 중 60%가 종교적인 동기 없이 이루어졌으며, 종교적인 동기에 의해 야기된 전쟁은 7%에 불과한 소수라고 한다. 그럼 나머지 33%는 뭐지
종교적인 것과 이타적이거나 많이 베푸는 행동 사이의 관계(Religiousness and Generosity)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적어도 종교성의 가장 흔히 거론되는 사회적 한계는 그것이 이타성과 역의 상관을 보인다는 점이다. 즉, 더 종교적일수록 더 이기적이고 잘 베풀지 않는다.[18] 많은 연구들이 독재자 게임(dictator game)과 같은 다양한 가상적 상황에서 종교인들이 비종교인들보다 더 이기적인 선택을 보임을 발견했다. 게다가 이들은 실제 사회적 상황에서의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자기 자신이 굉장히 이타적이며 활수한 사람이라면서 스스로의 친사회성을 과대평가하는 경향[19]을 보인다고 한다.(…) 이기적이고 쩨쩨하게 굴라는 교리를 가진 종교는 분명 세상에 없을 텐데 어째서 이런 아이러니가 벌어지는지는 의문이다
종교성과 도덕성 간의 연구도 많이 이루어졌는데 종교를 가진 사람이나 안 가진사람이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이에 덧붙여 종교인들은 유의하게 더 불의(injustice)에 대한 민감성이 높고, 타인의 잘못에 대해 관용보다는 엄정한 처벌을 원하며, 때때로 이것은 엄벌주의로 연결되곤 한다는 연구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지각된 정의(perceived justice)의 측면에 대해서는 무조건 나쁘다기보다는 상황과 맥락에 따라 얼마든지 적응적이고 친사회적인 측면도 있으니만큼, 이를 근거로 "그러니까 종교는 좋다/나쁘다" 같은 식의 초보적인 이분법적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비록 현대 법학의 흐름이 회복적 정의에 초점을 두고 있긴 하지만, 개인이 종교가 있든 없든 우리 사회에서 응보적 정의(retributive justice)[20]의 가치는 분명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론도 있다. 한 예로 시러큐스 대학의 아서 브룩스 교수가 2006년에 발간한 《누가 진정으로 사회를 보살피는가》(Who Really Cares)에 따르면, 미국에서 종교를 믿는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보다 30%나 더 많은 돈을 기부하고, 수혈과 자원봉사 참여율도 더 높다. 일반적으로 신자들은 모든 유형의 기부에 비신자들보다 10% 더 후하게 기부금을 내고, 57%나 더 많이 노숙자를 돕는다. 양친이 다 있고 종교를 믿는 가정에서 양육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자선 활동을 더 많이 한다. 이와 관련하여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화이트는 종교인의 선행의 대상은 대개 자기 종교의 구성원에게 향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하긴 하지만, 자기 종교의 구성원에게 향한다고 해서 선행이 아닌건 아니니 본질이 변하는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대표적인 진화심리학자이자 종교 연구자인 아라 노렌자얀(A.Norenzayan)[21]은 종교의 친사회적 가치를 역설했는데, 한 논문에서[22] 그는 십자가 등의 신적인 심상으로 점화(priming)된 개인은 자원배분 게임에서 유의미하게 후하게 베풀어주는 모습을 보였다고 보고했다. 이유인즉슨, "은연중에 신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만들어서" 더욱 친사회적으로 나누어주고 베푸는 행동으로 유도하기 때문이라고.[23] 그 외에도 다른 진화심리학 논문에서도[24] 종교의 친사회성을 강조했는데, 여기서의 설명은 "초자연적 실재의 처벌에 대한 공포가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 이익만을 무절제하게 추구하지 못하도록 붙잡아 줄 수 있다" 는 것이다. 물론 도덕적인 사람만이 천국에 간다거나 하는 식의 교리는 실제 그리스도교 교리와는 사뭇 다르지만, 종교가 사회의 지배 패러다임으로 정착하는 과정에서 그런 식의 메타포가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아무튼 이 주제 역시 흔한 학계의 키배처럼 양쪽 모두가 확신을 갖고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논쟁적인 떡밥이라고 봐야 할 듯.
여하간 이런 류의 연구에서는 내집단/외집단 변인[25]이나 사회경제적 지위(SES) 및 참가자 교육년수 변인[26]의 통제 문제, 내적 종교성과 외적 종교성 여부[27]가 굉장히 중요하다. 그리고 연구자(들)의 종교적 배경이 무엇인지도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된 더 자세한 내용은 도덕과 종교의 관계 문서도 같이 볼 것.
5.3 개인의 통제감과 종교: 공정하고 질서 잡힌 세상?
동기(motive)를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에게 통제감이라는 주제는 20세기 중엽부터 종종 종교성과 함께 엮여서 논의되어 왔다. 초창기의 통제감에 대한 연구는 통제의 소재(LOC; Locus of Control)라는 개념에서부터 시작했는데, 자기 자신에게 통제의 능력이 있다고 믿는 내적 통제소재(I-LOC), 자기 외부의 다른 무언가에게 통제의 능력이 있다고 믿는 외적 통제소재(E-LOC)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외적 통제소재가 문제가 되었는데, 초기 심리학자들은 이런 사람들은 매사에 무기력하고 숙명론적(fatalistic)이며 운과 우연 및 기회에 의존하는, 한 마디로 의지박약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쉽게 말해 이 통제소재 이야기는 굉장히 가치 개입적인 것이었다.[28] 여기서 문제는, 종교는 외적 통제소재의 일부이고, 따라서 종교인들은 전부 나약하고 한심한 의지박약자라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
통제소재 이론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공격받았는데, 비서구권의 문화나 아프리카계 및 아시아계들이 주로 높은 외적 통제소재를 보이기 때문에 자칫 자문화 중심주의나 인종차별에 악용될 수 있음이 인식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프레드 로스바움(F.Rothbaum) 등의 연구자들에 의해 제시된 1차-2차 통제 이론이 통제소재 이론을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롭게 제기된 이 이론은 멜빈 러너(M.J.Lerner)의 공정한 세상 가설(Just World Hypothesis)에 기초하고 있는데, "세상은 공정하고 균형잡혀 있다(The world is fair and balanced)" 는 언명으로 요약될 수 있는 세계관의 하나이다. 해당 문서 참고. 아무튼 새 이론에 따르면 종교는 2차 통제인 대리 통제[29]의 일부로서, 전지전능한 신을 상정함으로써 개인이 공정하고 공평한 세상을 인식하도록 돕는 적응적 기능을 담당한다. 또한 어째서 종교인들이 악의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든 세상이 결과론적으로는 공정하다고 강변하려 하는지도 설명할 수 있다.[30]
이후 동기심리학의 태산북두 아론 케이(A.Kay)는 보상적 통제 이론(CCT; Compensatory Control Theory)을 제안하면서, 내적이든 외적이든, 1차든 2차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모든 종류의 통제감은 결과적으로는 "질서 잡히고 예측 가능한 세상" 즉 지각된 질서(perceived order)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근원적인 동기에 봉사하며, 어느 하나가 사용불능이 되면 다른 하나로 재빨리 옮겨갈 수 있다고 보았다. 쉽게 말해서 "내가 통제하고 있다" 는 그 자체로 본질이 아니고, "상황이 잘 통제되고 있다" 의 한 하위 분류일 뿐이라는 것. 이러한 심리를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세상은 이 이유 때문에 질서 잡히고 잘 통제되어 있다. 뭐, 아니라고? ...그렇다면 저 이유 때문에!"[31] 로 요약할 수 있겠다.(…)
케이는 이에 따라 인간의 종교성에 대해 특이하면서도 흥미로운 발견들을 다수 보고하였다. 우선, 사람은 불안할수록 신을 찾게 된다.[32] 당연하잖아? 실험 상황에서 참가자에게 내적 통제감을 낮추었을 때, 불안해하는 참가자들에게서 종교성이 높아졌던 것. 이 때문에 미국 중부, 남부, 남동부가 "바이블 벨트" 라고 불리며 극성 종교인들로 들끓는 것은 특유의 대가족 문화에 더하여 토네이도, 허리케인 등 천재지변이 많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33] 당장 직관적으로 세속적이고 신무신론적인 사회들을 떠올려 보아도, 그 국가들이 자연재해에 취약하거나 경제위기에 잘 흔들리지 않는 사회구조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34]
다음으로, 신에 대한 개인의 신앙심은 정부(?!!)에 대한 신앙심으로 자유롭게 대체될 수 있다. 실제로 중요한 선거 이전에나 레임덕으로 정부가 고생하고 있을 때에는 사회 전반의 신앙심이 증가하며, 반대로 신임 정부수반이 당선되거나 강력한 공권력을 발휘할 때에는 신앙심이 역으로 감소한다는 보고가 있다.[35] 따라서 정부가 부패가 심각하거나 합법적이지 못한 내각이 구성되어 있거나, 혹은 여러 이유로 정치적 안정성이 낮다고 느껴질 때 개인은 그만큼 신에게 "질서 있는 예측 가능한 세상" 을 요청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반대로 캐나다에서 이루어진 한 실험에서는, 참가자들 절반에게는 "현대과학이 발견한 각종 물리학적 법칙과 이론들에 따르면, 모든 자연현상은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신은 필요하지 않다" 를 보여주고, 나머지 절반에게는 "비록 현대과학이 발견한 지식과 이해가 신의 존재를 확증하지는 않으나, 그것들은 신의 통치와 능력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를 보여주자, 전자의 집단이 후자의 집단보다 자국 정부의 역량을 더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36] 요약하자면, 정치가 불안하면 신을 찾게 되고, 신의 존재에 회의감이 들면 정치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된다는 것.
연구자들은 더 나아가서 종교뿐만 아니라 각종 음모론이나 망상, 착각적 상관, 징크스 등등이 개인적 통제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더 잘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37] 일부 다국적 기업들이 모든 환경 문제와 세계적인 경제 위기의 만악의 근원이라고 여기는 것, 일부 군산복합체가 전세계의 분쟁과 전쟁을 사주하고 있다고 믿는 것, 일부 유대계 자본과 소수의 가문이 전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한다고 믿는 것 등이 전부 세계에 대한 통제감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38] 심지어 이들은 TV의 백색 노이즈 화면에서조차 "뭔가 패턴이 보인다, 이미지가 보인다" 고 보고하기도 한다! 제가 식빵을 구웠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셨어요. 할렐루야!
6 종교의 미래와 주요 종교의 앞날
현대 사회에도 종교가 사라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종교는 여전히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일단 종교는 논리적으로 검증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사람은 확실하게 이성적으로 증명된 것만 믿는 존재가 아니다. [39]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 일부 나이브한 영미권 고학력자들의 편견 및 고정관념이며, 이런 비이성적인 '마술적 사고' 는 사실 비 종교인에게서 조차 나타난다고 한다. 연구자 매슈 허트슨에 의하면 사람은 이런 마법적, 마술적, 혹은 종교적인 사고를 갖고 있으며, 이것 없이 이성만 강조하다보면 건강한 정신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고 한다. [40]
- 그리고 그렇게 종교가 사람의 본능적인 욕구를 채워주기 때문에, 상기한 것처럼 일반적으로 종교를 가진 이가 그렇지 않은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티모시 윌슨과 쉬나 아이엔가는 복지, (특정 수준 이상의) 자본, 성생활 등 그 어떤 조건보다 종교를 믿느냐 안 믿느냐가 행복에 더 큰 영향을 끼치며, 종교가 없는 것이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쉬울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종교가 삶에 이유와 관계를 주기 때문이다. 연구결과들을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사람은 이성 만으로 사는 것이 아닌, 관계, 감성, 삶의 이유 같은 것이 근본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욕구들을 가장 잘 채운 것 중 하나가 종교였다. 유럽같은 안정적인 복지를 건설한 나라들은 종교가 쇠락하거나 세속화되었으나 경제 공황이 찾아오자 교회가 다시 늘어나는 경우도 있었다.[41][42]
종교의 미래에 대해선 가타부타 설이 많지만 대부분 미래에도 어떤 형태로든 존속할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다만 북유럽쪽의 사례를 보건대 오늘날의 종교라기보다는 하나의 문화양식으로 남을 가능성도 있다.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북유럽의 전철을 밟을 리는 없으므로 하나의 가능성으로 볼 수 있다. 마치 한국에서 제사를 지내지만 거기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진 않는 것처럼. 종교가 탄생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인 미래에 대한 불안은 라플라스의 악마가 공상속의 존재임이 확실해져 해소할 길이 없는 만큼, 이 불안을 달래 줄 종교는 앞으로도 인류의 역사와 함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선진국 중심의 이론적으로는 이렇긴 하지만 실상 현재와 근미래에는 세계 평균적으로 종교인의 인구와 종교의 영향력이 계속해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는데, 주된 원인은 다음과 같다.
- 우선 비종교인이 많은 지역/국가의 사람들이 아이를 많이 낳지 않는다. 전 세계의 비종교인의 대다수(95%)가 몰려 있는 서구권(16.3%)과 동아시아(78.7%)가 대표적인 예다. 이들 지역은 세계적인 저출산 고령화 지역이며, 매우 종교적인 개발도상국 지역의 이민자들이 그들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상황이다. 기존 서구권 현지인들과 동아시아인들은 비종교적이며 아이를 많이 낳지 않으나, 종교적인 이민자 이슬람 가정은 아이를 매우 많이 낳고 있다. 지금의 추세대로라면 서구권 국가에서는 종교적인 이민자들이 비율을 점점 늘리다 굉장한 숫자를 차지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 반면 매우 종교성이 높은 개발도상국 사람들의 출산율은 익히 알고 있듯이 매우 높은 편이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나 이슬람 국가들이나 남아시아 지역의 출산율도 꾸준히 높은 지역이다. 이들 지역에서는 종교인들이 매우 많으며, 종교의 힘이 현대화된 선진국 지역보다 훨씬 막강하다. 또한 이들 지역에서도 종교인이 비종교인들보다 훨씬 많은 자녀를 낳고 있다. 또 선진국에서 나타나는 경제적 성장과 사회 변화에 따른 탈종교화, 비종교인 증가도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이런 현상을 찾을 수 없으며, 종교성이 매우 높은 아프리카, 인도나 남아시아에선 급속한 경제사회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민 대부분의 종교성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세계의 모든 종교를 선진국의 경우로만 판단하면 안된다는 것.
- 종교의 영향과 종교인의 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종교 생활의 패턴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선진국들의 예에서 볼 수 있다. 미국, 캐나다, 영국 등의 인간 계발 지수가 높은 나라들에서는 전통적 종교 기관에 속해 있는 수는 줄어들지만, 자신을 영성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은 (Spiritual But Not Religious) 사람으로 정의하는 인구가 늘고 있는 추세이다. 그리하여 일각에서는 종교의 미래가 도그마와 교리에 따른 중앙집권적 체제에서 영성에 따른 개인 중심주의로 옮겨갈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다만 이러한 예측은 서구 선진국 종교권 한정이다. 제3세계 및 개발도상국 대다수 지역에서는 여전히 개인 영성보다 기성 제도권 종교의 힘이 압도적으로 막대하며, 이러한 추세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근미래에 세계 인구에서 종교의 영향력과 종교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현재보다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미국[43]과 서유럽 등의 선진국에서는 비종교인과 무신론자들이 증가하는 추세 역시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나 무종교인의 비율은 2010년 16%에서 2050년 13%로 줄어들 전망이다. 절대적인 숫자는 11억에서 12억으로 조금 늘어나지만,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큰 폭으로 줄어든다.
또한 미래에는 세계의 주요 종교 지형도 크게 바뀔 것으로 예측된다. 먼저 서구 선진국에서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힘이 약해지고 무종교, 이슬람 및 타종교의 세력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서구 등에서 세력을 잃은 기독교는 대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중남미, 중국 및 남아시아와 동남아 일부 지역에서 강세를 보이거나 꾸준히 성장할 것이며, 이러한 개발도상국에서의 교세 성장에 힘입어 선진국의 신자수 이탈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는 계속해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44] 이 때문에 미래에도 세계 기독교의 인구비율(32~34%)과 성장율은 세계의 인구 성장율에 약간 웃돌거나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될 것으로 예측된다.
반면 이슬람은 아랍, 북아프리카, 남아시아의 인구폭발에 힘입어 세계 인구성장율보다도 빠르게 증가하여, 21세기 중후반에는 기독교와 세계 1,2위를 다투는 거대종교가 될 것이며, 특히 유럽에서의 인구도 늘 것으로 전망된다. 21세기 말에는 기독교를 소폭 추월해 세계 1위의 종교가 될 전망이다. 단, 이슬람교 항목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이슬람교의 출산율 자체도 매우 서서히 감소하는 추세이기 때문에 21세기 끝 무렵에는 기독교와 세계 인구비율이 비등비등(35%)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21세기 말에는 세계 인구의 70퍼센트 가까이가 아브라함 계통의 유일신교(그중 절대 다수가 기독교와 이슬람)를 믿게 될 것으로 보인다.
힌두교 역시 남아시아 지역의 계속되는 인구성장에 힘입어 여전히 인도 아대륙 한정으로 21세기에도 지속적으로 우위를 점할 것으로 예측된다. 단, 인도 내에서는 힌두교가 여전히 지배적인 위치에 있긴 하나, 무슬림 및 타종교인구 성장에 장기적으로는 살짝 밀릴 것으로 보인다. 세계적인 평균 증가 비율은 기독교와 엇비슷한 수준이다. 불교의 경우는 전통적 지역인 동아시아와 태국, 미얀마 등의 장기적인 저출산 여파 + 기독교처럼 세계적인 선교 및 타지역의 교세확장으로 전환하기 힘든 점[45] 때문에 정체 내지는 소폭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유대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유대인 인구비율은 소폭 줄어들고, 내부적으로도 이스라엘에서는 하레디 같은 정통파-극정통파 근본주의 성향 유대교인들이 늘어나고, 세계적으로는 세속적인 유대교인들이 갈수록 줄어들 것으로 예측된다. 거기다 유대인들의 제 2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도 무슬림 인구에게 추월당해 제 2의 종교 타이틀을 잃어버릴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토착 신앙과 전통 종교는 메이저한 종교들에 밀려 지속적으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세계 종교의 미래에 대한 허핑턴포스트 분석과 미국 퓨 리서치 센터의 조사결과(영어)도 같이 참조하자.
7 종교 목록
- /목록 참조.
8 관련 문서
-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정의
- ↑ 으뜸 종에 가르칠 교. "종갓집"이란 말이 저 종 자를 쓴다.
- ↑ 원래 종교로 부르던 것들 외에 다른 것을 추가하더니 원래 있던 것을 빼버리는 격
- ↑ 실제로 70만년전에 지구에 있었던 네안데르탈인들에게서도 이따금 매장의식이 나타나곤 했다. #
-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이 아브라함을 근간으로 하는 대표적 유일신교다.
- ↑ 북한의 선전내용에서 주요단어를 성경이나 쿠란, 기타 경전과 치환해보거나 북한 주민의 현실을 대입해보면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알수있다.
- ↑ 그나마도 미국은 기독교가 아직도 절대 다수. 무교는 전체 인구의 10% 미만이다.
- ↑ 영국도 20%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영국인의 다수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자 동시에 무신론자/불가지론자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이들에게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여진 듯. 적극적인 신자는 33%~절반 정도로 그래도 보통 수준은 된다.
- ↑ 공산권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국가 주도로 종교를 차별하고 세속화 정책을 강제하는 등의 종교탄압 정책이 시행되었다. 2차대전 시기의 소련같이 일시적으로 종교탄압의 고삐를 풀어준 케이스도 있지만 이건 특수한 경우고, 대부분 소극적으로든 교묘하게든 적극적으로든 인민 대중을 종교와 차단하고, 일괄적으로 종교단체를 탄압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절대 다수의 공산권 국가에서 무종교와 무신론 사상을 전파하는 건 허용/권장되면서 종교 포교는 막거나, 종교인들을 강제수용소나 감옥에 가두고 심하면 처형하는 일도 다반사였으며, 종교 시설이나 종교 학교는 폐교 및 축소되고, 종교를 가지면 기득권으로 진입하지 못하는 등 철저한 차별이 만연해 있었다. 결국 이러한 배경 속에 공산권 통계에서는 종교가 사실 있으면서도 겉으론 없다고 답한 사람도 상당히 많았을 것이라고 본다.
- ↑ 대한민국, 일본 등 동아시아 문화권은 해당되지 않는다.
- ↑ 특히 비교적 역사가 짧은 종교일수록, 교리가 엄격할 수록 그런 경향이 강한 편이다.
- ↑ 물론 이 말은 "무신론자는 비도덕적이다"라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 ↑ Crowther, Parker, Achenbaum, Larimore, & Koenig(2002)
- ↑ 자립심이 결여된 행복이 제대로 된 행복이냐고 비판할 수 있을 텐데, 의미추구적 행복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 "신으로부터의 이성의 자립" 을 강조한 행복심리학자가 혹시 있는지 확인 바란다. SWB 계통 연구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 ↑ Glass, de Leon, Marottoli, & Berkman, 1999; Ell, Nishimoto, Morvay, Mantell, & Hamovitch, 1989; Vahia et al., 2011; Koenig et al., 1998; Hill, Burdette, Angel, & Angel, 2006. 노인심리학 관련된 주요 연구성과만 모아봐도 벌써 이만큼 나온다.(…)
- ↑ 여담이지만, 종교를 싫어한다고 알려진 유명 무신론자 중 하나인 샘 해리스(S.Harris)의 경우에도 영성이나 명상 같은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 ↑ 유럽사회의 경우는 근대의 합리주의와 자발적 사고, 선진적인 사회, 비종교적 가치관의 보편화를 통해 종교를 통한 행복보다는 종교를 벗어나서도 안정된 사회제도와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종교 자체의 여러 문제점을 수용하면서까지 종교가 주는 행복감을 굳이 추구할 필요가 사라졌다는 점이 크다. 또한 유럽 현지의 기독교 전통은 반사회적이거나 역기능적인 측면이 상대적으로 덜하며, 그래서인지 반종교적 레퍼토리도 그만큼 찾아보기 쉽지 않다. 애초에 유럽권 지식인들이 영미권 반종교주의자들을 까는 주된 소재 중 하나가 "너네들은 아직도 계몽주의 시대에 살고 있냐" 하는 거다.
- ↑ 관련 논문을 찾고 싶다면 다음을 참고. Applegate, Cullen, Fisher, & Ven, 2000; Galen, 2012; McKay & Whitehouse, 2014; Sablosky, 2014; Shariff, Piazza, & Kramer, 2014; Decety, Cowell, Lee, Mahasneh, Malcolm-Smith, Selcuk, & Zhou, 2015. 마찬가지로, 주요 연구성과만 모아 보아도 벌써 이만큼 나온다. 반박논문에 대해서는 이하에 따로 그 내용이 소개되어 있으니, 읽고 싶은 사람은 원하는 쪽을 찾아서 읽자.(…)
- ↑ 학문적으로는 moral self-enhancement라고 하며, 사회적 바람직성 편향의 한 종류로 보고 있다.
- ↑ 위키러 여러분이 "솜방망이 처벌" 관련 뉴스기사를 읽고 분개한 적이 있다면, 여러분도 응보적 정의를 인지적으로 경험한 것이다.
- ↑ 얼핏 생소한 이름처럼 보이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진화심리학계의 태산북두 중 하나다. 2008년에는 《사이언스》 지에 종교적 친사회성의 기원과 진화에 대한 논문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고, 연구방법론 상으로도 학계에 처음으로 WEIRD 문제로 통칭되는 표본편향(sampling bias) 문제를 제기한 인물이기도 하다.
- ↑ Sheriff & Norenzayan, 2007.
- ↑ 이는 실제로 그리스도교 계통에서 말하는 "코람 데오"(Coram Deo) 정신과도 통한다. 이 라틴어의 뜻은 대략 "신 앞에서" 로, 종교개혁가들의 슬로건이기도 했다.
- ↑ Johnson & Bering, 2006.
- ↑ 즉 위에서 화이트가 말한 "자기 종교 구성원에게 한정된 선행과 이타성" 을 말한다.
- ↑ 보통 종교인들의 문제점이라고 거론되는 것들은 저소득층+ 저학력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즉, 종교인의 어떤 특성에 대해 연구할 때에는 부유한 종교인 대 부유한 비종교인, 가난한 종교인 대 가난한 비종교인 식으로 비교해야 하지, 그냥 싸잡아서 종교인 대 비종교인 식으로 연구하면 안 된다는 것.
- ↑ 예컨대 한 고전적인 연구에서는(Allport & Ross, 1967) 독실하게 종교적 교리를 따르고 자기 자신을 갈고 닦는 사람들은 이타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단지 외적으로 인간관계를 맺고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 "교회만 왔다갔다하는" 사람들은 심각한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있더라는 보고도 있었다.
- ↑ 물론 영향력 자체는 막대했으므로 교과서에는 종종 실린다. 그러나 오늘날의 심리학자들 중에 이것을 "고스란히" 긍정하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 ↑ 대리 통제(vicarious control)는 비단 전능한 유일신뿐만 아니라 강력한 중앙정부, 권위주의적 가부장, 카리스마 있는 리더 등에 대하여 그들의 강력한 통제권에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통제력을 발휘하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런 대상들에게 극성 종교인들이 광적으로 찬동하는 것도 심리학적으로 보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닌 것.
- ↑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을 참고. Anderson, Kay, & Fitzsimons, 2010; Jost & Kay, 2005; Kay & Jost, 2003.
- ↑ 세상을 보는 이러한 태도는 기존의 "세상은 공정하다" 에서 벗어나서, 심지어는 현실의 부조리와 문제점에 순응하게 만드는 "세상은 원래 불공정하다, 그래도 질서는 잡혀 있으니 괜찮다" 에까지 개인이 수긍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를 정치심리학자 존 조스트(J.T.Jost)는 자신의 체제 정당화 이론(System Justification Theory)에서 잘 정리하였다.
- ↑ Kay, Gaucher, Napier, Callan, & Laurin, 2008; Kay, Moscovitch, & Laurin, 2010; Laurin, Kay, & Moscovitch, 2008.
- ↑ Sims & Baumann, 1972; Vandello & Cohen, 1999.
- ↑ Sales, 1972; Norris & Inglehart, 2004.
- ↑ Kay, Shepherd, Blatz, & Chua, 2010.
- ↑ Kay, Shepherd et al., 2010.
- ↑ Whitson & Galinsky, 2008.
- ↑ 이처럼 가히 세기말적으로 공포스러운 메시지라고 할지라도, 개인은 자신이 예측할 수 있고 확실한 선악의 구도를 그려낼 수 있다면 그것을 망설임 없이 환영하고 수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 본성에 대해 굉장히 의미심장한 함의를 갖고 있다. Rothschild, Landau, Sullivan, & Keefer, 2012.
- ↑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의 저서 《신을 위한 변론》 에 더욱 자세하게 나와있으니 관심있는 사람은 참조를 권한다.
- ↑ 매슈 허트슨의 책 《왜 우리는 미신에 빠져드는가》 참조.
- ↑ 티모시 윌슨, 《Story》, 강유리 역, 웅진지식하우스, 2012; 쉬나 아이엔가, 《선택의 심리학》, 오혜경 역, 21세기북스, 2012
- ↑ 종교와 행복 간의 관계를 고찰한 논문으로는 Diener, Suh, Lucas, & Smith(1999) 참고. (여기서 Suh란 다름아닌 연세대의 서은국 교수다) 세속화된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을 고찰한 종교심리학자들의 저서로는 《Sacred and Secular》 도 함께 찾아볼 것. 위에도 인용된 Norris & Inglehart, 2004 가 이 책.
- ↑ 특히 불가지론자의 증가세가 크다.
- ↑ 전통적인 북미나 유럽 및 선진국 지역에서 교세가 움츠러들고 있는걸 보고 기독교가 쇠락해가는 종교라며 단정짓는 많은 선진국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사실 현대 기독교는 인구증가세나 선교율이 높은 비서구 지역들을 중심으로 선진국에서의 영향력 및 신자수 감소를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종교다. 그리고 종교학자들은 개발도상국 지역 기독교 성장의 대부분이 20세기 식민지 시대 종식 직후부터 폭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 ↑ 비아시아 지역에서 아프리카 등 대표적인 종교적 지역에선 이미 이슬람/기독교가 뿌리깊게 선점하고 있어 불교 인구가 미미하고, 서구에서는 20세기 중후반부터 불교에 대한 호의적인 관점이 크게 늘었으나, 그것이 비종교적인 분위기를 누르고 불교로의 광범위한 개종으로 이어지지 못한 점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