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델 카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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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잘 알려진 중년 시절 모습. 리암 니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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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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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베네딕토 16세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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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세월은 흐른다...

이름피델 알레한드로 카스트로 루스
(Fidel Alejandro Castro Ruz)
생몰년1926년 8월 13일 ~
출생지쿠바 비란
정당쿠바 공산당
종교없음(불가지론)
배우자미르타 디아즈 발라트
달리아 소토 델 발레
너희들이 지금 온갖 더러운 모함으로 나를 더럽혀도 그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도 아니며, 역사가 나의 무죄를 증명하리라.

1 소개

쿠바혁명가, 정치인, 독재자. 불사신 영웅은 죽지 않아요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으로부터 쿠바를 해방시킨 혁명가라는 평가와, 언론 탄압은 물론 정적과 반대파 숙청을 행한 독재자라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미국과의 오랜 대립 속에 반미적인 성향을 지닌 것으로 유명하며, 한 때 복지정책을 통해 쿠바인에게 인기를 얻기도 했으나 공산권의 붕괴로 인해 쿠바 역시 큰 타격을 입었고 쿠바 의료계의 현실이 알려진 것처럼 선진국 수준까진 아니기에 자국에서도 어느 정도의 비판이 있다.[1] 하지만 바꿔말하면 북한과는 달리 미국의 봉쇄가 지속되고 소련의 지원도 끊긴 특별기간을 극복했다는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목소리도 높다.[2] 쿠바 자국에서 뿐 아니라, 제3세계에 대한 협력과 지원으로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지에서는 여전히 호의적인 평가가 우세하다.

2 생애

1926년 스페인 갈리시아에서 이민온 한 지주의 아들로 비론이라 하는 쿠바 동부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지주라는 배경답게 중산층 이상은 되는 집안이었고 고등 교육을 받았다. 학창 시절 공부보다는 스포츠를 좋아했으며 특히나 야구에 열광하는 소년이었다고 한다. 어찌되었건 하바나 법대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학생 운동에 입문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자유주의와 반제국주의,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한다. 공부는 딱히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토론하는 것과 웅변의 대가라서 순식간에 학생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고 한다.

1953년, 쿠바의 군사 독재 정권이자 미국의 어용 정권이었던 바티스타 정권을 습격하기 위해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면서 이름을 알린 혁명가이다. 비록 습격 작전은 실패하였으나 "역사가 나의 무죄를 증명할 것이다.(La historia me absolverá)"[3]라는 간지폭풍명언을 통해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변론한 사건은 그의 이름을 오히려 드높였다. 2년 후,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부가 특별사면을 행하자 멕시코로 망명해 유명한 혁명가 중 한 사람인 체 게바라 같은 중남미 해방운동 세력을 흡수하여 쿠바에 재상륙하여 많은 고난을 극복했다. 결국 혁명군이 아바나에 입성한 1959년에 내각 책임제의 국무총리로 취임하면서 혁명을 성공시켰다.

1961년, 혁명이 남미 전부로 번질 것을 우려한 미국이 남미와 쿠바에 대한 봉쇄를 강화하자 친소련 정책을 펼치면서 공산주의로 선회했다.[4] 그 후 피그만 침공, 쿠바 미사일 위기 등 여러 냉전 사태의 최전방에 있었다. 게다가 1959년부터 1976년까지 피델 카스트로 국무총리는 헌법을 초월하는 권력을 행사하여 쿠바의 정치경제와 사회문화를 좌지우지했다. 소련과 동독을 본받아 새로운 헌법을 제정한 1976년부터 여생의 요양을 위해서 라울 카스트로(남동생)에게 세습한 2008년까지 국가평의회 의장(국가원수)을 재임했다.

2010년 9월에 그는 미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기자가 "쿠바의 경제 모델을 다른 나라한테 퍼트리고 싶나?"라고 질문하자 그는 "우리나라에서도 실패했는데"라고 했는데, 이것만 보고 공산주의의 실패를 인정했다고 보는 것은 어폐가 있다. 물론 이 한 문장만을 두고 보면 카스트로가 공산주의의 성공을 회의적으로 생각한다고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본문 내에서는 이 말이 쿠바 혁명과 공산주의의 총체적 실패를 인정한다기보다는 당내 정통 공산주의자들과 관료들의 반발로부터 동생 라울 카스트로가 개혁을 행할 공간을 주기 위한 발언이라는 해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이냐시오 라모네와의 인터뷰에서 "물론 나는 사회주의자이고 마르크스주의자이며 레닌주의자입니다. 나는 그런 자세를 포기하지 않았고, 절대로 그만두지 않을 생각입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하여튼 "The Cuban model doesn't even work for us anymore."이라는 말이 담긴 전문은 여기에서. 기사

그런데 CNN의 보도에 따르면 카스트로가 말하길, 자신이 쿠바에서 공산주의 모델이 실패했다고 한 것은 기자가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어째 분명 그렇게 말해놓고 어줍잖게 말을 바꾸는 감이 있다(...).

3 평가

3.1 긍정적

"역사가 나의 무죄를 증명하리라"라는 말을 하면서 간지폭풍을 뽐내던 혁명가 시절의 정신이 아직 남아있는지, 베네수엘라에서 문맹퇴치운동을 한다고 하자 공산권에서 지원받은 싼 컬러 TV를 그 일원으로 몽땅 지원해 주기도 했다. 같은 맥락으로 전력난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형광등을 무료 지원해 주기도 하는 등전력난이라 쓰지도 못할텐데 전력을 공급해 줘야지, 기름없는데 탱크주는격 주로 공산권, 특히 남미 쪽에 지원이 많은 편이다. 또 의사 등도 자주 보낸다.

제3세계에 대한 지원은 단순한 교류 협력을 넘어 군사적인 영역으로도 이어졌다. 가령,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유지되고 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군자이르 부대들이 앙골라를 공격하자 앙골라 대통령 아고스티노 네토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거 군사개입하였고, 앙골라 내전 종결 후에는 대가를 빙자하여 이권을 갈취하려 들지도 않았다. 또한 나미비아 독립 등도 지원하였다. 아프리카에서 쿠바군이 수행한 국제주의적 임무로 인해 실제로 아프리카의 반제국주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피델의 평가는 우호적이다.

대부분의 막장 독재 국가들과는 달리 자신에 대한 우상화나 신격화 정책을 행하지 않았다. 예로 쿠바 전역을 뒤져봐도 체 게바라나 다른 혁명 인사들을 기념하는 동상이나 초상화 같은 기념물은 꽤 있지만, 피델 카스트로 본인이나 그의 동생인 라울의 것은 없다. 쿠바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것이라면 모를까...

비록 친미적인 언론보도나 정부 전복에 대한 논의는 금기시되어 있고, 실제로 했다간 군부에 의해 잡혀갈 각오를 해야 하지만, 쿠바에서는 성조기 비키니(!!)를 입은 처자를 해안에서 발견할 수도 있고, 서구 문물이 정식 수입되지는 않지만 암시장에 나가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7, 80년대에 남대문 시장에서 수입품 사던 것, 세운상가에서 빨간 거 사던 것을 생각하면 되는 수준이라 한다. 쉽게 말해 70년대 한국식 군사독재를 생각하면 된다고 한다. 아무리봐도 쿠바가 한국 유신 때보단 나은 거 같은데 박정희는 미니스커트도 잡아들였는데...? 사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언론에 많은 집중 사격과 왜곡되거나 편향된 사실이 퍼진 탓도 있다.

막장 오브 막장의 포스를 뽐내던 바티스타의 정권은 만주국 정도의 어용 정권이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카리브 해 연안의 국가치고 친미 탈피해 본 국가가 있었을까 싶다. 되려 쿠데타로 집권해 경제 발전에 나섰던 게 바티스타 정권. 하지만 빈부 격차 등으로 민심이 급격히 나빠졌다. 여하간 그런 바티스타 정권을 뒤엎고 미국의 착취에서 벗어나 대부분의 사업을 국유화했으니 뒤가 근질거려 공산권을 택했다는 쪽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미국의 바로 눈 앞에서 쿠바가 살아남으려면 이념이고 자시고 일단 미국을 견제할 세력(소련)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

사실 그 당시 미국이 사회주의 국가라면 무조건적으로 탄압했던 것은 사실이다. 당연히 미국은 이러한 나라들이 소련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카스트로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 심지어 미국이 이런 삽질을 벌인 나라들은 쿠바만이 아니었다.

피델의 혁명 세력들은 쿠바인이 대다수이긴 했지만 사상적으로는 남미 민족주의적인 해방 운동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그의 사상은 공산주의라기보다는 반미·민족주의에 가까웠다. 카스트로는 애초에 쿠바 공산당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민족주의 정당인 정통주의당의 당원이었다.[5] 멕시코 혁명과 같은 반미 민족주의적인 혁명의 성격을 친사회주의로 돌려놓은 것은 미국의 공로가 크다. 비슷한 경우로 베트남의 혁명가 호치민이 있는데, 마오쩌둥이오시프 스탈린은 호치민이 사회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닌 민족주의자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자신들의 뒤통수를 칠 자라고 싫어했다. 물론 셋 다 미국이란 적을 두고 서로 손잡으며 사진에서 웃으며 미소지었지만... 실제로 호치민은 프랑스를,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견제하고자 미국의 힘을 빌리려고 하기까지 했다. 피델 카스트로와 마찬가지로 호치민과 북베트남이 반미 공산 국가로 방향을 튼 것에는 미국의 실책이 끼친 영향이 매우 큰 편. 카스트로 정권이 단순한 공산 독재 정권이라면 수많은 쿠바와 남미인들이 그에 대해서 애정을 담아 까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김일성과 달리 피델 카스트로는 자신에게도 자식[6]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권력을 세습시키지 않았다. 동생인 라울에게 권력을 넘기긴 했다지만, 라울도 형의 후광이 아니라 피델 다음가는 쿠바 혁명의 주요 인물인 소위 말하는 개국공신이었기에 권력을 이어받은 것이었다.[7] 쿠바 혁명 때 주로 참모 역으로 활동하느라 체 게바라에게 묻혀서 그렇지, 그래도 혁명직후에도 평의회 부의장으로 쿠바 권력순위 2~3 순위에 위치한 인물이 라울이었고, 체 게바라 사후에는 완전히 2인자 자리를 굳혔다. 비슷한 예로 옛날 중국 송나라송태조송태종 형제 정도의 권력 관계에 더 가깝지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3대 세습과는 전혀 다르고, 만약 체 게바라가 남아있었으면 체에게 권력이 승계되었을거라 보는 시각도 있다. 그리고 라울의 나이가 80이 넘은 것을 생각하면 쿠바는 곧 혁명 이후의 세대에게 권력이 이양될 것으로 보는 전망이 우세하다. 그리고 라울의 성향을 피델과 비교해보면 북쪽의 세습에 익숙한 한국인에게는 꽤나 센세이셔널한 일일 따름.

흔히 쿠바 혁명이라고 하면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주역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워낙 체의 명성이 높아서 생긴 오해다. 라울 카스트로는 피델과 함께 쿠바 혁명 계획을 시작할 때부터 주도적이고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오히려 체는 그란마호 상륙 작전 당시 공산 게릴라군에 의사가 오직 체 밖에 없어서 군의관으로 탑승한 것이며, 후에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대민지원을 하며 거점을 세울 때 체의 의료 대민봉사지원이 눈부신 성과를 나타내어 주도적 위치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체 게바라가 유독 많이 알려진 이유는 체가 인간적인 매력과 성품, 교양을 바탕으로 서구 지식인들에게 크게 어필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체의 모습이 당시 서양의 좌파 지식인들이 꿈꾸던 사회주의 혁명가의 모습에 부합했기 때문에 체가 크게 알려진 것. 그리고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잘생겼잖은가(...). 한번 보면 뇌리에 박히는 미모라서 지금까지도 사회주의 혁명의 아이콘으로 남은 면도 없잖다. 게다가 요절했다. 즉 청춘스타.

소련이 국제 공산당의 중심으로서 서구 좌파 학생들에게 이상향으로 여겨지던 시절에는 스탈린이 존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의 폭로와 더불어 소련군이 무력으로 헝가리 봉기프라하의 봄을 진압하면서 스탈린에 대한 환상은 깨져버렸고 소련에 대한 동경도 많이 퇴색되어버렸다. 이때 68혁명으로 대표되는 신좌파의 발흥과 함께 그 공백을 채우고 부상한 것이 호치민, 마오쩌둥, 체 게바라, 그리고 피델이었다. 호치민은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 운동까지 결부되어 일종의 철인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의 실상이 알려지면서 스탈린과 같은 신세로 추락하였다. 체 게바라는 상술되었듯이 잘 팔렸고 여전히 혁명의 아이콘으로 기능하고 있다. 피델은 여전히 집권 중인 생존 중인 지도자로서 이제는 그 대우가 조금 미묘한 듯. 체 게바라가 혁명의 아이콘이라면 피델은 혁명의 화석이라나.

동구권이 붕괴된 이후의 위기상황에서도 기본적인 사회복지시스템을 유지하는 한편, 농업 체계를 도시농업과 유기농 위주로 대거 개편하여 자급자족에 성공, 고난의 행군과 같은 헬게이트 개막을 막아낸 점 역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게다가 군비를 줄여가면서 적어도 민중들이 최소한 굶주리지 않고자 배급을 유지하게 한 것으로 군비확장에 미쳐있던 북한과 정반대인 모습을 보였다.

3.2 부정적

사실상 쿠바를 공산독재정권으로 운영하고 있었으며, 쿠바에는 언론·통신·발언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다고 서방권 국가들, 주로 미국이 비판하고 있다. 언론자유지수의 경우 2014년 기준 세계 170위로 흔히 자유가 어느정도 보장되었을거란 생각과는 달리 쿠바의 언론 실태는 참담한 수준이다.참고로 현재 우리나라도 언론의 자유는 '부자유' 수준이다 이에 관하여 칠레의 주간지 <케 파사(Que Pasa)>는 중남미 좌파들이 단 한 번도 피델 카스트로 정권을 비판해 본 적이 없다고 보도하였다.

공산 혁명 이후 그의 명령으로 반대파에 대한 즉결처형이 벌어졌으며 군중심리에 의한 인민재판도 자주 행해졌다는 주장이 있다.[8] 또한 쿠바에 최초로 강제노동수용소[9]를 건설하기도 하였으며, 사실상 비민주주의적인 정책, 보장되지 않는 종교의 자유[10]와 유명무실한 사법기관과 철두철미한 정보기관의 존재도 문제가 된다. 지식인들도 마구 잡아들이는 등 탄압하였고 반대파 역시 엄청나게 탄압하였다. 또한 감옥과 수용소에선 고문이 행해지고 환경이 심각할 정도로 비위생적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하지만 피델이나 쿠바에 대한 부정적 평가들의 출처는 마이애미로 망명한 반체제 인사들의 입이 대부분이므로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고문의 경우도 마찬가지 사안으로, 마이애미 망명 인사들이나 미국 우익들은 쿠바에서 이루어지는 인권탄압과 고문을 규탄하지만, 피델의 일관된 입장은 쿠바에서는 고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 가령, 바티스타 정권 경찰 출신으로 피델 카스트로 치하에서 반체제활동을 벌이다 테러 혐의로 체포된 아르만도 비야다레스의 경우 옥중에서 이루어진 고문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었다고 주장하여 국제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고 국제 켐패인으로까지 번졌다. 하지만 쿠바에서 석방 조건으로 '걸어서 비행기를 타고 걸어서 비행기에서 내릴 것'을 주문하자 하체 마비환자 행세를 즉각 집어치웠다.(...)

집권 초기에는 원래 그렇게까지 빡세지 않았지만 1980년대 말 들면서 동구 공산권에서 개혁, 개방 운동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나서는 혁명정신 이런 거 다 갖다 버리고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모습을 보여줬다.[11] 숙청 과정에서 혁명영웅 이런 거 없었다. 이 때의 숙청포스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의 김일성 정도의 포스.

경제적으로도 초기에는 복지정책을 바탕으로 쿠바 국민들에게 호평을 얻는 듯 했으고 이 평가는 1980년대까지도 이어졌지만 국유화 과정에서 여러번 무리수가 있었다. 그래도 1970-80년대에는 소련이나 동구권 국가의 지원으로 그럭저럭 넘어갔지만 결과적으로 90년대 초반의 경제붕괴로 인해 쿠바 경제는 한차례 나락으로 떨어졌다. 또 공산권이 붕괴하자 쿠바는 석유수급이 끊기면서 한동안 전력난과 식량난에 시달려야 했다. 현재는 상황이 다소 나아졌으나 공산품의 질은 여전히 떨어지는 편이다. 또한 이때의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서 관광업 진흥이나 자영업 허용 등의 조치를 취했는데 오히려 지하경제가 확장되가는 큰 문제점이 벌어졌고 2000년대에 경제상황이 다소 나아졌다지만 여전히 개발도상국인 수준이다.

농업에서는 준비되지 않은 집단농장화로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했다.[12] 공업처럼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하자, 농민들은 집단 태업이나 무장봉기를 했다.[13] 오랜 시간동안 플렌테이션이나 자영농에 익숙해진 쿠바 농민들은 집단농장화를 이해하지 못했고, 피델의 제안을 강경히 거부했다. 피델도 준군사조직을 창설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농민 게릴라와 전투를 벌였다.

의료 부분에 있어서 쿠바가 중남미 국가치고 뛰어난 수준인 것은 맞지만 대부분의 의사들은 박봉에 시달리고 있고 투자의 부족으로 의료품이나 시설은 낙후되어 있다. 또 의사의 수는 많지만 기술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데다가 택시기사가 교수나 의사들보다 돈을 더 잘 버는 것이 현실. 흔히 한국에 의료 선진국으로 알려진 쿠바지만 실상은 결국 개발도상국치고 좋은 수준에 불과하다. 또한 환자들의 개인 정보에 대한 보호가 이루어지지 않고 의료 과실에 대해 의사를 신고할 수도 없다.

2014년 5월, 피델이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왕이나 다름없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리고 있으며, 80년대에는 미국에 코카인을 밀매하는 마약사업도 했다는 전직 경호원의 폭로가 나왔다.# 대부분의 독재자들이 겉으로는 검소한 척 굴어도 대개는 호화판 생활을 누린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단순 무고로만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이에 대하여 반론도 있는데 여지껏 카스트로를 가혹하고 신랄한 독재자로 비난해온 미국의 우익 지식인들도 대체로 피델의 검소함만큼은 인정해왔다. 로버트 E.쿼크가 쓴 카스트로 평전에서도 이러한 시각이 드러난다. 그를 기회만 있으면 제거하거나 타격을 줄 정보를 눈에 불을 켜고 찾았을 미국이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을까? 베트남이 프랑스로부터 해방 이후 평생을 검소하게 지내던 호치민도 실은 검소하지 않고 사치스럽게 지냈더라 주장이 나왔으나 어느 것 하나 증거조차 찾지 못하고 끝내 개소리로 묻혀진 사례가 있는데, 이 역시 이와 똑같이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마약 밀매에 대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피델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줄 것으로 보인다. 2015년 10월에는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메데인 카르텔 조직원이었던 존 하이로 벨라스케스가 피델 카스트로와 마약 거래의 연관성을 또다시 주장했다. 기사

4 여담

어린 시절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직접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워낙 영어가 서툴러서 문법도 엉망이었다. 편지 내용은 대략 이랬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합중국 대통령에게.

나의 좋은 친구, 루스벨트 씨. 나는 영어 잘 몰라도 당신에게 편지 쓸 정도로 영어 알아요. 난 라디오 듣는 게 좋아요. 라디오에서 당신이 새로운 시대에 대통령이 될 거란 소식 듣고 매우 기분 좋았어요.

난 열두 살이에요. 나는 소년이지만 생각을 많이 해요. 하지만 내가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 쓰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괜찮다면 답장에 10달러짜리 미국 지폐도 보내줘요. 10달러 미국 돈 한 번도 못 봤어요. 갖고 싶어요...(중략)...난 영어 잘 모르지만 스페인어는 잘 해요. 당신은 스페인어 잘 못해도 영어는 잘 하겠죠. 당신은 미국 사람이고 난 미국 사람이 아니니까요...(하략)

그리고 연설 덕후로도 유명하다. 1960년 9월, 유엔 총회에서 행한 4시간 29분짜리 '간단한' 연설은 지금도 (정상급 인사의 연설 중) 유엔 역사상 최장시간 연설로 기록되어 있다.[14] 비(非)정상급 인사로는 1957년 크리슈나 메논(Menon) 주(駐)유엔 인도 대사[15]가 9시간 논스톱 연설을 했다.듣는 사람은 기분이 어땠을까? 피그스 만 침공사건 이후에도 분노+희열에 가득 차서 라디오로 몇시간이고 연설했다. 주내용은 다시는 쿠바를 무시하지 마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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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유엔 대회의장에서.

본인 스스로 연설을 하다 보면 기가 충전되는 느낌이라고 하는 등, 연설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라 주제만 생기면 뭐든지 연설 주제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성격이 불같고 즉흥적인 경향이 있어서 기행을 저지르곤 했다. 예를 들어 쿠바에서 멕시코 시티로 망명했던 시절, 한 부하가 자신에 대한 비판을 하자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3시간 짜리 연설로 반박한 것, 미국을 욕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서 소련과 함께 UN 총회에 참석했는데 양복이 아니라 냄새나는 작업복을 입고 미국으로 찾아온 것이 있다. 그 후의 행적이 더 가관인데, 미국에서 최고급 호텔과 경비원들을 제공하자 카펫과 이불을 담배로 태워버리고 닭을 잡은 뒤 정리를 안 하고 방에서 나갔으며, 그 길로 곧장 UN사무총장에게 쳐들어가 '미국이 제공한 호텔의 불편함'을 주제로 1시간 짜리 연설을 한 뒤 대답을 듣기도 전에 뛰쳐나가 할렘가의 낡아빠진 호텔로 거처를 옮겨버렸다. UN 총회가 시작된 뒤에는 흐루쇼프가 발언할 때 쿠바나 카스트로라는 단어만 나와도 벌떡 일어나 최대한 시끄럽게 박수를 쳐대기도 했으며 1시간 짜리 간단한 연설을 하겠다고 한 뒤 위에 나온 4시간 29분 짜리 연설을 행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졸지 않고 버텨낸 사람이 흐루쇼프 뿐이었다고.[16]

야구 선수 출신이다. 대학생 시절에 대학팀 대표로 미국에 와서 메이저 리그의 문을 두들겼다. 이때 뉴욕 양키스와 워싱턴 세너터스(현재 미네소타 트윈스)의 트라이아웃에 참가했으나 입단에는 실패. 그때 메이저에서 받아주었다면... 여하튼 그 덕택에 열혈 야구광이었지만 디에고 마라도나와는 1994년 처음 만난 이후로 친하게 지냈고 그 덕분인지 축구에 관심이 좀 생긴 모양이다.

쿠바인답게 시가를 좋아한다. 한때는 미국이 시가에 폭탄을 넣어서 암살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하지만 현재는 금연에 성공하여 시가를 멀리하고 있는 상태다. 오죽하면 담배 한 상자로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일은 그것을 적에게 선물하는 것이라는 발언까지 남겼다.

소련은 자발적 공산혁명이 일어난 얼마 안 된 나라[17]였던 쿠바를 매우 좋아해서 전폭적인 지원과 지지를 해주었는데 그 일환으로 피델에게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수훈했으며 쿠바에 대해 대규모의 경제 원조를 실시했다.

파일:Attachment/피델 카스트로/asgrht.jpg
미국의 골칫덩어리였기 때문에 수 없이 많은 암살 시도가 있었는데, 그의 인생을 통틀어서 638건의 암살시도가 있었다. 암살 방법도 시가에 독 바르기, 연설을 하는 연단 아래에 폭탄 설치하기, 취미 중 하나였던 스쿠버 다이빙 수트에 세균 집어 넣기, 미인계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봤지만 모조리 실패했다. 그래서 별명#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 이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암살이 시도된 인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한다. 이중 미인계가 실패한 이유가 가관인데, CIA에서 암살자로 보낸 여자가 피델한테 진짜로 반해서 실패했다. 여자는 피델 카스트로와 내연관계를 유지하다가 적당할 때 암살할 계획이었다는데, 해당 요원이 다큐멘터리에 나와서 한 이야기에 따르면 피델이 자기가 암살자인 것을 눈치채서 한 동안 대피했다가 다시 피델에게 돌아갔는데, 권총을 겨누자 그가 한다는 말이 "날 쏠 수 없을걸. 넌 나를 사랑하니까"라며 되레 자기 가슴을 권총 앞에 들이미는데 쏠 수 없었다고 한다. 오오 카스트로 오오 마성의 남자

심지어는 2002년 독재 종결자 지미 카터와의 세기의 불사신/사신 매치에서도 비록 치명적인 내상을 입긴 했지만 살아남았고, 2011년 3월의 리턴 매치에서도 승리, 불사신의 위엄을 온 세계에 떨쳤다. 카터를 만나고도 죽지 않은 유일한 독재자. 대신 그의 연인이 죽었다. 만나지도 않은 카터의 땅밟기에도 죽어버린 김정일과 비교해 보면 피델 카스트로의 위대함이 더욱 돋보인다 물론 실은 카터와 만나기 전에 권좌를 동생인 라울에게 물려주고 잽싸게 빠져나와 독재를 끝내서 카터의 마법을 피해버린 것. 회피 크리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의 배후로도 지목되기도 했다.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한 리 하비 오즈월드가 친(親)쿠바 성향의 인물이었다는 증거가 나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증거가 굉장히 희박하다. 애초에 오즈월드란 인물 자체가 지극히 모순적이었고, 쿠바 성향 유인물 배포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차라리 위에도 나오는 피그스 만 침공 시기에 미국 대통령이 케네디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가 될 수도 있지만, 케네디가 아무리 봐도 매파라기보다는 비둘기파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훗날을 가늠할 수 없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수없이 많은 케네디 암살자 후보에서 피델 카스트로의 순위는 상당히 낮은 편이다.


추리닝을 즐겨입는다. 그것도 아디다스 추리닝만 입는다. 퓨마 추리닝도 종종 입는듯하다. 미국 브랜드라서 안 입을듯 하지만 나이키도 아주 가끔 입는다.

때문인지 묘하게 배우 리엄 니슨을 닮았다.

2016년 현재에는 워낙 고령이라서 눈치채기 어렵지만 상당한 거구이고 장신이다. 공식적으로 밝혀진 키가 191cm. 젊었을 적 찍힌 사진이나 영상들을 보면 키가 큰 편이다. 1972년 동독을 방문했을 당시 영상을 보면 당시 동독 서기장에리히 호네커와 비교해도 확연히 키가 차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1986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의 영상을 봐도 알 수 있는데, 그와 만난 김일성의 체구도 아주 작은 편은 아니지만 피델과 비교해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인 우고 차베스와는 매우 돈독한 관계였다. 차베스가 카스트로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던데다가 이미 차베스가 감옥에서 2년간 복역하다가 출소한 이후부터 카스트로랑 직접 친분을 쌓았고,[18] 차베스가 대통령직에 오른후부터 교육과 의료수준을 높여야 된다며[19] 쿠바로부터 교육용 교재와 의사를 대량으로 수입(?)하고 그 대가로 쿠바에게 연간 3000만 배럴가량의 석유[20]를 저가에 원조해줬는데 덕택에 미국의 경제봉쇄로 인한 경제난에 허덕이던 쿠바를 회생시켰다. 또한 차베스가 2002년에 쿠데타로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직접 차베스의 딸과 직접 통화해서 쿠데타 시도를 무위로 돌리기도 했다. 그래서 거의 아버지와 아들급으로 친한 관계였다. 하지만 카터에게서 살아나는 비법은 전수하지 못했다 후임인 니콜라스 마두로와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기는 하지만 쿠바의 경제가 나아졌다고 해도 1인당 GDP 1만 달러를 달성한것도 아니고 재정이 크게 넉넉한것도 아닌지라 때문에 일부 자재나 식품등을 지원해주는걸 제외하면 크게 도움을 주지못하는 처지라서 미묘하다.

그리고 니카라과의 대통령인 다니엘 오르테가하고도 1970년대 소모사 정권 시절부터 절친한 관계를 맺어서 다니엘 오르테가가 타 정파와 힘을 합쳐서 소모사 일당을 몰아냈을때 대대적인 지원을 내보냈으며 1980년대 콘트라 내전에 벌어졌을 당시에도 니카라과에 물자를 대대적으로 내보냈다. 이후로는 쿠바의 사정이 영 안좋아졌고 다니엘 오르테가가 선거에서 패하며 야당인사가 되었기에 니카라과에 대한 지원은 없어졌으나 개인적인 친분관계는 계속해서 이어갔으며 2006년에 선거로 재집권 한 이후로도 의료인력과 교육인력을 대거 내보내서 니카라과의 의료와 교육인프라를 정비시키도록 인력을 대거 내보냈다. 물론 따지고보면 우고 차베스나 다니엘 오르테가나 사실 피델 카스트로와는 스타일이 상당히 다른정치인이지만 [21] 아무튼 뭐 그렇다.

더불어 각 사회주의 국가 정치인 1세대로선 드물게 생존한 사람이다. 2016년의 연세론 90세. 또한 사망한다 해도 카터의 저주를 가장 오래 버틴 사람이 될 것이다(반대의 경우는 김일성). 뭐 정계에서 은퇴한 것으로도 충분히 버텼고, 지금 당장 죽는다 해도 저주 때문이라고 보기도 어려울 정도의 나이가 되었으니...

5 대중문화 속의 카스트로

미국 코 앞에 있는 공산국가의 독재자라는 이미지 덕분인지 미국 대중문화에서 상당히 자주 등장한다. 보통 선악의 구분을 떠나서 대단히 카리스마 있고 매력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편이다. 물론 아래의 경우와 같이 우스꽝스럽게 묘사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건 처음부터 개그로 나가는 경우이다.

게임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첫 번째 미션에서는 암살해야 할 목표로 등장하는데, 주인공인 알렉스 메이슨은 그의 별장에 잠입해 같이 있던 정부(情婦)를 방패로 삼고 저항하는 피델 카스트로를 권총으로 저격해 죽이는 데 성공하지만, 메이슨이 죽인 자는 이미 피그만 침공 계획을 다 알고 있던 피델의 대역이었다. 이때 머리를 맞추면 성스러운이상한 브금과 함께 V.A.T.S.로 크리티컬 뜬 마냥 슬로모션으로 총알→피델의 머리를 클로즈업해준다. 진짜 피델 카스트로는 미션 후반에 포획한 메이슨을 소련군 장교니키타 드라고비치에게 선물이라면서 넘겨버린다. 게임에서도 안 죽는 불사신의 위엄 게임 플레이 영상. 8:50 쯤에 피델의 대역이 등장하고 14:40부터 진짜 피델이 나온다.

같은 게임의 나치 좀비 미션에서는 엉뚱하게도 적대국가의 대통령들국방장관과 태그를 짜서 펜타곤좀비들을 격퇴한다. 한술 더 떠서 <데드 옵스 아케이드>라는 미니게임에서는 플레이어 캐릭터로 등장하며 1UP 아이템은 카스트로 황금상이다(...).

SNK에서 1988년에 개발한 이카리 스타일의 아케이드 게임 게바라에서는 체 게바라(1P측)와 함께 2P측 플레이어 캐릭터로 나온다. 곤베에의 아임 쏘리에 등장한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이나 YS는 잘맞춰에 등장한 김영삼 대통령 등과 더불어 몇 안되는 국가지도자급 인사의 플레이어블 캐릭터화일 듯. 원래 일본어판에서는 타이틀 화면에 체의 흑백그림과 함께 "쿠바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에 바친다(キューバ革命の英雄、チェーゲバラに捧げる)"는 내용의 헌사가 나왔지만 수출판에서는 역시나 피델과 사이가 안좋은 미국에 수출할 것이라 그랬는지 제목도 <게릴라 워>로 바꾸고, 헌사도 삭제되어 내용이 "혁명의 영웅을 찬양하라(hail the hero of the revolution)"로 바뀌었으며 체나 카스트로를 연상케 하는 내용은 모두 삭제하였다. 하지만 캐릭터의 외형은 안바뀐게 함정

좀비 아포칼립스 소설인 세계대전Z에서는 간접적인 언급으로 등장한다. 좀비 사태에 훌륭하게 대처한 뒤 피난민들을 통해 외국의 자유로운 사상들이 퍼지자 권력자의 자리에서 물러나 자유 선거를 주도해 민주주의 쿠바를 이룩한다. 이로 인해 그의 동상까지 세워진다. 혁명을 일으키고, 쿠바를 수호하고, 쿠바의 경제 발전과 자유까지 선물한 대영웅이 된 셈. 실제로는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쿠바에는 공공장소에서 피델을 기리는 동상같은 기념물은 없다.

영화 RED 2에서 에드워드 베일리 박사(앤소니 홉킨스 분)가 1961년에 피델 카스트로를 암살하기 위해 독가스를 제조했지만 암살에 실패했다고 언급된다.

트로피코 4에서는 로딩 때 그가 한 말 중 하나인 "나는 아직도 살아있다"가 나온다.

재기드 얼라이언스 시리즈에서는 피델이라는 이름의 개그 캐릭터로 패러디되었다. 사이코 성향이 있어서 가끔씩 단발로 쏘라는 플레이어의 명령을 무시하고 자동사격을 가하는 특성이 있다. 그래도 전투력은 괜찮게 책정되었고 폭발물 분야에서는 게임 내 최고의 전문가이다.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남쪽으로 튀어에서 대학생시절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가 카스트로 의장과 찍은 사진이 있다.[22]

6 관련항목

  1. 북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여전히 쿠바의 언론자유지수는 낮은 편.
  2. 사회보장을 유지하는 한편 농업을 협동조합, 도시영농/유기농 생산 체제로 완전히 개편해내어 고난의 행군 같은 헬게이트는 열리지 않았다.
  3. 영어로 번역하면 History Will Absolve Me.
  4. 이전까지 카스트로의 성향은 공산주의라기보다는 단순한 반미주의에 가까웠다. 자세한 설명은 후술.
  5. 그러나 동생 라울과 체 게바라는 사회주의자였다.
  6. 피델의 6남 2녀 중 큰아들을 제외하면 정계나 공직으로 뛰어든 사람이 없고, 그 큰아들은 부정부패를 저지르면서 공직에서 추방당했다. 그리고 딸인 앨리나 페르난데스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열심히 카스트로를 까댔다. 현재 그녀는 CNN논평가로 활동 중이다.
  7. 도리어 피델과 라울 형제가 대학생일 때는 동생인 라울이 사회주의 운동에 몰두하느라 학업을 게을리하자 우수한 법대생이었던 피델이 한 소리 했다고 한다.
  8. 이에 대하여 피델 본인은 인터뷰와 회고록 등을 통해 강력히 부인하였으며 쿠바 정부의 공식 입장 또한 다르지 않다. 다만 혁명 직후 초기의 공개재판들에 대한 과오는 인정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편집자이자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이냐시오 라모네와의 인터뷰 참조.
  9. 라카바나 노동수용소를 이른다. 그런데 쿠바 정부와 체 게바라에 옹호적인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자료들을 교차해보면 체 게바라가 공직자들의 태업을 체벌하기 위해 건립한 라카바나의 노동 수용소가 반대파들의 주장에 의해 정치범 수용소로 왜곡되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노동 수용소의 경우 본인이 공직자 자격을 사퇴하면 수용소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방식.
  10. 종교의 자유는 나중에 다시 허용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으며, 정부의 허가 아래 종교집회도 가능하다.
  11. 다만 피델 카스트로의 대표적인 정적 숙청 사건으로 일컫어지는 오초아 사건의 경우 단순히 마약 밀매에 대한 응징이었다는 것이 피델과 쿠바 정부의 주장이다. 하지만 세계 독재국가를 다 통틀어서 "우리 지도자에게 밉보여서 숙청했다."고 대놓고 밝히면서 숙청하는 꼴이 있는지를 보면... 북한만 해도 장성택 등을 숙청할 때 오만가지 죄를 다 갖다붙여 죽였다.
  12. 정작 피델은 프랑스 언론인 이냐시오 라모네와의 인터뷰에서 소련식 농촌집산화는 없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오늘날 쿠바의 농지 대부분은 국영지가 아니라 협동조합체제에서 운영되고 있다.
  13. 마이애미 망명자들을 중심으로 한 미국 우익 언론에서는 많이 흘러나온 이야기지만 정작 쿠바의 정치범 문제를 성토해온 유엔 인권보고서에는 쿠바 혁명 이후 쿠바 내 무장항쟁에 대해서는 한 차례도 보고된 바 없다. 농촌집산화가 없었다면 농촌집산화에 반대한 무장봉기가 어떻게, 왜 일어났을까. 읽는 이가 판단하도록 하자.
  14. 2005년 이냐시오 라모네와의 인터뷰에서는 이런 본인의 긴 연설들이 상기되자 "조금 늦게 깨달은 것이지만, 말은 적게 하는 것이 좋다는 게 결론입니다."(...)라고 했다.
  15. 현대 한국사와 매우 매우 연관이 깊은 그 사람 맞다. 비아냥삼아서 대한민국의 진정한 국부라 불리는 사람이다. 내용은 모윤숙항목 참고바람.
  16. 다만 최근에는 이냐시오 라모네와의 인터뷰에서 "조금 늦게 깨달은 것이지만 말은 적게 하는 게 좋다"고 소회를 밝혔다.
  17. 그것도 플로리다에서 몇십km 떨어지지 않은 미국 앞마당!
  18. 뭐 1992년 쿠데타 시도를 비난하기도 했지만 이때는 직접 친분을 쌓기 이전이니 논외.
  19. 사실 말 자체는 맞는 말인데 사실 쿠바의 높은 의료수준이 외국인에게 한정된다는 얘기가 많고 교육도 별볼일없다는 얘기가 많지만 그럼에도 당대 여타 남미 국가들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수준인건 확실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이들 수는 계속해서 늘어나는데 비해서 당시 중남미의 경제사정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비례해서 교육예산은 못 늘렸기 때문이고 두번째로는 교육에 대해 무슨 투자를 하기 불가능한 사람들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대엔 교사들 월급도 제때 못주는 중남미 국가들이 한두곳이 아니었다. 거기다 IMF같은데서 사회복지예산을 축소하라 닥달하니 의료예산도 제대로 주기 힘들었다. 베네수엘라도 비슷하게 저유가와 외채문제로 인해 한창 경제가 힘들었을 시절이어서 교육예산을 늘리기 힘들고 저소득층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는걸 포기해버리니 교육이 막장화되었던 것이었다. 90년대 중후반 당시에 중등교육 이수율(고등교육 이수율이 아니라!)이 20%대에 불과했을 정도이니 말다한 셈이다. 즉, 당시 쿠바도 사정이 악화되기는 했지만 다른 중남미 국가들의 사회복지가 막장을 달리다보니 그나마 양반인 수준인 셈.
  20. 쿠바에서 사용하는 석유량의 두배 정도의 수준이다.
  21. 애초에 야당이 참여하는 선거가 치러지는 베네수엘라, 니카라과와 공산당 출마 인사와 일부 무소속만이 참여할수있는 선거만 치러지는 쿠바와는 체제가 다르다.
  22. 아버지가 얼마나 거구인지 카스트로와 키가 맏먹을 정도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