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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田神學大學校 (Daejeon Theological University)
대학 홈페이지
1 개요
대전광역시 대덕구 한남로 41에 위치한 장로교 신학대학교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계열이다.
한국 전쟁 후인 1954년에 황해도에서 월남해 대전에 정착한 기독교 목회자 김응순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다. 중부권에서 유일한 예장 통합 측 신학대이다. 교훈은 "참은 진리요/ 앎은 인식이요, 학문이다/ 삶은 생활이요, 경건이다"이다.
대전신학대학교는 학과는 신학과 하나뿐이다. 신학대학원도 같이 있다. 7층 건물에서 전부 강의를 듣지만 대학교 한층, 신대원 한층만 사용해도 충분해 교실이 남아도는 대학이다. 지하층엔 당구대시설과 헬스장, 탁구장,개인기도실등이 갖추어져 있다. 재학생과 교회관계자는 무료로 주차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 마주보는 곳에 한남대학교가 자리한다.(주차비가 비싸기로 유명하다)
근처 한남대 덕분에 장로교 통합측 7개 신학대학중에 유일하게 대학가의 낭만을 누릴 수 있는 대학이다.
더군다나 두 대학 모두 같은 장로교 통합측 재단이다.
이름을 줄일 경우 명칭이 대신대로 바뀐다.
교가는 유명한 시인 박두진 (혜산(兮山)) [朴斗鎭]선생이 작사 했다.
2 일화
초대 교장 이자익 목사는 김제 최고 갑부 조덕삼 장로의 머슴이었다.
그들의 일화는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미덕을 잘 보여준다.
전라도 지역에 선교하던 최의덕 선교사(L.B.Tate)는 김제지역의 거부 조덕삼을 만나 전도한다.
조덕삼은 자기 집에서 머슴살이하던 이자익을 전도하여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
두 사람은 1905년 함께 세례를 받고 곧 이어 함께 집사가 되고 영수가 되었다.
1907년 금산교회에 장로 선거가 있었다.
조덕삼은 김제의 최고 갑부였고, 교회를 지을 땅을 헌물하였고, 교회 재정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동네 많은 사람이 조덕삼의 머슴이었다. 나이도 조덕삼이 15살 많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자익은 경상도 마산 출신으로 외지인이었다.
조덕삼(1867~1919)은 41살이었고, 그의 집 머슴인 이자익(1882~1961)은 26살이었다.
17살 때부터 조덕삼의 집에서 머슴살이하던 이자익은 조덕삼의 선처로 결혼도 하고 함께 신앙생활도 하였다.
공교롭게도 둘은 장로 후보에 나서게 되었다. 모든 사람은 조덕삼이 장로가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투표결과는 의외였다. 이자익이 장로가 된 것이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신분을 뛰어넘고, 지역 차별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모두 당황하여 술렁거리기 시작할 때 조덕삼 영수는 일어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금산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더욱 교회를 잘 섬기겠습니다."
그건 그냥 인사치레의 말이 아니었다.
조덕삼은 죽을 때까지 이자익 장로를 지지하고 후원해주었다.
1909년 장로가 된 조덕삼은 이자익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할 때(1910~1915)도 모든 학자금과 생활비 일체를 다 지원하였다.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 목사를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하여 잘 받들어 섬겼다.
조덕삼 장로의 가정은 지금 삼대째 금산교회를 섬기고 있다.
3 연혁
- 1954년 대전야간신학교 개교 (초대 교장: 이자익)
- 1956년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지방신학교로 인준
- 1967년 대전성서학원 병합
- 1967년 주간 4년제로 개편
- 1974년 장로회신학대학 부설 신학교로 인준
- 1992년 장로회대전신학교로 인가
- 1996년 대전신학교로 개칭
- 1997년 졸업생의 신학사 자격 취득 인준
- 2003년 평생교육원 설립 인가
- 2009년 대전신학대학교로 승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