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코 전투

Battle of Duc Co

1 개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벌인 전투

베트남에 파병 후 미군의 파울리비아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캄보디아 국경으로 이동한 맹호 기갑연대 3대대 9중대는 1966년 8월9일 밤 10시 40분경 적 월맹군 2개대대의 공격을 받고, 새벽 4시쯤 격퇴에 성공한다.

기록에 따르면 적 사살 189명, 포로 6명, 61mm 박격포 5문, 중경기관총 11정, 개인화기 62정, 대전차 유탄포 12문, 기타 10여만발의 실탄을 노획. 아군 전사 6명, 부상 42명이었다.

당시 승리로 채명신 장군이 만든 중대전술기지 방어개념은 미국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2 한국군 상황

당시 중대장이던 이춘근이 보기엔 부대 내부에 문제점이 몇가지 있었다.

1)안전사고
그는 이것을 파병 병사들이 어쩔수 없이 부담지게 된 전쟁공포의 징후로 파악하였다.

2)여긴 적의 땅이다
그 현대화된 프랑스군도 박살났는데 우리의 지금 상황은 대체 무엇인가? 라는말. 그의 생각엔 부대의 화력이 적에 비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여긴 적이 먹고 사는 땅이었다.

그는 부대에 올라오고 2개월 후, 당장 전의부터 고양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싸우다가 죽으란건 비정한데다가 직접 현장 뛰어보니 말도 안되겠고, 살려면 싸워야하고 싸우려면 훈련해야한다는 분위기로 몰고간다. 안전사고를 막기위해 피 흘리는 일을 막으려면 기만없이 중대장 말을 따르라고 독려한다. 이후 몇 번의 작은 교전을 피해없이 마무리 짓는데 성공하며[1] 사기가 오른다.

2.1 전투전

2.1.1 전투지

본래 있던 곳이 아니다. 이들은 미국의 요청으로 캄보디아 국경주변 200m ~ 300m 두코 고지로 간다. 이 지역에는 산악 소수민족인 몬타나족과 약간의 월남 주민들이 살고있었다. 이들이 받은 명령은 광범위 지역에 전술기지를 펴고 적의 내륙침투를 저지하라는 것이었다.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미군과 함께 호치민 루트를 저지하는 것이었다. 한국군이 편 진지 근처 인근 8km 옆에 미군 전술기지가 있었다. 부대 진지 형태는 한가운데 고지 정상을 두고 원을 그리며 둘러진다. 채명신식 중대 전술기지 그대로였다.

그런데 기껏 목표지로 이동했더니 우기가 왔다. 결과적으로 진지 안 어디서나 진지와 교통호를 매일 보수하는 삽질 소리가 울려퍼지게 된다.[2]

더군다나 오고나서 한달간 적을 보지 못했다. 거기에 비는 계속 오고 그에 따른 삽질은 허구헌날 계속되고 병사들 사기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2.2 전투

2.2.1 8월 8일

“적 사단사령부가 있다”는 정보가 내려온다. 따라서 중대가 전투정찰을 나간다.

그런데 적의 사단사령부가 있을거라는 곳의 접근로도 모른 채 후방에서 쏘아 올리는 포탄으로 방향유도를 받으면서 우기에 20km 정글 속의 행군을 1박 2일에 걸쳐서 감행하게 된다.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오게 되었다. 병사들 체력만 작살났다. 그리고 다음날 밤에 일어난 일로 당시 부대 관계자들은 이날의 행군을 위부터 아래까지 하나같이 까게 된다.

2.2.2 8월 9일

행군 후 8월 9일 오후 4시 30분에 진지에 복귀한다. 오자마자 위부터 아래까지 싹 뻗는다. 주변 경계를 할 때 잠복근무에 2개 소대를 항상 내보냈으나 피로가 심하다고 판단되어 2교대제로 교체한다.

22시 40분. 침체되어 있는 부대분위기에서 2소대 전방 청음조 앞 조명지뢰가 터진다. 그러나 육안으로 보았을 때 경계병은 아무것도 의심스러운 것을 발견치 못하였다. 미군 전차경계병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한다. 비상동원을 하려다가 짐승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어 일단 보류된다.

5분도 안 되어 청음조에서 전방 방향에서 땅 파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이것은 한 번 더 씹힌다. 중대장은 징후를 예의 관찰하라고 지시. 세 번째로 호를 파는 소리가 들린다는 보고가 온다. 그는 역시 같은 지시를 반복하는데 그치려다가[3] 미군 전차에 장치된 탐조등을 소리나는 방향으로 비추라고 지시하였다. 탐조등을 비추자마자 적이 보이고, 거기서 발포된 기관총탄이 진지로 쏟아졌다. 아군은 고개를 못 들고 머리위로 박격포가 떨어진다. 전투 시작이었다.

총소리가 나자마자 새벽 1시에 잠 자던 버릇 때문에 피로에 잠 못자고 헤메던 중대장을 포함한 몇 명이 튀어나가 직접 확인한다. 그들의 말로는 탐조등에는 4, 5열의 월맹군이 폭 50~60m 정도의 대열로 오고 있는게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직후 포병 지원을 받기위해 지휘벙커로 다 돌아가나 들어가자마자 적의 초탄이 떨어져 중대 지휘소 벙커에 구멍이 뚫린다. 월맹군은 아군 배치도를 진작부터 다 파악하고 있었고, 지휘부부터 날려버리려는 것이었다.[4] 이 벙커는 운좋게 구멍이 숭숭 뚫려도 전투 끝까지 버티기는 했지만 내부 인원중 피해 안 입은 인원은 없었다. 지휘부에 박격포가 떨어지고, 직후 부대 점령지역 전체에 박격포탄이 쏟아진다.

포격으로 1소대장, 2소대장이 중상으로 전투불능. 소대장중 3소대장만 건제하였다. 당시 중대 지휘부는 이때의 피해를 100명 남짓으로 판단하고 각자 자기위치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3분의 2의 병력을 잃어버렸으나 이대로는 안된다고 판단된 것이다. 하지만 실제 병사 분위기와 당시 전투가 가능한 병력은 좀 더 많았다.

아군 대대의 후방 지원포격이 40분간 떨어지고 월맹군의 박격포 세례도 좀 잠잠해진다. 처음에는 야간에 박격포 위치를 잡으라고 하는 등 대대에서도 당황하였으나 일단 때리고 나니 박격포 탄막은 일단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처음의 박격포와 함께 월맹군은 당연히 접근중이었다.

포위망은 박격포와 함께 구축되었고, 진지 전체에 박격포가 떨어지면서 포위망을 좁힌다. 처음에 공격을 받은 2소대는 초기 주 공격방향이 되어 인해전술의 파도를 말 그대로 다 쳐맞는다. 처음의 박격포와 함께 소대 대부분이 환자로 변했고, 아군 포병지원 40분동안 박격포와 함께 밀려드는 1파를 막아내고 포병 지원덕에 박격포 세례가 죽었다고 좋아했더니 인해전술이 계속 밀어닥친다. 그나마 막아낸건 초반 적이 포화를 갈길 때 2대의 미군 탱크의 캘리버 50기관총 사격 덕이었다. 전차병은 전차 밖에 있다가 총알 사이를 뚫고 탑승해 사격을 시작해 중화기를 날렸는데, 이 덕분에 소대 전체가 고개를 못 들다가 간신히 대응사격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탱크들은 제69전차대대 1중대 소속이었고, 이후 계속되는 전투간 조명을 서로 번갈아 키면서 화력지원을 계속한다.

당시 2소대의 화력은 전차 2대의 기관총, 경기관총 4정, 자동소총 2, 그리고 각개 병사가 발사 하는 M1소총이었다. 덤으로 2소대장은 박격포 포탄맞고 중상이었는데 머리, 복부, 팔에 맞았지만 여전히 호에 누워서 지휘중이었다.

시야가 불편했지만 대신 미군 탱크의 시야각에 한두 대가 더 들어가고 중화기가 더 배치된 1소대는 역시 1소대장이 박격포 세례에 중상. 허벅지와 오른 어깨에 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생존은 하고 독려도 했지만 전술지휘는 힘들었다. 거기에 선임하사가 전투 며칠 전에 귀국해서 지휘라인이 제대로 비어있었다. 1소대는 병사 개개인이 할 일 하는 것으로 버텨낸다. 2소대가 적의 주공을 받았기에 산발적인 발포가 있는게 다였다.

3소대는 지휘라인 멀쩡했다. 공격도 주공이 아닌지라 여기도 보이면 쏘는 수준이었다.

적의 박격포가 후방 지원으로 사그러들자 지휘부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하는데 어째 전투 1시간 넘게 2소대로만 적이 온다. 분명히 압도적인 병력차를 보고 있던 지휘부는 1소대 방면으로 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왜 안오는지 살짝 불안감에 싸이고, 거기에 2소대 후방지원하던 포병대는 탄 예비량이 충분치 않다는 말을 해 지휘부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2.2.3 8월 10일

공세는 계속되나 공격하는 강도가 좀 잠잠해지고 긴장감이 올라가는 사이 미 공군의 항공지원이 온다. 항공기 2대가 조명을 뿌리고 대대에선 10중대와 11중대를 급히 지원을 시킨다. 그런데 81mm 박격포 탄약고에 포가 떨어진다. 긴장하던 진지 전체가 경악하는데, 알고보니 미 포병대의 실수였다. 155mm 1발이 81mm 박격포 탄약고에 떨어졌다. 10cm만 오른쪽이었으면 탄약고가 통으로 사라질뻔 했다.

다행히 이후 포병대의 지원은 나름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이럴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게도 당시 지휘부에 있었던 한국군 관측장교가 큰 부상 없이 멀쩡하여 전투 활동이 가능했기에, 그 장교가 열심히 관측을 해댄 덕이었다.

당시 미 공군의 조명 지원은 귀중했다. 아군 박격포에서 발사되던 조명탄을 다 빼버리고 고폭탄으로 교체. 공군지원 타이밍이 부대가 보유한 조명탄이 떨어지기 코앞이었다. 야간에 조명이 사라지면 힘들 것은 자명.

산발적으로 밀려드는 병력은 아군 지원화력과 함께 하니 어떻게 커버가 되었고, 2소대 방면으로 오는 병력이 1소대로 오면 밀렸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2~3시 사이에 살짝 공격이 수그러 들었다. 그때까지 환자집단 2소대는 인해전술 파도를 4번을 버틴다. 4시쯤 5파째를 막아내던 2소대 방면 철조망이 뚫리고 적이 돌격을 시도한다. 지휘부는 아군에 인접하게 포격을 때려서라도 적을 분산시켜야 한다고 판단했고, 이후 진지와 전차 5m 앞에(!!) 60여발의 포가 떨어져 월맹군의 공세가 주춤해진다. 포격이 끝나자마자 2소대는 돌진해 백병전으로 밀어붙인다.

5파째 돌격을 막고 간간히 있는 소화기 사격도 6시에 그친다. 후에 5파의 인해전술이 실패하자 월맹군이 후퇴하면서 그것을 가리기 위해 소화기를 쏜 것으로 알려졌다.

전투 끝나고 11중대 예비대가 2소대 옆에 지원을 와서 커버를 한다. 전진하면서 부상병을 생포 혹은 사살하다가 진지 안에 있던 전차 2대를 앞세워 잔당을 밀어버린다.

2.3 화기

당시 부대의 주무기는 M1 개런드. 적은 AKM[5]을 들고 왔던 터라 당시 한국군의 보병 화력은 적에 비해서는 뒤쳐졌다. 중화기로는 60mm 박격포, 81mm 박격포, 105mm 견인곡사포가 있었다. 그러나 적의 병력과 박격포 수량이 많아서 이 부분도 적에게 밀렸던 상황. 미군 전차가 4대가 지원을 왔기에 1소대 방면에 배치했으나 적의 주공은 2소대 방면으로 밀려들어서 전투 초기에는 전차들이 적의 주공 방향에 없었다. 그냥 총체적 난국.

2.4 월맹군의 상황

7월 9일에 청룡부대가 두코 고지에 온 후 1개월 동안 부대를 파악하였다. 계속 청룡부대를 공격목표로 찍어놓은 정찰대가 있었다는 말. 이들은 캄보디아 국경선에 있는 월맹 정규군의 내륙침투를 안내하는 일을 맡고 있는 정찰대로서 월맹으로부터 남하한 월맹군 제88연대를 유도하여 공격일 밤 7시 30분에 집결하게 된다. 한국군을 패놓으려는 월맹군의 의지였다. 그리고 여기서 깨지고 짜빈동까지 개판나면서 한국군 공격을 꺼리게 된다.

적은 제88연대 제1대대와 제2대대의 2개 대대 병력 + 공병 1개 대대. 6배가 넘는 병력차였다. 최초 집결지에 박격포 진지를 만들고 주공격 목표를 미군 탱크와 중화기가 적은 제2소대로 잡았다. 시간이 되면 박격포의 탄막와 함께 제1소대와 제3소대의 세 방향에서 일제히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처음 월맹군을 발견하고 월맹군이 대응 사격을 할 때 제1소대와 제3소대 지역에는 적의 병력이 배치 완료되지 못하였다. 최초 계획했던 공격 개시시간은 부대가 잠이든 밤 3시경 ~ 여명이었고 그것이 초기에 청음조에 탐지되어 대판 꼬인 것이다.

결국 계획을 추진하지 못하고 발견된 2소대 지역으로 공격이 온 이유가 되었다. 1, 3 소대로 이동하던 월맹군은 지휘통신망도 두절된 상태였으며, 이들은 소총병에 의한 총격을 가하다가 후방에서 날아오는 포병 지원에 박살났다. 통신선을 박격포 진지에서 주공방향으로 가설하다가 제1소대와 제3소대 정면으로 끌고 나가는 도중에 공격을 받고 중단되었다. 주 지휘라인인 박격포 진지와 최전방 전선에 연락이 끊긴 것이다. 그리고 지휘없이 1, 3소대 라인으로 온 월맹군은 박살나게 된다.

만약 계획대로 월맹군이 1, 2, 3 소대방향 포위 배치를 끝내고 심야나 여명때 공격했으면 더 위험한 상황이 되었을 것이 당시 현장 지휘관들의 동일한 판단이다.

3 더 After

문제는 이긴 후였다. 지휘관들은 보복전을 염려했고, 예상대로 보복전이 터졌다. 5개월후 청룡부대 11중대가 적의 연대급 공격에 공격을 죽자사자 싸워 철퇴시킨다. 이것이 짜빈동 전투다.

4 이야깃거리

전투 후 중대장이 병사를 치하 하던중에 어느 병사가 말하길, '중대장님이 건 전투가 아닌 적들이 건 전투이기에 그들이 용감하게 싸운것이다' 라고 했다고 한다.[6]

집계해보니 부상자와 사망자가 적었다. 소대에서는 인원 부풀려서라도 포 지원 하나라도 더 받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3개 소대가 죄다 박격포 세례를 맞아버려서 소용없었다.

2소대 전방 기관총 한정은 일만발이 넘는 총을 발사했다.

당시 월맹군은 후퇴하더라도 시신은 챙겨가곤 했는데, 두코 전투에서는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을 정도로 박살난다.

5파 이전에도 철조망이 뚫려 총검으로 이들을 제거한 것이 전투 중 몇 건 있다.
  1. '작은 교전'은 푸캇산 공략전을 말한다. 이후에도 마을 나갔다가 2m 앞에서 운좋게 총맞을 뻔했다가 살아남은 병사가 되려 저격수를 제압하기도 하는 등, 부대주변이 조용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2. 오죽하면 8월 6일에는 미군의 워커 장군(제25사단 제3여단장)이 당 중대를 방문하여 (해야하는) 수색정찰은 소홀히 하고 할 일이 없으니까 진지구축이나 하고 있다고 찝어주고 간다. 그런데 어쩌라고. 하루라도 삽질 안하면 호가 무너지고 거기에 잘 때 비가 들이치는데!
  3. 왜냐면 시야가 좋은 2소대 방향보다 시야가 안 좋은 1소대 방향으로 올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소대 방향으로 미군 전차 3대가 배치되었다.
  4. 월맹군들은 부대 배치도 말고도 전날 이들이 정글로 행군에 '피로가 쩌는 것도 알고 있었다.
  5. 실은 중국제 56식 소총
  6. 이전은 간부와 병사간 불화가 있는것 처럼 적었지만 이 위키가 주로 인용한 이춘근 중대장의 증언내용을 보면 초기 폭격으로 지휘소가 박살나고 소대장들이 부상으로 정상적으로 지휘가 불가능 한 상태에서도 병사들 스스로 맡은 소임을 다하고 결사항전한것을 승리의 주요 요인으로 삼고 있으며 중대장은 이 때문에 전사자 및 부상자가 더 많이 생긴건 아닐까하고 자책하고 있는데 병사는 아마 자책하는 중대장을 위로하기 위해 한 말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