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명신(蔡命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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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1월 27일 ~ 2013년 11월 25일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
기간 | 1948년 ~ 1972년 | |
임관 | 육사 5기[1] | |
최종계급 | 중장 | |
최종보직 | 제2군사령관 | |
주요보직 | 주월 한국군 총사령관 |
대한민국의 군인.
1926년 11월 27일 ~ 2013년 11월 25일
대한민국 육군의 제2작전사령관 | ||||
11대 한신 | → | 12대 채명신 | → | 13대 박원근 |
목차
1 소개
대한민국 국군 장성으로 베트남전 당시 파월 한국군 사령관으로 유명하다. 우측의 사진도 파월군 사령관시절의 모습이다. 비교적 덜 알려져 있긴 한데, 사실 한국전쟁 당시 '백골병단'이라고 불리는 게릴라부대를 이끌고 북한군 점령지를 돌며 후방교란을 펼쳐 굉장한 전과들을 다수 올린다. 이때의 전공과 경험들은 국군 전사 연구나 실전 사례 교육에서 상당히 비중이 높게 다뤄지고 있다.
2 월남과 임관까지
본래 황해도 곡산군 출신으로, 평양 인근에서 교사로 지내다가[2] 해방 이후 월남했으며 국방 경비대 시절부터 이런 저런 전역을 전전하였다. 조선경비사관학교 5기로 학교에서도 성적이 우수했는데 배출되고 나서 간 첫 부임지가 바로 제주도 9연대였다.[3] 그러한 탓에 제주 4.3 사건를 경험했고 비정규전에 대해서 경험함으로서 그가 훗날 한국전쟁에서의 백골병단의 지휘를 하게되는 경험을 쌓게 된다. 당시 제주 4.3사건때 채명신 소위는 공산좌익계열이었던 경비대 내부 적들과 싸우면서 이들을 전향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한 바 있다.[4] 이러한 노력은 베트남전 한국군의 성공적인 기본 민사전략에 그대로 반영되기도 한다.
3 주요 경력
3.1 한국전쟁
6.25 전쟁중인 1950년 12월 이후 중공군 개입으로 부대가 와해되었을 때[5]생존자들과 국군복을 입은 상태에서 압록강에서 강화도까지 도보로 탈출했다. 도중에 북괴 주민들에게 들켰을땐 "남조선 군복을 입고 특작 중인 인민군"이라고 둘러댔다고 한다. 이후 민간인 집에서 숨어서 자다가 괴뢰군에게 포위되자 권총으로 자살하려고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이 난다. 그래서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고쳐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신생 비정규부대인 백골병단의 사령관으로 배속, 현재 공개된 정보에 의하면 당시 채명신은 의심을 받고 있었다. 북진 이후 산산조각난 파편 중 하나로 터덜터덜 내려온데다가 같이 있던 연대장도 잃어버리고 온 상황이었다.[6] 그래서 백골병단 지휘관으로 부임시킨 것이다.
사실 백골병단 자체는 북한군의 침공 초기에 패색이 짙을 때 결성되었는데, 창설 요원들의 증언을 살펴보면 딱히 상부에서도 뭘 기대하고 만든 것보단 그냥 소모품 정도로 생각한 것 같다. 부대원들 대부분은 북한출신 반공청년과 피란민들로, 군대 경험을 가진 사람은 지휘관인 채명신 대위(당시)뿐이었다.[7] 그러나 북한군 역시 대침투작전이나 게릴라전에 대한 노하우가 적어도 당시에는 나름대로 있었지만 때가 때인지라, 정규전에 집중하느라 거의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다. 그로 인해 이들은 영화와 같은 수많은 활약상을 남겼다.[8]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대대규모의 적과 마주쳤는데 북한군 행세를 하며 무사히 지나치거나, 역시 북한군 행세를 하고 접근한 뒤 장교를 포로로 잡는 등 영화에서 나왔어도 말이 안 된다고 치부할 전과들이 많다. 이들의 규모가 많아야 수십명이었던 데다 보통 이런 임무는 거의 자살공격 수준에 가깝다는걸 생각해 볼 때, 이 전과들은 지휘관인 채명신 장군의 지휘에 힘입은 바가 크다.
자서전을 보면 이때의 신앙간증 관련 이야기나 모험담도 나름대로 재밌다. 한국전쟁 후에는 소장으로 진급한다.
다만 백골병단에서는 그렇게 생각 안한 듯. <육군 본부 직할 결사대 60년사 (백골병단)>라는 백골병단 출신자가 쓴 책에 의하면,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에서 북으로 넘어가기 위해 출정식을 할 때 인민영웅 신성모 국방장관과 유엔사령부에서 큰 기대를 하고 있다는 메세지가 전해져 왔고, 국방부 장관 일반명령으로 출정을 하게 되었다. 또한 출정식에서 육해공군 총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장군이 직접 와서 가짜 인민군 장교 계급장과 하사관 계급장을 달아주며 "지금 여러분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국군 최초의 유격부대로 유엔군 사령관도 여러분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모두 돌아올 수는 없겠지만 만일 살아돌아오기만 한다면 여러분의 계급은 지금 그대로 현역 계급으로 전환하는 한편 1계급 또는 2계급 승진시킬 것을 약속합니다."라고 구라를 쳤다 말했다. 그런데 이들 결사 11연대 300명이 사선을 넘고 돌아와보니 그런 거 없었다. 심지어 이들은 군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징집영장까지 날아오는 상황. 이들이 받은 계급장은 다 가짜였고 게릴라 군번인 GO 역시 허상에 불과하였다. 이때문에 열받아서 지난 60년동안 명예 회복을 해달라고 아직까지 소송을 제기하고 있다. 위의 책도 최고 수뇌부를 향해 적나라한 욕설을 퍼붓고 있다. 그러면서 당시 지휘관였던 채명신 중령은 자신들을 도와주려고 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똑같은 장교들이니 채명신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써 놓았다. 채명신의 책에서는 이분들의 명예 회복이 안되어 아쉽다고 짧게 기재되어 있다.
3.2 5.16 군사정변
5.16 군사정변 주역 중 하나이며 정변 초기 5인 위원회 위원 중 1인이다. 실제로 5.16 당시 전방을 지키던 5사단장이었으면서 1개 연대를 빼서 서울에 입성한다. 본인 회고록에 의하면 제2공화국 이후 혼란이 거듭되며 엉터리 기자들의 횡포와 각종 민원에 시달려서 쿠데타에 참가했다고 하지만... 사실 북한 출신들이 갖고 있던 2공화국 시절 적화에 대한 공포가 주 원인일 것이다.[9]
회고록에 의하면 자신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갈라서게 된 이유는 유신 헌법에 반대하고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대한 직언과 비판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을 대장 진급 실패의 이유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으며 실제 대외적으로도 3선 독재를 비난했기에 강제 예편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10] 여담으로 장준하와 가장 친했으며 사병들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며 칭찬하였다.
사회가 안정되면 민간인에게 정치를 맡기고 군에 복귀하겠다는 약속을 어긴 다른 5.16참여군인들과 달리 채명신은 끝까지 군인으로 남았다. 중장으로 예편된 후에는 당시 예편 장성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외교관으로 부임하였다.
어찌되었든 5.16 쿠데타에 참여했다는것은 사실이지만 나중에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반대했다는 것때문에 후대에 평가가 어떻게 내려질지 궁금하다
3.3 베트남 전쟁
월남 파병이 결정되면서 게릴라 부대 지휘관으로 이런 종류의 전쟁에 경험이 많은 적임자로 판단되어 파월 한국군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의 증언에 따르면 역시나 적절한 인사였다고. 사상 최초의 한국군의 해외 파병이었는데, 제 코가 석자인데다 한국군 전투력에 의문이 많던 미군 지휘부와의 담판에서 많은 양보를 얻어내어 한국군 복지 지원 확보, 전투장비 신형으로 교체, 지휘권 확보 등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 베트남 전쟁 전후를 다룬 책 '베트남 전쟁과 나'가 있다.
3.3.1 한국군 전용 레이션 개발 요구
군수지원에 관해 미군 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 대장과 이야기를 하려 했으나, 한국군 지휘관이자 장군인 그와 대화를 하기 위해 온 것은 어느 대령이었다. 회의의 전반적인 내용은 미군들의 입장은 "한국군에게 2차 대전때 쓰던 무기를 지원하고, 전투식량과 군수지원은 전부 미국 것을 주겠다", 한국군은 "말도 안된다, 무기를 너네 현용을 주고 먹는거랑 군수지원은 우리걸 써야할거 아냐. 우리가 스테이크 썰고 다니게 생겼냐?"라는 내용이었다.[11]
실제로 전투식량의 경우, 당시 미군은 A, B, C 레이션으로 전투식량이 3가지로 나뉘었는데 그중 C 레이션은 야전에서 바로 먹을수 있는 깡통 위주. B 레이션은 그보다는 좀더 여유있는 상황에서 먹을 수 있게 된 거, 그리고 A 레이션은 식당 등에서 취사도구를 갖고 요리하게 되어있는 용도였다. 그런데 미군은 자기네들이 요긴하게 쓰는 C와 B는 주지 않고 A 레이션으로 닥치고 통일해서 지급(...)하려는 식이었다. 결국 C 레이션도 받게 되긴 했지만, 처음엔 이러한 미국 전투식량을 받고 장병들이 잘 먹었으나 장병들이 미국 음식과 계속 잘 맞을 수가 없었고 잇따른 장병들의 요구에 한국군 장교들은 한국의 식생활에 대해 설명하여 처음엔 베트남 쌀을 지급받았으나 이걸로도 모든 해결은 불가해 결국 한국군용 전투식량을 따로 개발하여 보급받는 것으로 하였다. 널리 퍼져있는 설인 K레이션을 미국이 구입 후 보급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미국의 법에 미국의 잉여 농산물을 받는 국가에선 식량을 구매할 수 없다는 법이 있었는데 이 법 때문에 원하던 미국이 현금을 지급해 구입하는 방식이 아닌 물물교환 형식으로 타결할 수밖에 없었다고 채명신 회고록에 기술되어 있다.
또한 처음 보급받을 예정이었던 전투식량은 본래 일본에서 생산한 제품이었는데, 이를 사전에 안 한국군에서는 일제 전투식량을 먹을 수 없다고 주장했고, 결국 통조림 제조 기술을 들여와서 한국에서 제조한 전투식량을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때 채명신 회고록에서는 시식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부하 장병들과 채명신이 미리 입을 맞춘 뒤 맛이 이상하다며 시식장을 엎어버려셔 한국산 전투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고 나온다. 회고록이 회고록이니만큼 표현을 좀 과장한 것이라고 이해하자.
3.3.2 M16 소총 요구
회의 중에 미군 대령은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쓰던 M1 개런드 소총을 칭찬하면서 '이 총은 2차 세계대전 때 정글에서 일본군을 물리친 총이니 베트남에서도 한국군에게 적절할거요'라고 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M16, M14는 자국군이 써야 되고, 카빈은 이미 남베트남군과 특수부대에 죄다 나눠줘버려서 없는 바람에 창고를 가득 채운 M1이나 주려던 시도였다. 이에 채명신 장군이 응수하여 '내가 6.25 때 북한군한테 붙잡힐 뻔한 적이 여러번 있었는데 그 때마다 자동사격이 되는 카빈소총 덕분에 살았다. 정글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대부분 근접전일텐데 M1 같이 크고 자동사격도 안 되는 총을 어디다 쓰냐'라고 반박했다. 국군 파병 전에 당시 유엔군 사령관에게 M2 카빈을 요구차 2차 세계대전 이후 교전거리의 변화와 사상자의 비율수 통계 등을 들고는 설득시켰다.[12] 그 덕에 자동화기 비율이 점차 늘어가다가 몇년 후에는 주월 한국군 전부가 M16과 M60으로 무장하게 된다.
3.3.2.1 독립 지휘권 획득
미군은 한국군이 숫자가 적고 보급과 수당 등을 이유로[13] 자기네 지휘권 밑으로 들어오는 게 맞다고 처음부터 계속해서 지휘권을 확보하려 했으나[14], 당시 게릴라전에 대해 이해도 거의 없고 맨땅에 헤딩하던 미군인 만큼 한국군도 다같이 맨땅에 헤딩하는 상황이 뻔한지라 거부하였고, 결국 이후 거듭되는 한국군의 활약으로 한국군의 자체적인 지휘권을 계속 인정받는 결과를 만들었다. 처음에 미군은 '우리들이 싸우는 방식 그대로 우리와 함께 싸우자는 것인데 뭐가 문제인가.'라고 강력한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그 방식이 문제야 게다가 한국군이 처음 왔을때 싸울 생각은 않고 매일 주둔지에서 훈련과 경계만 해서 주월미군사령부 예하 미군 장성들이 "한국군을 우리가 지휘할 수 없다면 지휘할 수 있을 때까지 전투활동을 중단하겠다."라고 들고일어나기까지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채명신은 웨스트모어랜드 주월미군사령관에게 부탁해 주월미군 장성들을 모두 모아 브리핑장에서 브리핑을 하며 설득해 결국 모든 미군 장성들을 회유하는데 성공한다.[15]
3.3.3 베트남 현지민 보호정책
채명신은 미군이 등한시하던 대민지원과 현지 민심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같은 유교 문화권인데다 동양인이라는 점, 한국전쟁으로 인해 베트남인들과 비슷한 상황을 경험해본 점 등으로 이 부분에서도 큰 성과를 거둔다.[16] 미군은 이러한 대민정책을 군이 할 수 없고 민간 단체가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는데 미국스러운 원조방식으로 그냥 트럭에 쌀을 갖고와서 마을에 던져놓고 가기 일쑤였는데 베트남 주민들은 이에 대해 '우리 쌀 뺏어가서 자기들이 인심 쓴다.'고 불평을 하였다. 반해 한국군은 쌀이 모자라는 집집마다 전투병들이 직접 찾아가 쌀을 원조해주고 얼마나 부족하느냐, 다음에 또 오겠다 라는 말도 해 베트남 주민들의 마음에 더 와닿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런 부드러운 방식과 더불어 베트콩이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촌락은 완전히 포위해놓고 경고 방송과 경고 포격을 하고 몇날 며칠이 걸리던간에 계속하는 물샐 틈 없는 포위로 도주자를 차단, 도전의지를 아예 꺾어놓았다. 이런 당근과 채찍의 병용으로 투항 베트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3.3.4 교민 보호
대민지원과 같이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과 교민들의 보호에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썼다. 한국 기업에 경비 인원을 배치해 주는가 하면 현지에서 전역을 하게되는 장병의 해외 기업[17] 취업을 알선했다.[18] 한국군의 활약이 계속되며 이름값이 올라가 한국 내에서 취업하는 것의 최소 3배의 수당을 받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해외 기업의 러브콜이 계속되자 원래는 당장 내일 모레 전역하는 장병들만 취업이 되었는데 인원이 모자라 전역이 3개월까지 남은 장병들도 바로 취업을 시켰다고.
2개 사단 규모인 한국군을 쪼개 중대 규모로 화력기지인 중대전술기지를 여러개 건설하여 베트남 마을들을 보호하는 형태로 배치하였는데, 미군은 이를 두고 각개격파당할 수 있다고 걱정했다.[19] 그러나 사실 이 배치는 채명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으로, 각 기지는 어느 방향에서도 중기관총과 무반동총의 자체 중화기 사격을 집중시켜 방어에 임할 수 있고, 각각의 기지는 105mm 견인곡사포대의 사거리 안에 지어져 있어 더 큰 규모의 적이 공격해오면 포병사격으로 지원이 가능했다.[20] 중대전술기지의 방어력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전투가 짜빈동 전투로, 해병대 1개 중대 병력으로 북베트남군[21][22] 2개 연대를 상대로 백병전에 진내사격까지 강행하는 혈투 끝에 단 1개 중대가 진지 방어에 성공했다.이 진영은 매우 적절했다고 판단되어 한국군의 'Tactical Base - 전술기지'를 미국에서도 'Fire Base - 화력기지'라는 명칭으로 많이 참고했고 미군은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때도 이 전술을 사용하고 있다.Wikipedia 반대로 이 기지가 적에게 넘어갔을 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짜빈박 전투가 증명하고 있다. 그야말로 대참사.
3.4 중장 예편
베트남전 중이던 1966년 7월 20일 중장으로 진급한 채명신. 왼쪽에 계급장을 달아주는 인물이 당시 대통령 박정희이다. 날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처음 파월 때는 소장으로 간 것이었다.[23]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정권연장에 대한 박대통령과의 의견차이로 결국 대장 진급은 못하고 1972년 5월 30일 중장으로 예편한다. 하지만 이후 외교관으로 재임용되어 국외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중장 예편자의 외교관 재고용에 대해 당시 군부가 반발했으나 신망이 높은 사람을 놔둘 수 없다고 둘러댔다고 한다. 왜 신망 높은 사람을 안 쓴거야? 군부가 반발한 것은 채용한 건 좋은데 급이 맞지 않았기 때문.(...)[24]
파일:Attachment/chai.jpg
1991년 당시 한국군 관할지역의 베트콩 사령관이었던 쩐박당 장군이 방한한 후 채명신 장군과 화해의 악수를 하는 훈훈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3.5 2013년 별세, 그리고 전설로
서울 현충원 사병 묘역에 안장된 채명신 중장의 묘소. 묘지번호 34489. |
"나를 파월 장병이 묻혀 있는 묘역에 묻어달라."는 유언[26] 에 따라 채명신 장군이 월남 파병 용사들의 추모 행사를 해왔던 국립서울현충원의 2번 사병 묘역에 묻히게 되었다. 본래 서울 현충원은 부지 문제로 더 이상 안장을 하지 않고 대전현충원에 안장하며, 다만 서울현충원행을 희망할 경우 화장하여 매장하지 않고 충혼당이라는 납골당 건물 안에 유골함을 봉안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나, 여러 특혜가 보장되는 장군 묘역[27] 안장을 포기한 점을 감안해 특례를 인정받았다.
국방부 관계자들은 채명신 장군이 글로벌 네임드이므로 장군 묘역에 안장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또 자식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채명신 장군의 부인이 들어갈 자리가 없을까봐 반대를 했지만[28] 고인의 말을 무시 하냐는 지적과 유가족이 고인의 유언을 지켜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하며, 20년이상 함께한 배우자는 합장이 가능하다는 말에 자식들도 사병묘역에 안장하는 것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국방부 관계자는 "장군이 자기 신분을 낮춰 사병 묘역에 안장되길 희망한 것은 현충원 설립 사상 최초"라면서 "숭고한 고인의 뜻을 받들어 서울현충원 사병 묘역에 안장하는 방안을 확정했다"고 전했다.
4 트리비아
장준하를 대단히 존경했다고 한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 분이 대통령에 출마한다면 맨발로 뛰어다니며 운동하고 싶은 심정”#이라고까지 표현했을 정도.[29]
그가 대장 진급을 하고 국방부 장관 크리를 탔으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30]
혼외자식 문제(친자확인 소송이 있었다)나 예편의 진짜 이유가 위에 언급된 유신 반대 때문이 아니라 베트남에서 축재를 너무 많이 해 부하들이 연판장을 돌려 예편하게 됐다는 증언(강창성 당시 보안사령관)이 있다. 하지만, 박태준 전 포항제철 회장의 경우처럼, 축재에 매우 유리한 환경에 있으면서도 선을 긋고 절제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군인으로써 명예를 지킬 수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제기된 의혹처럼 돈을 마구 쌓아놓았다면, 당장 부하들 앞에서 영이 제대로 서질 않게 되고 어떤 식으로든지 오명의 똥물이 튀기 마련이다. [1] 채명신 장군에 대한 다각적인 평은 오히려 강력한 권력 하에서 암투가 얼마나 치열하게 전개되는지 알 수 있는 일면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한국 군인이었던 만큼 안보문제에 한해서는 뼛속까지 우파였다. 하지만, 사선을 무수히 넘어 살아남은 사람답게 실용적인 사고가 몸에 배었기 때문에, 그 발언과 행적이 정도를 넘지 않았으며, 그 시대상에서 상식적으로 나올법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근본적으로 이 사람은 군인이다. 당시 숱한 지식인들도 우익이든, 좌익이든 이데올로기적으로 극단적인 시류에 넘어가 동포로서 서로에 대한 이해는 커녕 폭력의 순환에 적극 가담한 반면, 적어도 군인으로서 상대편을 이해 하지는 못할지어도 기본적인 국제법에 근거한 인도주의의 정신줄 자체를 놓지 않았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고평가할 요소이다.
일본의 밀리터리 작가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만화 Cat Shit One에 채명신의 뉴스위크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회고록에서 국군의 계급장 색깔이 하얀색이었던 것에서 검은색으로 바뀐 것에 대해[31] 검은색은 초상의 의미라고 하며 아쉬워 하였다. 채명신 본인의 경험상으로는 백색 계급장이 위험하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32] 그렇기에 베트남전 첫 브리핑때 미군 장성들이 백색 계급장을 검은색으로 바꾸는게 좋겠다는 제안도 거절하였다고 한다. 당장 한국전쟁 때도 장교들은 반창고를 오려서라도 지휘의 상징인 계급을 철모에 부착했다고 술회하나 대세는 어쩔 수 없었고... 회고록에서 그렇게 백색 계급장이 문제될 거라고 생각하면 땅에 침을 뱉어서 그걸로 백색 계급장에 문지르면 3초 안에 해결될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것으로 그친다.
현재까지 민간에 잘 알려진 유명 한국군 장성 중에서 가장 장병 복지에 신경 쓴 장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병사들을 자식처럼 생각하며 배려한 일화도 상당히 많은데, 그 대표적인 일화로, 베트남 전쟁 당시 그는 보병의 전투력은 발바닥에서 나온다는 철학을 가지고 베트남 기후 특성상 무덥고 매우 습하기 때문에 여름철이 되면 전 병력에게 아예 군화 벗고 맨발로 다니게 하라는 지시도 했다고 한다. 시찰 도중, 병사들의 발바닥과 발가락을 일일이 손가락으로 만져보며 무좀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한 후 3분의 2가 넘는 병사가 무좀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확인하자, 모든 작전을 중단하고 병력들을 휴양소에 들어가게 하여 해변가 백사장을 맨발로 걷게하며 무좀을 치료케 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매일 저녁 취침하기 전, 병사들의 발을 반드시 씻게 하여 발에 냄새가 나지 않도록 지시했는데 병사의 발냄새가 심하면 아예 그 부대 중대장의 종아리를 쳤다고 할 정도였다. 무좀 방지와, 그 발냄새에 꼬인 모기들을 막아 혹시 모를 말라리아 확산으로 인한 전투력 손실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그의 생각이었다고. 결국 참전 부대가 발병부대가 되지 않도록 병사들의 사기를 높여 전투력을 올리게끔 한 그의 특유의 지휘철학이었던 셈. # # 그의 일화들 참조
이 외에도 파병 결정 후 여의도에서 퍼레이드를 하고 바로 출발할 예정이었던 장병들의 면회를 허용해달라고 국방부와 육군본부에 강력히 요청해 허가를 얻었다. 상부에선 면회를 허용하면 장병들의 사기에 악영향이 올 것이라고 반대했지만 채명신은 오히려 면회를 허용해주면 가족들의 축복 속에 전선으로 향할 수 있다고 믿었다. 채명신의 강력한 요구에 결국 육군본부의 허가를 얻었고 채명신은 여기에 더해 당시 완전히 허허벌판이던 여의도에 공병대를 동원해 간단한 간이 면회장소를 만들었다.[33][34] 당연히 장병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면회에 감격했다.
위의 중대전술기지와 M16 소총 요구, K 레이션 요구 등은 모두 채명신이 장병들을 각별히 여겼기 때문에 한 행동들이었다. 당시 대다수의 지휘관들은 이런 것을 아예 신경쓰지 않았다. 당장 파월 직전에 국방부와 미군의 협의가 있었을 때 어떤 장성이 "한국군이 미군의 지휘를 받는것은 영광이다."고까지 한 적이 있다. 만약 채명신이 지휘관이 아니었다면 파월 한국군은 미군과 그대로, 똑같은 작전으로 나갔을 것이고 미군의 문제점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이 외에도 국군이 미군에 대해 떠받들다시피 하는 풍습을 바꾼 바 있다. 당시엔 아직 미군 고문관이 있었을 때였는데 지프를 타면 원래는 상급자가 조수석에 선탑하고 하급자가 뒷칸에 후탑하여야 하나 국군 장성이 미군 고문관과 타면 대령인 미군 고문관은 조수석에, 중장인 국군 제1야전군사령관은 뒷좌석에 앉았다. 채명신은 이에 대해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견지하였고 자신이 지휘관으로 있었던 베트남전에선 이같은 풍습을 근절시켰다. 채명신 자신이 이렇게 하니 한국에서도 이러한 풍습이 서서히 없어졌다고.[35]
파병 극초기에 처음으로 마련된 한-미-월남 합동 작전회의 때 기묘한 경험을 한 바 있다. 3개국 장성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별 시답잖은 얘기를 하다 회의는 금방 끝났고, 월남 장성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나가버렸다. 어리둥절해 하는 채명신을 미군 장성이 다른 방으로 안내해 뜻밖의 얘기를 했다.그 미군 장군은 "그들(월남군)에게 하는 얘기는 곧바로 베트콩으로 들어가며 이 때문에 미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는 얘기를 했고, 채명신이 안내된 다른 방에서 진짜 작전회의가 열렸다. 채명신 자신은 이 때 '우리가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복잡했다고.
4.1 백골병단에 대해
백골병단 관련 이야기는 70년대 국방부에서 나왔는데 이화여전 출신의 월북 여군관을 구해주었다[36]든가 빨치산 두목 길원팔이 데리고 있는 아이를 구해서 양아들로 삼았다는 등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채장군의 회고록에는 없는 이야기[37]
다만, 사후 보도에 의하면 길원팔이 데리고 다니던 고아를 동생으로 입적시켰다고 한다. 친동생은 한국전쟁 중 전사하여 입적시킨 동생이 유일한 형제가 되었고 서울대를 나와 교수가 된 후 은퇴하였다고 한다.
4.2 국민일보에 연재된 회고록
회고록은 국민일보에 잠시 연재한 버전은 업계의 특성상 신앙 간증. 나중에 매일경제에 연재한 부분은 5.16 직후까지 그리고 있다. 조금 자기 자랑이 심하지만 가끔 나오는 취중진담식의 이야기는 훈훈한 편.
4.3 베트남 참전담
베트남전 사령관으로 임명된 후에 이야기는 한국과 베트남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비사...이런건 아니고 딱 예상할만한 이야기들이지만 실제 참가한 사람으로서의 재미와 고증은 보장할 만 하다. 다만 회고록 집필 당시가 당시인지라 강정구나 구수정[38] 대한 개인적인 섭섭함이 드러난다.
4.4 백선엽 장군 명예원수 추대 반대
백선엽 장군이 명예원수 추대에 대해 논란이 있을 때 채명신 장군은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박경석 장군이 '백선엽 장군이 명예원수에 추대된다'고 하자 "큰일 낼 사람들이군.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의식이 희박한지 모를 일이오. 건국 이후의 첫 명예원수 추대는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이 매우 중요하오. 만약 일본군, 만주군 출신에다 독립군 토벌작전의 지휘관 경력자가 명예원수로 추대된다면 우리나라 건국사와 국군사는 하루아침에 북한 역사관에 종속될 거요."라며 강하게 반대했다.[39]
명예원수 추대로 인해 박경석 장군은 인사복지실장에게 국제적인 시각에서 보는 명예원수 추대 불가 이유를 확인하도록 채명신 장군을 만날 것을 권유하였고 채명신 장군 본인도 인사복지실장을 만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후 인사복지실장은 채명신 장군과 대담 후 확신을 가지고 김태영 장관에게 백선엽 장군의 명예원수 추대의 불가능함에 대해 최종 보고하였다. 결국 명예원수 추대는 즉흥적이고 단순한 헤프닝으로 끝나버렸다. 이후 박경석 장군이 말하길, 명예원수 추대를 무효화시킨 이 일은 채명신 장군이 조국에 바친 마지막 봉사라 한다.[40]- ↑ 정확히 말하면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
- ↑ 이때 김책과 김일성을 직접 대면한 적이 있다고한다.
- ↑ 당시 육사에서 제주로 간다는 것은 거의 유배나 다름없다고 생각되고 있었는데 성적이 우수한 자신이 제주에 가게되어 굉장히 실망했다고 회고록에 기술되어 있다.
- ↑ 회고록에서 처음 부임했을 때 소대장, 다시말해 채명신 자신을 보는 소대원들의 눈빛은 호기심의 눈빛이 아닌 증오심의 눈빛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 ↑ 당시 채명신 장군은 소령계급으로 8사단 21연대의 휘하 보병대대장으로 한국군 2군단의 최전선에 있었는데 탈출기의 시작은.. 적군의 후방침투로 연대본부와 인접대대가 포위되어 구출에 나섰다.
- ↑ 여기에 채명신이 북한 출신이라서 의심이 한층 강했다고 한다.
- ↑ 다만 국군 경험 한정. 기록을 보면 채명신은 300명중에서 일본군 학병 출신이나 전투경찰 경험이 있는 자들 100명만 추렸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는 몽땅 보내라고 명령했다고.
- ↑ 전쟁전 남한의 북파 유격대인 호림부대를 격멸한 경우를 보면 북한의 대게릴라 전술도 꽤 유능한 편이었긴 하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달랐다.
- ↑ 채명신의 동기인 육사 5기와 선임 기수인 4기엔 월남한 북한 출신들이 상당했다.
- ↑ 회고록에 따르면 개인적으로는 돈독한 사이였으며 3선 개헌을 앞두고 그를 불러서 의견을 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5.16때 동기인 김재춘, 문재준, 박치옥과 함께 거사에 동참했고 강제예편당했음에도 박정희는 개인적인 호감땜에 외교관으로 계속 기용할 정도였다.
- ↑ 당시 김용휴 준장이 남긴 유명한 발언이 있다. "지금 정글 속을 헤치고 다닐 전투병 보고 등에 갈비짝을 지고 다니란 말이오?"
- ↑ 이 덕분에 유엔군 사령관이 뒤질 수 있는 모든 곳을 뒤져서라도 M2 카빈을 지급한다고까지 했으나 이미 오래되어 폐기 처분에 들어간 물건이라 본토까지 털어도 물량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일단 다 긁어모아서 분대당 2~3정까지 지급했다고.
- ↑ 그도 그럴것이 파병 한국군의 모든 보급과 장병 수당은 미국이 지불하고 있었다.
- ↑ 채명신이 미군이 마련한 첫 브리핑을 받을 시엔 아예 처음부터 주월 한국군은 주월미군의 예하 부대로 편제되어 있었다고 한다.
- ↑ 물론 브리핑은 채명신이 직접 영어로 진행했고 이 와중 채명신에게 쏟아진 비난조의 질문도 모두 채명신이 직접 영어로 설명했다고 한다.
- ↑ 옛 KBS 인터뷰에서 "베트콩 100명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무고한 양민 1명을 꼭 지켜야 한다" 고 언급.
- ↑ 주로 미국 기업
- ↑ 당연히 국방부와 육군본부의 허가를 받은 일이었으며 당시 대통령인 박정희도 그의 구상을 적극 지지한다고 친서까지 보냈다.
- ↑ 미군 뿐 아니라 처음엔 한국군 장교들도 이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미군이 대대급 작전을 주로 펼치고 있어서 자신들도 그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중대급으로 쪼개놓으니 이해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당장 채명신도 첫 작전회의 때 이를 이해한 지휘관은 한 명도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 ↑ 가장 중요한 것이 이 포병화력 지원으로 채명신 자신은 포병화력이 닿지 못한다면 애초에 중대전술기지를 지어선 안된다고까지 단언할 정도였다.
- ↑ 베트콩이 아닌 정규군!!
- ↑ 한국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던 곳은 미 해병대와 같이 월맹과 월남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던 곳이었다. 이래서 북베트남 정규군의 공격을 받을 수 있었던 것.
- ↑ 왼쪽 가슴 포켓 위에 있는 휘장은 태권도 단장이다.
- ↑ 당시 군 출신 외교관들은 대부분 일본육군사관학교라던지 중국 황푸군관학교 등 인맥이 있는 사람들이 대장 예편후 임용된 사람들이었는데 채명신은 이러한 인맥이 없는 그냥 육사 출신이었던 데다 중장 예편자라 그런 것이다.
- ↑ 이보다 50여일 앞선 그해 10월 초에는 베트남전쟁 당시 북베트남 국방장관이었던 베트남 육군원수 보응우옌잡 장군이 타계했다.
- ↑ 이 유언이 상당히 오래된 일이라고 한다. 월남 사령관을 지내면서 많은 군인들이 5천여 명 넘게 전사했다고 한다. 항상 마음 아파하고 자신만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에 대해서 속상해 했다고 하며, 서울현충원을 찾아 부하 사병들의 묘비를 붙잡고 통곡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내가 죽으면 그기에 묻혀야 되겠다. 그렇게 결심하게 된 것이다"라고 했다. 원래 국방부가 법률상 난색을 표했으나 유가족들이 청와대에 편지를 보내게 되면서 청와대가 나서서 사병 묘역 안장을 추진했고, 돌아가신 분의 유지를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박근혜 대통령 말에 따라 채명신 장군의 빈소를 찾은 당시 김관진 국방부 장관이 국방부와 대통령.청와대의 결정에 따라서 사병 묘역 안장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유가족들에게 전달 했다고 한다.
- ↑ 장군 묘역의 넓이는 26.4제곱미터, 대령 이하 군인의 묘역은 3.3제곱미터로 8배나 차이가 난다. 무엇보다 장군 묘역은 화장 없이 매장을 할 수 있고, 그 이하는 화장을 해야 한다. 미국이나 영국은 신분 불문하고 모두 4.95제곱미터로 크기가 똑같다.
- ↑ 한국의 국립묘지는 사병묘역이던 장군묘역이던 장교묘역이던 의사자묘역이던 간에 위치 상관없이 20년 이상 함께 한 배우자는 합장이 가능 하다고 한다.
- ↑ 월남전 파병 장병들 처우 개선에 대해 다른 국회의원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을때 유일하게 장준하 의원(당시 국방위원회 소속)이 앞장서서 처우개선을 위해 관심가지고 처우개선 법안 내용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이후로 채 장군은 장준하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표했다고.
- ↑ 채명신을 누르고 대장-> 국방장관이 된 사람이 노재현. 12.12 군사반란 때 바로 그 장관이다.
- ↑ 정확히는 백색 -> 노란색 -> 검은색. 육군 기준.
- ↑ 자신의 경험상 계급장을 보고 계급을 파악한다는 것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나 가능한 것인데 오히려 이것보다는 장성만이 착용하는 상징인 가죽 혁대나 권총집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 ↑ 국군 고위 지휘관들의 한국전쟁 회고록에 자주 등장하는 '씨받이 면회' 가 이때도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사실 허가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채명신은 이를 알고 있었지만 막거나 하지 않았고 오히려 합판으로 부부가 둘만의 관계를 가질 공간을 만들어주기까지 하였다.
- ↑ 한국전쟁 당시 국군 최고위 지휘관이었던 백선엽도 이를 알고 있었고 원래는 하면 안되는 것이라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전혀 막거나 하지 않았다.
- ↑ 다만 채명신도 이에 대해선 어느 정도 이해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당장 광복 이후 아무것도 없던 국군을 지원해준 것도 미군이었고 한국전쟁으로 박살날 처지의 한국과 국군을 구해준 것도 미군이었고 전후에도 이런저런 지원을 해준 것 또한 미군이었으니 자신의 선배들이 이렇게 행동했던 것도 이해한다고 회고록에 기술해 놓았다.
- ↑ 북한군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 ↑ 단 길원팔 관련은 나오는데. 길원팔이 그렇게 거물인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 ↑ 강정구는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국내에서 처음으로 '한국군 용병설'을 제기한 학자로, 나중에 평양 만경대 방명록 사건 등으로 종북성향 문제로 교수직에서 해임되는 구설수에도 올랐으며 구수정 씨는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 문제를 한겨레에 기고하면서 처음으로 이 문제를 수면 위로 올라오게 한 유학생이다. 베트남 전쟁/한국군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구수정의 주장에 대한 신뢰도는 의문시되고 있다.
- ↑ 백선엽은 실제로 간도특설대 출신이다.
- ↑ 박경석, 불후의 명장 채명신 460~4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