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타르 1세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의 역대국왕
루트비히 1세로타르 1세샤를 2세/로타르 2세/루트비히 2세
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1세로타르 1세루트비히 2세
이름Lothair I(로타르 1세)
생몰년도795년 ~ 855년(60세)
재위기간840년 ~ 855년

1 개요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의 4대 국왕이자, 서로마 제국 카롤링거 왕조의 3대 황제, 중프랑크 왕국의 1대 왕이다.

2 즉위 이전

817년 아버지 루트비히 1세로부터 후계자로 내정 받고 공동황제가 된다. 이후 822년에는 총독으로 파견나간 이탈리아의 왕이 된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새로 태어난 이복동생인 샤를 2세에게 자신과 동복동생의 영지를 나눠주자 동복동생 페펭이 반기를 들게 되었고 거기에 형제들이 찬동하여서 830년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실패에도 불구하고 831년과 833년에도 반란을 일으켰다. 833년의 반란에서는 아버지 루트비히 1세를 폐위시키기에 이른다. 하지만 교황이 834년 루트비히 1세를 복위시켰고 이후에는 아버지가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3 즉위와 제국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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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0년 아버지 루트비히 1세가 죽자 새롭게 프랑크 왕국 국왕과 서로마 제국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두 동생들, 샤를 2세루트비히 2세를 무시하고 단독황제가 되려는 욕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두 동생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로타르 1세는 조카인 아키텐의 피핀 2세의 도움을 받았으나 역부족이었고 최종적으로 패배하게 된다.

843년 베르됭 조약을 맺어 북해에서 이탈리아에 이르는 제국의 중앙부를 자신이 가지게 되고, 제국의 서부는 샤를 2세, 제국의 동부는 루트비히 2세가 가지게 되어서 프랑크 왕국은 3개로 분열되고 말았다.

4 분열 이후

분열 이후에는 혼란 수습에 주력했다. 특히 그의 봉지인 이탈리아 반도에 이슬람 제국의 군대(사라센)가 쳐들어와서 자주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이를 수습하느라 바빴다. 심지어 848년에는 아랍계 유목민이 수도인 아헨(!)까지 쳐들어왔으며 설상가상으로 바이킹까지 쳐들어왔다. 그야말로 혼란의 연속이었다.

5 사망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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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5년 두 아들에게 왕국을 분할한 이후 은퇴하고 얼마 안 가 죽었다(프륌 조약)[1].

삼남이었던 프로방스의 샤를은 얼마 못가 후계자 없이 죽었고, 차남이었던 로타르 2세는 두 삼촌 즉 루트비히 2세와 샤를 2세의 환심을 사고자 아내와의 무리한 이혼을 시도하다 이도 저도 못한 상태에서 제대로 된 후계자를 낳지 못한 채 869년 죽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영지는 모두 삼촌인 루트비히 2세와 샤를 2세가 메르센 조약에 의해 나눠가지게 됨으로 인해 중프랑크 왕국은 사실상 멸망당하고 만다.

그리고 장남인 이탈리아의 루트비히 2세는 이탈리아와 황제자리를 물려받았지만 875년 후사 없이 죽게 되어서 그의 왕계는 완전히 끊기게 되었다. 이후 이탈리아는 서로마 황제 쟁탈전의 본거지가 되어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가 지배하던 땅을 로타링기아 라고 했는데 여기서 유래한 지방이 알자스-로렌의 로렌(로트링겐)이다.
  1. 프로방스의 샤를이 863년에 후사 없이 죽자 그의 두 형이 왕국을 나누어, 부르군트의 북부 일부 지역은 로타링기아의 로타르 2세에게, 남부의 넓은 지역과 프로방스는 이탈리아왕 루트비히 2세에게 양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