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2세

1 동프랑크 왕국의 왕

Ludwig II. 동프랑크 왕국바이에른 왕국의 국왕. 별명은 독일인 왕.
802 - 876.

프랑크 왕국루트비히 1세(Ludwig der Fromme, 자비왕 또는 경건왕 루트비히)의 셋째 아들로 814년 바이에른의 왕에 임명되었고, 843년에는 동프랑크의 초대 국왕으로 취임했다. 베르됭 조약의 주역. 카롤루스 대제의 손자이기도 하다.

2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이탈리아의 왕

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1세루트비히 2세샤를 2세

Louis II of Italy.
825 - 875.

로타르 1세의 아들. 850년 12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해 교황 레오 4세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받았다.

839년 이탈리아 왕으로 봉해져서 이탈리아 문제에 집중했다. 당시 이슬람인의 침입이 상당했기 때문에 더욱 복잡했다.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 삼촌들과의 대립으로 인해 역시 복잡하던 상황에서 850년 공동황제가 되었고, 855년 아버지 로타르 1세가 은퇴하자 단독황제가 되었다. 그 대신에 그는 다른 지역의 영토를 포기했으나 불만은 여전한 편이었고, 그의 동생 샤를이 죽자 샤를이 가지고 있던 영토를 가져왔는데 그로 인해 자신의 동생 로타르 2세의 불만을 사게 된다.

866년부터 이슬람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875년 죽었을 때 그의 아들은 다 죽어서 결국 그의 지위는 사촌은 동프랑크의 카를만에게 넘어갔으나, 신성로마황제의 제관은 그의 삼촌인 서프랑크의 샤를 2세가 가져가버렸다.

3 서프랑크 왕국의 왕

Louis II, Louis the Stammer.
846 - 879.

4 독일 바이에른의 왕

20대 시절30대 시절[1]

취미로 궁전을 짓는 남자

Ludwig II. 바이에른 왕국의 국왕. 별명은 바이에른의 광인왕. 과거 동쪽 나라의 성덕후가 환생했다 카더라[2]
1845-1886.

4.1 소개

루트비히 1세의 손자이자 막시밀리안 2세의 장남. 1864년 3월 10일, 막시밀리안 2세가 사망하자 19세의 어린 나이에 바이에른 왕국의 왕이 되었다. 미남, 미녀가 많기로 유명한 비텔스바흐 왕가 출신답게 잘생긴 외모와 190cm에 육박하는 장신[3]으로 매우 인기가 좋았다고 하나 남자 연인이 더 많았다고 한다.

정치보다는 음악과 미술, 문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15세에 바그너를 만나 바그너의 열렬한 빠돌이애호가가 되었다.(…) 왕위에 오른 그의 첫 명령은 '바그너를 찾아서 데려오라'는 것이었다고도 한다. 바그너가 작곡한 오페라 로엔그린에 푹 빠진 그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일명 백조의 성,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짓는 등 국가적 규모의 팬질을 단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루트비히 2세가 왕위를 계승하고 바그너를 만난 것이 1864년으로, 7주 전쟁 중 바이에른이 편을 잘못 들어 프로이센에게 박살나기 2년 전이며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 총리 자리를 꿰찬지 이미 2년이 지난 시기로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고 할만한 인물이다.

4.2 강제 퇴위

장신에 미남인데다가 농부들에게도 격의없이 말을 건넬 정도로 소탈한 성격이라 국민들에게는 인기가 좋았으나 신하들에게는 아니었다. 바그너에 대한 팬심총애가 지나쳐서 궁정 귀족들에게 위협이 된데다가 성 만들기에 빠져서 재정이 거의 파탄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국왕의 과도한 바그너 사랑과 건축 오타쿠다운 계속되는 축성 계획을 참다못한 신하들에 의해서 말년에는 정신병자로 몰려 신하들에 의해 성에 감금당하다 강제 퇴갤퇴위 당했다[4]. 일단 국가운영 예산이 아니라 루트비히 본인의 사유재산으로 지은 성들이긴 하지만 자신의 가족들에게 엄청난 돈을 빌렸고, 그것으로도 모자르자 다른 유럽의 왕실에서 빌릴려고 했다. 당연히 내각에서 불만이 커졌고, 그것이 반목의 원인이 되었다.[5]

강제퇴위 사유는 미쳐서 정무를 볼 수 없다는 이유였는데 정말로 미쳤었던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루트비히에게 정신병이라는 진단을 내린 굿덴 박사는 환자를 만나보지도 않고 서류만 보고서 정신병이라 진단했고, 루트비히 본인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6]했으며 얼마지나지 않아 의문의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4.3 의문의 사망

퇴위 후 3일 뒤에 주치의인 굿덴 박사와 함께 산책하다가 실종되었는데 성 근처에 있던 호수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것도 굿덴 박사의 시신과 함께. 이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대두되었다. 왜냐하면 사인은 익사였는데 시신이 발견된 슈타른베르거 호수는 무릎밖에 차지 않는 얕은 호수였고 평소 루트비히 2세는 수영을 무척 잘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굿덴 박사의 사인은 익사가 아닌 질식사였기 때문에 타살이 아니냐는 추측도 무성하다.

그리고 루트비히는 말년에 자신에게 돈 좀 아끼라고 잔소리해대는 내각을 청산하고 다시 새로운 내각을 꾸릴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그 소식을 듣자 내각에서 선수를 쳤다. 내각이 준비한 루트비히가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다는 보고서가 당시 프로이센의 재상이던 비스마르크의 손에도 들어갔으며, 그는 그 보고서를 보고 같찮은 소리라며, 내각이 왕을 희생시킬 셈이냐고 평가했다. 게다가 그 보고서에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정신적으로 크게 문제되지 않을 사유들이 쓰여 있었다. 가령 정무를 보지 않는다든가, 사생활에 돈을 많이 쓴다던가, 추운 날에 밖에서 점심을 먹으며 더운 날에 외투를 입었다던가, 식탁에서 예절태도가 별로였다든가, 하인들에게 불친절하게 굴었다던가... 물론 다소 지적될만한 점이 있기도 했지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격리시키는 수준까지 갈 정도는 아니었다. 삼촌인 루티폴트 왕자조차도 "내 조카들이[7]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퇴위는 너무 심하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4.4 건축덕후

생에에 건축한 건물을 총 3개다. "에게? 겨우 세개 뿐이야?"라고 할수 있는데, 하나하나가 엄청난 규모의 궁전들이었기 때문에 국가가 부담해야될 재정부담이 엄청났다. 거기다 그것들을 거의 동시에 건설해댔으니...

  • 린더호프 궁전(Schloss Linderhof) :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트리아농 궁전을 본따 만든 궁궐로 1870년에 건설을 시작해 1886년에 완공되었다.
  • 노이에스 헤렌킴제 궁전(Neues Schloss Herrenchiemsee)은 1874년 가을에 왕이 프랑스를 방문했는데 이때 베르사유 궁전을 보고 "나의 꿈을 발견했다"며 돌아와서 짓기 시작(...)한 건축물로 1878년 건설이 시작되었으나 1886년 재정난으로 인해 건설을 중단할수 밖에 없었고, 왕의 사망과 함께 미완성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그의 건축 오타쿠 기질은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는데, 할아버지 루트비히 1세는 자기가 선물한 집짓기 장난감으로 손자가 만든 집을 보고 '상당히 훌륭한 취향이 드러나 있다'고 평할 정도였다. 왕이 된 후에는 건축가를 고용하되 자기가 구상한 아이디어를 보태거나 빼지 않고 그대로 현실에 옮겨 놓을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이런 괴짜적인 센스는 몇 가지 유명한 일화를 남겼는데, 승마장에서 하루 종일 정신없이 말을 타고선 그 거리를 환산하여 오늘은 어느 지방까지 갔다 왔다는 둥 상상 유랑일기를 쓰기도 했고[8], 낮과 밤을 바꾼 침실이 있어서 밤에는 불을 밝게 켜놓고 낮에는 커튼을 꽁꽁 닫고 잠들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2차대전 중에 미군이 이탈리아 몬테카지노의 오래된 수도원을 독일측 공수부대가 점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폭격으로 날려버린 적이 있었는데[9], 똑같은 꼴을 당할까봐 두려웠던지 독일군에서 노이슈반슈타인성을 비롯한 고성에는 병력을 배치하지 않겠다는 정식 서한을 미군에 보낸 적도 있다.

여튼 덕질만 안 했어도 인생이 좀 피지 않았었을까 싶다(…). 그러나 그가 거금을 때려부어가며 지은 3개의 궁전들은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었는데 당시에 진 빚을 몇 번이나 갚고도 남을 정도로 관광수입을 벌어들이고 있다.덕질도 가급적이면 생산적인 방식으로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경우 17년 동안 공사되었지만 아직도 미완성 상태로, 정작 루트비히가 이 성에서 머무른 기간은 3개월 정도 밖에 안된다고 한다.

4.5 트리비아

Portrait-of-Ludwig.jpg
  • 젊었을 때 사진을 보면 당시로서도 꽤 장신에 꽃미남이다. 더불어 게이였다고 한다. 바그너를 워낙 숭배했던 터라 바그너와 연인관계라는 루머도 돌았지만 그냥 후원자 관계였다고 한다. 그러나 바그너를 슈타른베르크에서 마차로 10분 거리인 별장에서 살게 하고 하루에 두 세번 마차를 보내서 궁정으로 불러들이는 것도 모자라 호엔슈방가우 성에 초대받을 때마다 바그너도 왕의 침실에 쪽지를 남기곤 했다. 내용인 즉슨 "저는 천사같은 당신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서로 가까이 있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쪽지를 남기는데 사람들이 오해를 안 하면 그게 이상한 거다.

요즘은 루트비히의 성적지향 이전에 심각한 우울증으로 인해 이해자를 찾으려고 했다는 평가가 대세다. 20살도 안 된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친구도 없었다고 하니 우울증은 예상된 결과였다. 그리고 본인도 어떻게든 이해자를 찾기 위해 청소년기부터 좋아한 예술가인 바그너를 초청해서 후원해주고, 또래의 친구도 만들려고 노력했으나 국왕의 친구가 되줄 사람이 흔하지도 않으니 실패한 모양이다.

  • 미혼을 생을 마감했다. 친척 중 한 명인 바이에른 공작 막스의 딸 조피와 약혼을 했지만, 도무지 결혼까지는 할 수 없었는지 파혼했다. 이 약혼은 조피의 언니인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주선으로 이뤄졌는데, 비교적 친한 사이였던 둘은 파혼 후 소원해졌으나 루트비히의 장례식 때 엘리자베트가 손수 자스민 꽃을 쥐어주었다고 한다.

4.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역사물을 좋아하는 이들이 모에할 요소가 충분하지만 말년이 너무 안 좋아서 그런지 다들 거들떠보지 않는 것 같다. 안습.

  • 이탈리아의 영화감독인 루키노 비스콘티가 이 사람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 예술을 사랑했고 자유주의자였으며 양성애자였던 비스콘티가 느낀 개인적인 혼란을 루트비히에게 투사한 흔적들이 눈에 띈다. 영화 자체는 비스콘티 특유의 아름다운 미장센이 볼 거리.
  •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처럼 일생을 다룬 뮤지컬이 제작된 바 있다. 하지만 쫄딱 망해서 수출도 안 된다고 한다.(...) 국내 뮤지컬 팬들에게는 일명 '굿덴 송'이라는 악명 높은 곡으로 유명하다. 굿덴 송만큼은 찾아보지 않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1. 이 시절만 해도 어느 정도 살이 찐 상태로 10대 ~ 20대 시절은 꽃미남 왕자의 대명사였다. 동화 속에 나오는 백마 탄 꽃미남 왕자의 클리셰의 효시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다.
  2. 단 이쪽은 실제로 국가의 위기를 막아내기 위해 성을 지은 것이므로 진짜 취미로 성쌓다가 국고 탕진한 루트비히 2세와는 거리가 있다.
  3. 요즘 시대로 환산하면 2m 내외라고 한다.
  4. 비텔스바흐 가문에는 정신병력이 있었다고 한다. 루트비히의 동생 오토는 정신분열증으로 아예 병원에 유폐되기도 했다.
  5. 집안내력인지 할아버지 루트비히 1세도 재위 초기에는 명군으로 국민들의 신망을 샀으나 말년에 국제 꽃뱀 '롤라 몬테즈'에게 홀려 거액을 갖다바치다가 국민들의 반발로 퇴위했던 전력이 있다.
  6. 강제로 퇴위당할 당시 되려 쓴웃음 지으면서 느긋하게 "짐이 미쳤다고? 그래, 그 다음은 날 죽이겠군. 그리고 누굴 또 왕위에 올려두고 마음에 안들면 미쳤다고 또 퇴위시킬 건가?"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7. 루트비히 2세와 동생인 오토.
  8. 궁 밖으로 멀리 나가질 못하게 하니까 일부러 미친척 했다는 설도 있다.
  9. 오히려 독일군은 좋은 엄폐지를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폭격에 참여한 몇몇 미군은 가톨릭인이라서 괴로워했고 이 수도원에 있던 많은 유물이 잿더미가 되어서 미국에서도 욕을 많이 먹었다. 전혀 전략적 효과도 없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