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도

정신분석학에서 파생된 용어. 프로이트가 고안해냈을 당시에는 성욕이라는 협소한 의미에서 사용했지만 후기에 들어서면서 인간의 삶을 지속시키는 에너지 그 자체로 그 용법이 변화한다.

심리학과생이 고백할때 유용하게 쓰인다 카더라
너의 리비도를 자극해줄게

Libido
프로이트에게 영향을 받은 다른 정신분석가들은 협소한 의미로 사용을 하기도 했고 광의적으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같은 인문학적으로 사회와 체계를 정신분석학을 이용해 비평을 했던 20세기 중반의 학자들을 제외하면 그때그때 용법을 바꿔서 사용한다.[1] 그래서 구분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정신분석학에서 리비도는 성욕이면서도 인간의 삶을 지속시키는 에너지로,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정신분석학계 바깥에서 인간의 삶이 그렇게 성적인 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이냐는 비판을 받게 되는데, 문명이 성욕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은 문명이 성적인 것만으로 되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욕을 억압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것.

무슨 이야기냐하면 프로이트에 따르면 문명은 원래 자연스러운 것으로서의 성욕을 그렇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문명 안에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창조적인 에너지로 변환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는 곧 리비도 경제라는 개념과도 이어지는데, 억압한 리비도는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더 고차원적 차원의 충동으로 환원이 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과정을 '승화catharsis'라고 불렀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승화되어야 할 성욕을 재조명하게 되면 여태껏 잘 이뤄지던 승화를 억압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증명이 불가능한 괴상한 논리로 비춰지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가루가 되도록 까이게 되었고 여전히 그런 상황. 자크 라캉은 그래서 정신분석학을 하나의 판단 전제로서 이건 마치 수학에서 관념으로서 존재하는 수를 실체처럼 다루는 것처럼 이것도 도구라는 의미로 수학과 같다고 이야기 했는데, 그러자 수학계에서 자의적으로 막 쓰지 말라는 비판을 받았다(...). 대체 뭘 어쩌라는 거냐
  1. 에리히 프롬의 경우에는 성욕을 사랑을 이끌어내는 힘이라고 특수하게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