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 733년. 발해의 계승문제 및 복속문제를 두고 발해와 당이 충돌한 사건. 발해가 거란을 후원하여 당군을 하북성 천안현 북쪽에서 궤멸시켰다. 발해측은 거란과 돌궐 세력을 동원했으며, 이들과 대립하던 해족은 당나라와 연합했으나 발해의 승리가 굳건해지자 배반하고 이탈한다.
2 배경
- 732년 9월 5일경 발해가 장문휴의 지휘 하에 당의 등주성을 공격하여 등주자사 위준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분개한 당현종은 이러한 발해의 움직임을 좌시하지 않고 무왕의 동생이었던 대문예를 파견. 군대를 동원해서 직접 발해를 침공할 준비를 하도록 했다.
- 같은 달 21일에 신라에게도 발해의 남쪽을 공격할것을 요청하는 등 사방에서 발해를 옥죄었고, 이러한 당의 협공에 대응하기 위해 무왕은 당에 적대적인 거란의 가돌우와 돌궐을 지원하며 노골적으로 대립각을 세우며 당군과 충돌을 피할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요청대로 발해를 공격하기 위해 북진했으나, 폭설과 이로 인한 보급 문제를 핑계로 철군해버렸으며. 일이 이렇게 되자 해를 넘긴 733년 3월에 당의 군대는 발해를 직접 공격하기 위해 기동했다. 여기에 거란의 가돌우가 이끄는 거란·돌궐군이 마도산에서 맞서면서 전투는 시작되었다.
3 전투 진행 및 결과
- 당군이 마도산 인근에 다다르자 발해의 후원을받은 가돌우가 거란·돌궐 연합군을 지휘하며 당군을 먼저 공격하였다. 당은 유주절도사 설초옥이 부총관 곽영걸, 오극근, 오지의, 나수충 등을 출동시켰으나 곽영걸이 마도산 인근에서 거란·돌궐 연합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기병 1만명이 마도산 주변에서 전멸당하며 주력군을 삽시간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당이 순식간에 주력부대를 잃자 당군 진영에 속해 있었던 해족 기병대가 패배를 직감한 뒤 배신하고 이탈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당군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사실상 더 이상 전투가 어려운 지경에 몰렸다.
- 한편. 무왕이 직접 친정한 발해군은 당이 침공하자 가돌우와 합세하기위해 마도산으로 진공했으나 발해 군대가 마도산에 도착했을때 전투는 이미 끝나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발해군은 철수하지 않고 도착한 직후 병력을 추스려 후퇴하는 당의 군대를 추격하기 시작했으나 당의 군대는 진군해오는 발해군의 추격을 저지하기 위해 돌로 400리에 이르는 장벽을 쌓고 파고 항전했고 발해군은 더 이상 추격을 포기하고 철군했다.
4 영향
- 마도산 전투에서의 패배로 당은 발해의 국제 정치적 능력에 대해서도 재고를 해야 했다. 이 전투를 계기로 발해는 당으로 하여금 동북 제민족에 대한 제어에 있어 발해의 협조를 구해야만 한다는 점을 확실히 확인시켰다. 당 현종은 이 이상 발해의 계승권에 끼어들지 않았고 발해의 독자적인 영역을 인정해야 했다. 이후 발해의 군사력과 이에 바탕을 둔 외교적 능력은 발해와 당이 원만한 외교관계와 활발한 문화교류를 지속시키는 바탕이 되었으며, 발해가 향후 200년에 이르는 동안 외적으로는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를 보낼 수 있게 된다.
- 다만, 이로 인해 발해의 국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당시 당의 주적은 발해가 아닌 북방의 돌궐과 서방의 토번이었으며, 이 후 남쪽에서는 남조가 발흥하는 등 당의 외적은 사방에서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은 굳이 발해를 더 자극하여 적을 늘리지 않는 선에서 끝났던 것이고, 발해 역시도 당과의 전면적인 전쟁은 자살행위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후로도 당에게 섣불리 강하게 나가지는 않고. 다음 대 문왕에 이르면 당의 패권을 인정하면서도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는 것으로 태평성대를 누리는 현실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물론, 전대 왕조가 멸망한 지 30년만에 이룬 위업으로써는 상당한 쾌거일 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