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예

大門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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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문예는 발해의 왕족이다. 발해의 시조 대조영의 둘째아들이고 무왕 대무예의 친동생이다. 대'무'예가 무왕이고 무왕의 뒤를 이은 왕이 '문'왕이라서 문왕의 이름이 대'문'예인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지만 문왕은 무왕의 아들인 대흠무이고 대'문'예의 한자도 文자가 아니라 門자이다. 형님 이놈! 궁성의 을 열고 왕좌를 내놓아라! 참고로 대무예의 무자는 武자이긴 하다(...) 뭐야 이거

형 대무예와의 대립으로 아주 영화를 찍었다. 짧은데다 남아있는 것도 없는 발해사에서 이렇게 극적인 장면도 드물다. 그냥 각색없이 이걸 그대로 영화로 만들어도 될 정도이다. 차라리 무영검이 이걸 소재로 만들었으면 좀 나았을지도 모른다.

2 생애

발해 고왕, 즉 대조영때 에서 온 사신을 따라가 숙위로 머물고 있다가 당 현종 개원초에 돌아왔다. 그래서 당의 정세에 밝았다고 한다.

726년, 무왕 8년에 발해와 대립하고 있던 흑수말갈에 당이 흑수주를 설치하고 장사를 파견하여 지배하고자 했다. 이에 대무예는 이것이 흑수말갈과 당이 손을잡고 발해를 협공할 셈이라 여기고 대문예와 임아에게 명하며 흑수말갈을 치게 했다. 위치상 흑수말갈은 발해의 동북쪽에 있었고 당은 발해의 서남쪽에 있었으니 발해로서는 완전히 포위당한 형국.

그러나 대문예는 발해의 국력이 고구려의 1/3도 안되고 30만 대군으로 맞선 고구려도 당한테 한방에 망했는데 죽고싶냐고 반박한다. 하지만 무왕은 이를 씹고 진군을 강행했다. 흑수말갈의 경계에 이르러 대문예가 다시 형인 무왕을 말리자 무왕이 대노하여 대문예를 대일하로 교체하고 그를 죽이려 했다. 이에 대문예는 쫄아서 당으로 튀었다. 망명후 당에서 좌요위장군을 제수 받았다. 무왕은 마문궤등을 당에 보내 사정을 말하고 죽여달라 했다.

그러나 당의 현종은 그를 안서(현 신강성, 즉 서역 지방)에 머무르도록 하고, 대문예가 불쌍해서 의리상 못죽인다고 발해에 통보하며 영남에 유배를 보냈다고 구라를 첬다.하지만 이러한 사정이 무왕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다시 이진언을 당에 보내 왜 구라치냐고 까고 죽여달라고 다시 요구했다. 이에 대노한 현종은 비밀을 못지킨 이들을 처벌하는 한편 발해에는 사신을 보내어 형제간의 우의를 간곡히 타일렀다.

그러나 무왕은 732년 장수 장문휴에게 명하여 해적을 이끌고 등주(현재의 산동반도에 위치)를 공격하여 등주자사 위준을 죽이고, 유주(현재의 북경 부근)로 진군하고 퇴각했다. 당에서는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에서 병사를 모아서 치게 하고, 그 다음해 당에 머무르고 있던 김사란을 신라로 보내어 발해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둘다 실패한다. 대문예는 출격했으나 마도산 전투에서 개털리고, 신라군은 눈을 핑계로 회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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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예와 발해의 자객들이 맞장뜬 낙양교(옛 천진교)

무왕의 대문예에 대한 분노는 풀리지 않아 자객을 모집하여 당에 보내어 낙양 천진교에서 대문예를 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도망다니는 사람을 어떻게 잘도 찾아냈다. 대문예는 끝내 발해로 돌아가지 않고 당나라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하지만 시신은 발해로 돌아왔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 아는사람 추가바람

3 트리비아

형제간의 대립, 강대국과의 관계에 대한 의견차에서 소현세자봉림대군의 스토리가 보이기도 하는데 소현세자는 그래도 이상적인 대안이 있었지만 대문예는 그냥 발해가 약하니까 고개숙이자는 입장이였고 무왕은 효종처럼 다소 도전적이여 보일지는 몰라도 결국은 무왕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니 결과론적으로 봤을때는 무왕의 선택이 옳다고 볼수있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소현세자에 대한 긍정적 환상이 있고 효종에 대해서는 약간 세상물정 모르는 외골수로 접근하는데에 비해, 대문예는 딱히 사대적이라고 까이기 보다는 현실적이라고 인정받으며 무왕은 당과의 외교에서 주체적인 태도를 견지해 발해의 자주권을 확립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실제로 당시 당은 지금의 미국쯤 되는 위치였고 발해의 국력도 스스로가 고구려의 1/3도 안된다고 못박아버릴 정도로 당에 비하면 새발의 피도 안 되는 갓난아기와 같았으니 당을 상대로 맞선다는것 자체가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하는 일이였다.

왕위계승을 주장할수 있는 대문예가 당으로 망명한 사건은 당이 발해에 치명타를 줄 수 있는 기회이자 발해의 위기였으나 발해는 이를 잘 극복해냈으며 이러한 형제간의 대립의 중심에 왕위계승문제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국사傳에서 이 과정을 자세히 다루었는데 제목이 '최초의 중원 침공, 당을 정벌하라 무왕 대무예' 내용은 썩 볼만하다. 제목에 비하면 그닥 국수주의적인 내용도 아니고 사건의 흐름을 깔끔하게 잘 정리해놓았으며 무엇보다 제작진이 중국을 돌아다니며 직접 발품 팔아 만든덕에 현장감도 있고 자료조사도 충실히 했는지 이것저것 볼거리가 풍부하다. 인터넷에 캡처정리해놓은게 떠돌아다니지만 영상으로 보는게 훨씬 낫다.
  1. 생몰년은 알려저있지 않다. 나라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죽었는데 시신은 발해로 돌아왔다. 몰년정도는 남아있을것 같지만 또 그렇지가 않다. 열전에도 남지 않고 따로 기록도없는걸보면 당 망명이후 녹을 먹고 산게 아니라 그냥 죽어지낸것 같다. 당과 발해의 화친이 이루어젔음에도 대무예의 개인적 앙금 때문에 생각보다 발해의 수색이 철저했을지도 모른다. 어디서 묘지명이라도 굴러나오면 좋겠다만 시신이 발해로 돌아왔기때문에 묘가 발해에 있을텐데 그의 묘가 온전할 가능성을 장담하기 힘들다.(발해의 묘는 남자들의 것은 털리고 여자들의 것만 남아있는 양상이다.) 아니 애초에 대무예한테 한 짓거리를 생각해보면 묘지를 만들어주기는 커녕 부관참시를 안당하면 다행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