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왕(발해)

발해의 역대 국왕
2대 무왕 대무예3대 문왕 대흠무4대 폐왕 대원의
시호문왕(文王)
존호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
(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
연호대흥(大興), 보력(寶歷)
대(大)
흠무(欽茂)
생몰년도음력? ~ 793년
재위기간음력737년 ~ 793년 (57년)

1 소개

발해의 3대 왕/가독부. 무왕의 본명이 대예라서 문왕의 본명이 대문예인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 대문예는 왕위에 욕심을 가졌으나 형 대무예에게 차단당하고 으로 망명했다.

무왕이 외치에 힘을 기울였다면, 대흠무는 대무예가 만들어 놓은 발해의 세력을 기반으로 내치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재위 기간이 무려 57년 흠좀무으로 발해의 왕 중에서 가장 길고, 문왕 이후 한국사의 어느 통치자도 그의 집권기록을 깨지 못했다. 이후 시대에 그나마 문왕의 재위기록에 가까이 다가갔던 군주로 고려 고종(45년), 조선 영조(51년)와 고종(44년), 그러다 보니 대흠무의 재위 기간은 228년의 발해사직의 25% 수준이나 된다. 발해의 기록 자체가 부실해서 재위 기간이 긴 문왕의 업적도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2 내정

여러 제도를 정비하여 내정을 닦고 외교에 힘을 기울였다. 수도여러 번 옮겼는데, 지방통제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에서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수도를 '중경현덕부'에서 상경용천부로 천도했고 780년대에 다시 '동경용원부'로 수도를 옮긴다. 당 및 신라와 본격적으로 통교하였으며, 대학 기관인 주자감을 설치하였다. 일본과도 활발히 교역하면서 국서를 보냈는데, 여기서 '고려국왕 대흠무'로 자신을 지칭해 고구려 계승 문제에서도 중요한 사료가 된다.

3 외교

일본이 신라를 치려고 발해에 사신을 보냈으나 문왕이 거절했다.

4 가족관계

차녀 정혜공주(貞惠公主), 4녀 정효공주(貞孝公主)가 있었다. 본인들보다 무덤으로 유명한 공주들로, 수능 국사에서 주로 다루어진다. 동모산 근처에서 출토된 정혜공주묘는 고구려양식 무덤(굴식돌방, 모줄임)임에 비해, 중경 부근에서 출토된 정효공주묘는 당나라 양식 무덤(벽돌무덤, 벽화)이다. 이는 발해의 문화가 고구려, 당나라 문화를 같이 받아들인 사례로 이야기 된다. 그리고 비문에는 문왕을 황상으로 지칭하고 있어 발해가 외왕내제를 했다는 것이 확인된다.

정혜공주, 정효공주, 태자는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다. 그래서 문왕이 사망한 후 문왕의 사촌동생인 대원의가 즉위했는데, 그가 왕위에서 쫓겨나자 태자의 아들이자 문왕의 손자인 성왕이 즉위했다. 하지만 성왕도 일찍 죽어, 문왕의 막내아들이 그 뒤를 이어 강왕으로 즉위했다. 아내는 효의황후(孝懿皇后)이다. 2005년 중국 지린성 룽터우산 고분군에서 발해국 효의황후 무덤이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