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윈

  • 이 항목은 영어식 이름인 잭 마로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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马云(馬雲, 마운)
Jack Ma

1964. 9. 10 ~
항저우 출신
항저우사범대 영어과 졸업

1 소개

알리바바 그룹의 대표이자 중국의 세 번째 부자[1]. 포브스 표지에 최초로 실린 중국의 사업가.

2 이력

고교 시절 영어를 아주 잘 했다. 마윈은 '크레이지 잉글리시'로 유명한 리양(李揚)의 '두려움을 떨쳐버려라'라는 말을 가슴에 품고 항저우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은 곳인 서호(西湖)에 매일 출퇴근하며 만나는 외국인마다 말을 건냈다. 반면에 수학을 너무 못했다.

대학입시에 떨어진 직후 장사를 시작했다. 호텔 종업원이 되려고 했지만 키가 작다고 거절당했다. 몇몇 직업을 전전하다가 다시 대학입시를 치러 갔다. 또 떨어졌다. 영어는 잘했지만 수학을 못해 대입 삼수했다. 삼수 때에도 전문대에 갈 성적이었지만, 운 좋게 인원미달이 발생한 항저우사범대에 입학하게 된다.

영어를 워낙 잘해서 대학에서는 별로 공부 안해도 5등 안에 들었다. 항저우 사범대에서는 학생회장으로 뽑혔고, 항저우 학생연맹회장에도 올랐다.[2] 항저우사범대에서 1학년때 만난 장잉과 결혼했다.

1988년 항저우전자과학기술대학 영어강사로 임용되었다.[3] 수업이 매우 재미있어서 공연을 보는듯한 기분이었고, 다른 반 학생들이 호기심에 보러 올 정도였으며, 기초가 약한 학생들이 영어를 술술 말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당시 항저우전자과학기술대학 영어강사의 월급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마윈의 영어실력으로 통역을 하면 수십배 넘는 돈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항저우사범대 학장이 찾아와서 '네가 그만두면 네 후배들 앞날까지 막게 되니, 월급이 적어도 5년만 버텨달라'라고 마윈에게 부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딱 6년 반 버티고 다른 대학으로 이직하였다. 밤에는 다른 야간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그 과정에서 무역 하는 사람들과 인연을 얻게 되었다.[4]

1992년 강사생활을 하면서 하이보(海博)라는 이름의 통역 회사를 통해 첫번째 기업 경영을 시작했다. 1995년까지 교직에 있었다. 이 해에 항저우 10대 우수 청년교사에 선정되었지만, 풀타임으로 창업을 하겠다며 안정된 교직을 그만뒀다.

1995년 중국의 최초의 인터넷 기업인 차이나옐로우페이지(中国黄页)를 세웠다. 당시에는 중국에 인터넷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사기꾼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않았다고. 쉽게 말해서 이 사람이 너무 시대를 앞서 나간거다 1995년에 2만 7천 위안의 자본금으로 세웠다. 홈페이지를 만들어주는 회사였다. 하지만 베이징에는 외국 기업들이 자금력을 내세워 경쟁이 되지 않았고, 고향인 항저우에 내려갔더니 경쟁 상대였던 '항저우전신'이 자금력으로 압박했다.[5]1996년 3월 항저우전신과 합병하기로 하였으나, 경영 의견에 대한 차이가 있었고, 자본과 권력에서 밀리는 마윈이 사퇴하기로 결정되었다.

야후 창립 멤버인 제리 양의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했으며 이는 창업에 대한 열망이 강했기 때문이다.

1997년 중국 대외경제무역부에서 인터넷 네트워크 업무를 담당했다. 차이나옐로우페이지 시절의 동료들을 데리고 가서 해낸 것이다. 대외경제무역부는 온라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중국 최초의 정부부서가 되었다. 대외경제무역부에서 베이징에 '중국 국제전자상거래센터' 회사를 세우고 마윈에게 조직관리를 맡겼다. 하지만 마윈은 공공기관 특성상 경영에 대한 규제와 간섭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다. 처음 약속은 30% 지분을 주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현행법상 불가능하다'라는 이유로 매우 적은 월급만 주었다. 정부 관료들은 간부와 외부인 사이에 거리두기를 원했으며 복종, 독점, 통제만을 원했다. 성과가 항저우를 떠들썩하게 했지만, 모든 성과는 대외경제무역부 간부들의 이름으로 발표되었으며 마윈이 그걸 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윈 혼자 홀대를 받았다면 참았겠지만 마윈과 함께 일하던 창업멤버들도 나쁜 대우를 받았다. 그래서 1999년 회사를 관두고 알리바바 창업멤버들과 함께 항저우로 떠났다. 그만두겠다고 하자 5분만에 전원이 동의했다고 한다.
당시 돈만 따져보면 상당한 실패였으나, 대신 14개월치 경험을 얻었다. 중소기업을 위한 전자상거래 B2B 모델에 대한 마윈의 구상은 이 시기 (1998년 말경)에 나온 것이다. 영어강사를 할 때는 국제 무역 시장, 생산업체-수출입업체 관계에 대해 몰랐다.

1999년 1월 B2B 전자상거래 기업인 알리바바를 설립했다. 알리바바라는 사명을 선택한 이유는 거의 모든 국가의 사람들이 알리바바를 알고 있고 천일야화에서 묘사된 알리바바의 착한 성품 때문이었다. 캐나다의 어떤 기업이 알리바바닷컴의 도메인을 선점하고 있었으나 1만 달러에 소유권을 이전받게 된다.[6] 50만 위안 자본으로 45평짜리 마윈 자택에 모여 18명의 창업 멤버가 하루 17시간씩 일했다. 1999년 3월에 홈페이지가 완성되었다. 물론 현실은 참담했고 1999년 7월경에는 마윈이 빚을 내서 인건비를 줘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알리바바가 너무 저평가되었다는 이유로 벤처 투자를 38차례나 거절했는데, 첫 벤처투자 조건이 추가적인 투자 유치를 결정짓기 때문이었다. 8월경 골드만삭스로부터 500만 달러를 투자 받았다. 골드만삭스는 미국 유명 기업이다 보니 브랜드 가치가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7]

2000년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은 마윈을 직접 만난지 단 6분 만에 투자 결정을 내렸다. 투자를 위해 기업가들의 프레젠테이션을 듣는 자리였는데, 마윈에게 설명할 20분의 시간이 주어졌지만 손정의가 듣다가 6분만에 말을 끊어버리고 투자를 결정했다. 손정의는 3천만달러를 제안했지만, 마윈은 이를 거절하고 2천만 달러의 투자금을 받았다.

2001년 알리바바는 손익분기점을 넘겼고 적자를 벗어났다.

중국인 최초로 포브스 표지 모델이 되었다.

2003년 C2C 거래 기업 타오바오를 설립했다. 결제 시스템인 알리페이도 출시했다.

2005년 야후 차이나의 경영권을 인수하고, 야후로부터 10억 달러의 투자금을 받았다.

2006년 경쟁자 eBay를 수수료 무료를 무기로 중국 시장에서 퇴출시켰다.

2007년 홍콩 주식 시장에 상장했다.

2013년 홍콩의 명문대인 홍콩과기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2014년 뉴욕 주식 시장에 상장했다.

3 기타

마윈은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로 의지, 선견지명, 용기의 부족을 꼽은 후 “30∼40세가 될 때까지 이룬 것이 없어 멸시를 받더라도 누구도 동정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윈의 어록 정리.

소탈하며 부패하지 않은 청년 기업가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2015년에 영국에서 귀족처럼 사냥을 했던 사실이[8] 들통나 다른 얼굴을 가졌다며 비난당하기도 했다.

다른 중국의 재벌들이 그렇듯이 중국의 공산당 일당 독재를 옹호하여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다. 아무리 중국에서 정부를 비판하면 기업가로 성공할 수 없다고 하지만, 이 사람은 그 정도가 지나치다고 볼 수 있다. 중앙일보 특집 인터뷰에서 빅 데이터 드립을 치며 계획경제가 우월해질 것이란 소리까지 했는데, 정부의 통제를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계획경제의 특성상 이는 곧 개개인의 모든 성향과 정보를 정부에 노출시키란 소리가 된다. 어느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런 정신나간 짓거리를 허용해줄지 생각해보면 이는 그가 얼마나 노골적으로 독재정권을 옹호하는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1. 첫째는 다롄완다그룹 회장 왕젠린, 둘째는 텐센트 회장 마화텅.
  2. 이름없는 대학 출신이 주변 일류대를 제치고 학생연맹 회장을 맡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학 후배들 사이에 전설로 남아있다고 한다.
  3. 항저우사범대 졸업생 500명 중 대학강사에 바로 임용된 유일한 졸업생이었다.
  4. 알리바바 창업멤버 18명 중 몇 명은 이 시기 그의 학생이었다.
  5. 항저우전신의 자본금 3억 위안
  6. 요즘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다.
  7. 투자를 받을 때 투자자에게 많은 지분을 넘겨서 생기는 문제, 투자자의 브랜드 파워가 미치는 문제를 고려한 것이다.
  8. 영국 귀족들 사냥풍습처럼 고성을 빌려서 몰이꾼과 개들을 풀어 말을 타고 총으로 사냥터의 짐승이나 새등을 잡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