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칠레 대통령 | |||||||
38대 | → | 39대 | → | 40대 | |||
리카르도 라고스 | → | 미첼 바첼레트 | → | 세바스티안 피녜라 | |||
40대 | → | 41대 | → | 42대 | |||
세바스티안 피녜라 | → | 미첼 바첼레트 | → | 현임 |
임기 | 2006년 3월 11일 ~ 2010년 3월 11일 2014년 3월 11일 ~ 2018년 3월 11일 (예정) |
본명은 베로니카 미첼 바첼레트 헤리아(Verónica Michelle Bachelet Jeria). 칠레 첫 여성 대통령.
1973년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는 군인과 고고학자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평범한 대학생이었다[1] . 하지만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이 무너지고, 아버지 알베르토 바첼레트가 아옌데 지지자란 이유로 고문을 받다 사망하자 사회당에 투신하였고, 끝내 모녀가 1975년 DINA(국가정보국)에 체포되었다. 고문으로 악명높은 비야 그리말디와 쿠아트로 알라모스를 거친 모녀는 같은 해 호주로 망명하고 그 뒤 동독에 터를 잡았다. 바첼레트는 1979년에 칠레로 돌아오고 학업을 재개해 학위를 받았다.
피노체트 독재가 끝난 90년대에 그는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꾸준히 2000년 보건부 장관, 2002년 국방부 장관직을 맡아 인지도를 높혔고, 2005년 대선에 출마해 2차선거에서 세바스티안 피녜라 후보를 제치고[2] 칠레 첫 여성 대통령이란 타이틀 획득에 성공한다. 임기 초반은 신혼부부 첫날밤에 비유될 정도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으나... 곧 교육정책 개혁을 부르짖으며 전국 고딩들이 길거리에 쏟아져나와 시위를 벌였고, 전임 대통령 리카르도 라고스가 추진해오던 산티아고 대중교통 개혁이 시행 첫날부터 개발살나면서[3] 지지율이 급하락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당황하지 않고 곧 다가올 경제위기에 현명하게 준비해둔 덕에, 임기말인 2010년에 칠레 대지진이 들이닥쳤음에도 지지율 84%란 기록을 달성하며 퇴임한다. 인간 승리
경제위기에 대한 준비중 핵심은 전임자 리카르도 라고스가 설정한 정부 저축안이다. 주요 수출 원자재인 구리의 가격에 영향을 많이 받는 칠레 경제의 특성을 고려해 라고스 대통령은 설정해 놓은 가격 보다 구리의 가격이 높을 경우 생기는 차익의 상당부분을 정부가 지출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금이 200억달러 정도 였고 이는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이 경제위기를 맞았을때 유용하게 쓰였다.
임기중 피노체트가 사망하면서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르냐 마느냐의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를 두고 온 나라가 둘로 갈라지자 "피노체트의 국장에 참여하는 것은 양심에 위배된다"라고 밝혔으며, 결국 국장은 없되 전임 군사령관으로서의 경력만을 인정해 군장이 치루어졌다. 아버지가 피노체트 아래 돌아가신 걸 생각하면 최상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2009년 대선에는 연임 제한에 막혀 출마하지 못했고, 바첼레트를 대신할만한 인물이 없어서 우파 피녜라에게 플러스가 되었다는 분석이 많다. 그동안 여당이었던 중도좌파연합 콘세르타시온(Concertación)이 여러 스캔들로 시끄러웠던 것도 한몫을 했으리라. 어쨌거나 이런 지지세를 바탕으로 2013년 대선에 출마했다. 1차 대선에서는 47%를 득표했고 결선투표에서 62%를 가져감으로서 다시 대통령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아들 부부가 권력형 비리 스캔들을 일으킨데다가 원자재 가격하락으로 인해 개혁작업도 덩달아 늦쳐지면서 지지율이 저조하다. 2015년 11월 기준으로는 지지율 20%를 기록하는 중.# 여권 연정의 지지율도 야권보단 높지만(...) 16%까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