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

독일의 역사
Die Geschichte Deutschl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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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덴
뷔르템베르크
자르
바르샤바 조약 (WP)
소련폴란드동독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루마니아불가리아
* 알바니아바르샤바 조약기구프라하의 봄을 유혈 진압한 것에 대해 항의하는 의미로 1968년 9월 13일에 탈퇴.
독일민주공화국
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국기[1]국장
1949년 ~ 1990년
위치중앙 유럽
수도베를린
정치체제민주집중제, 일당제[2], 중앙집권제
국가원수대통령서기장 → 인민의회 의장
언어독일어
주요사건1949년 건국
1990년 통일 관련 조약 체결→통일
통화동독 마르크
성립 이전연합국에 의한 독일 군정기
멸망 이후독일연방공화국

1 개요

중부유럽에 위치했던 공산주의를 표방한 사회주의 국가.

1949년 10월 7일부터 1990년 10월 3일까지 존속했으나, 1990년 독일연방공화국과 통일하면서 소멸했다.

2 설명

면적 108,333km²로 남한보다 면적이 약간 넓었다. 인구는 합병 당시 약 1,611만으로[3] 서독 약 6,300만의 1/4였다. 북한 인구가 남한의 1/2인 2,400만인 것과 대비된다.

동독의 국기는 서독과 구별하기 위해 깃발 가운데에 국장이 그려져 있다. 처음에는 국장을 안 그려서 서독 국기와 똑같았지만 1959년 국기에 국장까지 덧붙여 서독과 구분을 짓게 되었다.[4] 국장망치, 호밀, 컴퍼스로 구성되어 있는데, 망치노동자를, 컴퍼스지식인을, 호밀 고리는 농민을 의미한다.[5]

독일 민주 공화국(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약자로 DDR[6]이상한 생각하지 말자, 혹은 동독(東獨)은 소련이 점령한 동부지역 독일 영토 중 오데르-나이세 선 서부 지역에 수립된 공산주의 공화국이었다. 1949년 10월 7일에 선거를 통해 공식적으로 수립되었고, 1990년 10월 3일 독일연방공화국(서독)으로 흡수 합병될 때까지 존속했다. 수도는 동베를린.

이름에 '민주'가 들어가서 이 쪽을 자유주의 진영 독일(서독)으로 착각할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참고로 자유주의 진영 독일(서독)의 정식 국명은 독일 '연방' 공화국. 북한(자칭 정식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그렇고 공산 국가들은 으레 국명에 민주국가라는 표현을 넣는게 있는데 동독도 같은 케이스이다. 정작 민주 국가는 아니였지만서도(...)[7]

동유럽 최대의 부국[8]이었으며, 1988년 1인당 국민소득이 9,679달러로 당시 우리나라의 2배에 달했다. 당시 서독의 국민소득은 15,300달러로[9] 1인당 국민소득 격차는 겨우 1.5배뿐이었기에 서독 국민들이 '동독? 거기도 좀 사는 나라네. 통일해도 먹고 사는데 별 차이 없겠군' 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달랐는데, 당시 동독의 환율이 시장에서의 가치를 무시하고 정부가 멋대로 정한 고정환율제이다보니 명목상 수치와 실질 구매력 수치간 격차가 컸으며 특히 동독-서독 마르크 간의 '공식적' 교환비가 1:1이었지만 실제 암시장에서는 공식 환율의 1/3 이하 비율로 통용되었던 것.[10] 즉, 실제 동독과 서독 간의 경제적 격차는 1.5배가 아니라 4.5배였다(...)[11]

이러한 실제 가치를 토대로 통일 당시 동독의 1인당 국민소득을 계산할 경우 잘 쳐봐야 4,500달러 정도밖에 안되었고, 거기에다가 동독은 1980년대에 불어닥친 심각한 경제불황[12]으로 실질적으로 대한민국에게 따라잡힌 상태였다. 그래도 각 가정마다 자가용 경차트라반트 1대는 소유했던 나라다.[13] 물론 성능은 별개의 얘기. 트라비의 명성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을 참고하자. 어쨌거나 북한과는 다르다! 북한과는!

서독라인강의 기적에는 미국마셜 플랜의 원조가 큰 역할을 했던 데 비해, 동독은 소련에 280억 달러 상당의 전쟁배상금을 지불하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 달성했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수 있었다.[14] 공산주의 국가였기에 국민들 전반이 풍요롭게는 살지 못해도 제법 넉넉하게는 살 수 있었다. 당시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석유, 가스 등 에너지 자원을 공산주의 형제국 지원이라는 명목 하에 매우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였다.[15] 이 덕분에 통일 후 전기와 가스, 수도 요금이 서독식으로 개편되어 가격이 급상승하자 동독 주민들이 물을 아끼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고, 덧붙여서 통일 이전을 그리워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공산주의 국가의 고유속성인 계획경제 때문에 생필품 부족현상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는 문제가 있었다. 치약이나 비누, 의류, 가공식품 같은 경공업 제품들의 경우 종류가 한정되고 질이 낮은 편이었다. 또한 생산계획에 문제가 생길 경우 생산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도 제법 자주 발생했다. 돈은 있는데 가게에 물건이 없어서 못 산다거나[16], 며칠씩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던 것. 이 외, 바나나같은 수입 사치품의 가격도 몹시 비싸고, 물건도 희귀했다. 즉, 풍요로운 건 아니고 그냥저냥 주민들이 먹고 살만한 정도.. 종종 물건이 부족해서 불편한 경우는 있지만 그것 때문에 못 살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는 정도의 생활수준이었다고 보면 적절하다. 대신, 통일 이후에는 '가게에 물건은 많은데 돈이 없어서 못 사는' 경우가 생겼고, 입장료가 비싸져서 동독 시절에는 거의 공짜로 매주 1~2번은 관람하던 음악회나 공연 등을 보기 힘들어졌다고 하고 각 동네에 한 곳 정도는 있던 도서관과 문화회관 역시 폐관하는 경우도 잦아졌기에 도서관에서 책을 보려면 멀리 걸어다녀야 하는 경우도 종종있다고 한다.[17][18]
단 생필품이 부족하고 생산된 물건들도 서구권에 비하여 품질이 떨어졌으나 적어도 북한 처럼 고난의 행군처럼 대규모 아사사태도 없었으며 적어도 국민들 기본적인 생계는 챙겨주었다. 국민들 생계는 커녕 오히려 가진것도 뜯어내는 북한과는 다르다.

또한 공산당 일당독재 때문에 부패가 심각했다. 통일 직전에 동독 체제가 와해되면서 공산당의 부패가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동독 주민들의 공산당에 대한 지지가 폭락하여 공산주의 국가로서 동독을 유지하려는 일부 지식인들의 구상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체육계에서도 발군. 1988 서울 올림픽은 동독이 체밀레를 시전하여 미국도, 서독도, 소련도 아닌 동독이 2위였다.대신 소련은 1등했다 참고로 동독 스포츠가 발군이었던 이유의 하나는, 코치들이 이 학교 저 학교 돌아다니며 재능있는 아이들을 마구 찾아다녔기 때문이라고 한다.[19] 공산주의 국가라는 특성상 체육계도 중앙정부가 꽉 쥐고 있어 체육인 육성 산업에 중앙정부가 지원을 할 수 있어서 가능했던 현상. 참고로 학생들에게도 스포츠 선수는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외국을 마음대로 돌아다닐수 있으며 우수한 성적이 나오면 국가 입장에서는 선전용으로 사용할 수 있기에 많은 혜택이 주어졌다고 한다. 이는 비단 동독 뿐만 아니라 소련이나 대부분 공산권 국가에 해당하는 얘기다. 육상 여자 400m의 마리타 코흐가 1985년 기록한 47초 60은 3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우수한 선수들을 선발한 것까지는 좋은데, 국가적 차원에서 이 선수들에게 스테로이드 등의 약물을 대량 투여했다는 것. 선수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먹여댔기 때문에, 여성 선수가 자신의 목소리가 쉬고 어깨가 넓어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비로소 트레이너가 자기에게 스테로이드를 먹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서독으로 망명한 적도 있다. 그리고 안드레아스 크리거(Andreas Krieger)라는 투포환 선수도 여자면서 아예 여자에게 연애감정을 느끼는 등 성정체성에 혼란을 느꼈고, 이로 인해 나중에 성전환 수술을 받고 남성으로 살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여러모로 공산주의 진영에서 거의 소련 다음으로 부강한 국가여서 최장기 집권자였던 에리히 호네커도 큰소리 쳤지만, 어이없게 망했어요.

비밀경찰슈타지가 악명이 높아서, 흔히 미국 경찰, 중국 경찰, 한국 경찰 하면서 무식하게 때려잡는 한국 경찰(...) 유머의 원형이 바로 CIA, KGB, 슈타지다. 해당 항목을 참고하면 알 수 있겠지만, 동독 전체가 대단히 치밀한 감시체제 하에 있었다.

다만, 북한 같은 경우에 비교하면 언론의 자유는 훨씬 높은 수준이었다. 1970년대 들어서부터는 집에 안테나 달고 서독 방송을 시청하는 것도 사실상 묵인받았다. 사실 아예 국토 한가운데인 서베를린에서 전파를 쏘는데다가 컬러TV 송출방식이 다르긴 했어도(서독은 PAL, 동독은 SECAM) 어쨌든 남-북한(남한은 NTSC, 북한은 PAL) 처럼 아예 호환이 되지 않는 건 아니라서 흑백으로 볼 수 있었다. 거기에다가 방해전파를 쏘려고 해도 채널번호가 같아서 방해전파 쏘기 힘들었고, 또한 서독TV 보도 프로그램이라고 쓰고 타게스샤우라고 읽는이 동독TV 보도프로그램보다 훨씬 신뢰성이 높아서 고위관료들이나 상당수 당원조차도 서독TV를 보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런 판이니 기껏 안테나 단속을 해봐야 허튼 일에 불과했다. 결국 1970년대 들어 서독TV 시청을 방해하는 행위를 중단했고, 1980년대 부터는 아예 합법화해 버렸다. 물론 그 와중에도 동북부, 동남부지역 같이 서독에서 쏘는 전파가 닿지 않아 서독 TV를 못 보는 지역도 있었긴 했다. 동독 사람들이나 서독 사람들이나 이 지역을 무지의 지역이라고 불렀다(...)

또한 평소 당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은 사람이라면, 약간 비꼬는 항의 편지를 쓰는 것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영화 굿바이 레닌을 보면 평소부터 열성당원으로 활동하던 사람이 배급티켓으로 받아온 옷의 사이즈가 엉터리라면서 만약 우리의 체격이 당의 충직한 일꾼으로써 부적절한 것이라면, 시정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비아냥거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거 실화 맞다. 북한이 심하게 개막장인 것이지 웬만한 공산주의 국가들은 대부분 이랬다. 정권에 대한 정면도전이나 지도자에 대한 공격은 용납하지 않아도 이번 달 배급에 문제가 있다~, 우리 동네 공장 돌아가는 것이 개판이더라~ 라는 식의 지엽적이고 사소한 문제에 대한 비판은 허용되었고 언론에도 실렸다. 다만, 언론의 자유고 뭐고 악명높은 노동강제수용소는 이 나라에도 있었다. 요컨데, 가벼운 불평불만자 정도는 터치하지 않았지만 정말 정권에 도전했다가는 개박살이 났다는 것. 그런데 꼭 공산국가가 아니라도 정권에 도전하면 개박살나는 나라는 많다.

과거 나치 독일에 대해 서독은 반성의 입장을 밝혔지만 동독도 나치 시대의 만행을 인정하고 청산하긴 하나 "우리 세대가 한게 아니다"라면서 모르쇠 배째는 식의 입장을 보였다. 그래도 나치범죄의 책임을 서독한테 떠넘긴채 나치를 터부로만 생각하며 덮기에 급급한 아랫동네보다는 그나마 낫다. 구 프로이센 일부 지방을 기반으로 삼았던 동독 입장에서는 나치 수뇌부와 그 지지자들 출신지역의 다수를 차지한 극우의 총본산 바이에른이 서독의 심장부여서 그럴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책임전가가 올바른 것은 아니다! 사실 독일제국 시절까지는 프로이센이 군국주의와 보수의 상징이었지만 바이마르 체제 이후부터는 좌익의 본거지가 되었고 동독 수립 이후 지금까지도 구 프로이센 지방은 극좌의 총본산 역활을 하고 있다.

3 역사

나치 독일의 패망 이후, 얄타 회담에서 2차 대전 전후 처리를 의논할 때 독일 지역의 분할 점령이 합의된게 비극의 시작이다. 이미 2차례나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인 만큼 연합국들은 이번 기회에 독일을 단단히 손봐줄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독일을 지리적인 요건을 고려하여 정해진 경계선에 따라 미군, 영국군, 소련군이 독일을 3분할 했고, 얄타 회담에서 배제된 자유 프랑스[20]가 우리 몫도 내놓으라고 고집을 부려서 미국과 영국 점령지의 일부를 떼어서 프랑스에게 주는 걸로 달랬다.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은 점령 직후 부터 각자 자신들과 가까운 정치세력을 지방행정에 투입하면서 전혀 다른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당연히 미국과 영국은 나치에 협력하지 않던 우파세력을 기용해서 지방행정실무를 맡겼다.[21] 소련은 자신의 점령지에서 전통적 경쟁관계이던 독일 사회민주당과 독일 공산당을 강제로 합병시켜서 사회주의통일당(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SED)를 만들어서 얼굴마담으로 세우고[22] 스탈린식 체제를 도입한다. 이 사회주의통일당이 바로 동독의 집권당이다.[23]

그러나 이후 이어진 냉전으로 인한 이념 대립이 심해지자 과거 연합군들은 미군+영국군+프랑스군소련군의 도식으로 사실상 적대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결국엔 자유주의 국가라는 유대관계가 있던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는 아예 자신들의 관할지를 하나로 합쳐 반쪽이나마 통일된 독일을 탄생시키니 이것이 독일연방공화국, 즉 서독이 되었다. 이는 공산국가와의 최전선에 놓인 서독의 특성상 하나로 뭉쳐놓는게 그나마 공산국가의 영향력의 침투를 막는 방패역할을 맡기 더 유리했기 때문. 이에 소련은 반발하여 동독의 영토 안에 남아있던 서독측 베를린[24]에 무력 시위를 벌이는 베를린 봉쇄를 펼치는 등 양측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이러한 군사적인 대립은 그래도 양측이 2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전쟁에는 학을 뗀 탓에 실제로 무력 충돌로 이어지지 않고 그럭저럭 평화롭게 잘 마무리 되었으나, 같은 시기 급격한 스탈린식 체제 도입에 반발한 동독 지역 주민들이 계속 서독/서베를린으로 이주하거나 망명하면서 다른 면으로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1961년에 서기장이었던 발터 울브리히트의 지시로 동서독 국경에는 철책선 강화가, 서베를린 주위에는 베를린 장벽의 축조가 시작되었다. 국경선에는 도망자들을 저지하기 위해 국경수비대를 증강하고 지뢰를 촘촘하게 매설했고, 장벽에도 전기 철책과 군견, 감시탑 등 온갖 보안 병력과 장비를 배치했다.

서독과의 대립 관계는 1980년대까지도 계속 되었지만, 국제연합의 공동 가입이나 국제 스포츠 경기의 단일팀 구성, 문화예술 분야의 교류는 제한적이나마 지속되어 평화공존의 길을 모색하기도 했다. TV 매체도 통일에 큰 영향을 미쳤다.[25] 서독 쪽 경계선이 문제가 아니라 영토 한가운데인 서베를린 시내에서 ARD, ZDF(80년대 중반 들어서부터는 RTL, STA1 등 민영방송도 포함)가 전파를 쏘는지라 어찌 할 방도도 없었다.

하지만, 동-서독간 대립이 극에 달했다던 냉전시기에도 남-북한 관계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에 대해 개방적이었다는 점은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일례로 서독 시민이 직접 차를 몰거나 기차를 타고 동독을 가로질러 서베를린까지 가는 것도 가능했다! 또한 절차도 간편했다.[26] 물론 이는 바로 서베를린으로 갔을때 얘기고 동독을 직접 방문했을 경우 까다로운 절차는 감수하는건 기본이고, 국경 검문소에서 하루 25마르크 정도의 강제환전을 해야 했다.[27] 아, 동독 국민에게도 같은 권리가 있긴 했는데... 돈이 없어서 못 갔다.[28][29] 다만 노인들은 서독에 가는게 쉽게 허용되는 편이었다. 노인들은 노동인구도 아니며 서독에 가 있는 동안에는 연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독 시민들이 휴가삼아 헝가리소련동구권 국가를 여행하는 일도 꽤 잦았다고 한다. 북한 주민들은 휴가도 못 받고, 바로 이웃인 중국 여행은 커녕 자기 나라 동네를 건너는데도 통행증을 요구하고 옴싹달싹 못하게 하니 역시 차원이 다르다.

대한민국(남한)이 스스로를 '남조선'이라고 부르지 않고 북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칭하지 않으며, 북한이 스스로를 '북한'이라고 부르지 않고 남한을 '대한민국'으로 칭하지 않듯 서독과 동독도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과 상대국을 부르는 이름이 서로 달랐다. 서독(통일 이전의 독일연방공화국)에서는 동독을 중앙 독일(Mitteldeutschland)[30] 또는 SBZ(소비에트 연방 점령 구역)으로 불렀다[31] 반면 동독인들은 자국을 일컬을 때 독일민주공화국(DDR)이라 하였고 그냥 독일(Deutschland)이라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서독과 별개의 국가라는 것을 강조한 시기 이후로는 정책적으로 도이칠란트라는 이름을 몰아냈을 정도다. 상대편은 그대로 독일연방공화국(BRD)으로 불렀다. 같은 이유로 동베를린은 그냥 베를린이라고 하고, 동베를린이라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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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0월 7일[32] 동독 정권 수립 40주년 기념 열병식 광경

1989년 11월 9일 동유럽 혁명의 여파에 따른 베를린 장벽 해체에 이어서, 자유 선거가 1990년 3월 18일에 치러지고, 여당 독일사회주의연합당(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후신)은 동독 의회에서 다수의석을 상실하였다. 그 해 8월 23일, 동독 의회는 동독의 행정구역을 전쟁 전의 5주로 복귀시키기로 결정하였고, 1990년 10월 3일 독일연방공화국에 합병하여 통일이 되었다.

구 동독 지역은 현재 메클렌부르크-포어폼메른, 브란덴부르크, 작센, 작센-안할트, 튀링엔인데, 통일 20년이 넘도록 아직도 구 서독 지역의 경제수준을 쫒아오지 못하고 65~70%에 머물러 큰 골치라고 한다. #[33][34]

몰로시아 공화국과 전쟁중이다.

4 역대 정부수반

사진이름원어명정당임기
빌헬름 피크Wilhelm Pieck독일 사회주의통일당1949년 10월 11일 - 1960년 9월 7일
발터 울브리히트Walter Ulbricht독일사회주의통일당1960년 9월 12일 - 1973년 8월 1일
100px빌리 슈토프Willi Stoph독일사회주의통일당1973년 10월 3일 - 1976년 10월 29일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독일사회주의통일당1976년 10월 29일 - 1989년 10월 18일
에곤 크렌츠Egon Krenz독일사회주의통일당1989년 10월 18일 - 1989년 12월 6일
만프레트 게를라흐Manfred Gerlach동독 자유민주당1989년 12월 6일 - 1990년 4월 5일
자비네 베르크만-폴Sabine Bergmann-Pohl기독교민주연합인민의회 의장/1990년 4월 5일 - 1990년 10월 2일

5 정치

사회주의통일당이 유일 집권당이었고, 그 위성정당으로 기독교민주연합, 자유민주당, 국가민주당, 민주농민당이 있었다. 기독교민주연합과 자유민주당은 서독에도 같은 이름의 정당이 있었는데, 통일 이후에 기민당과 자민당은 서독기민당, 자민당에 흡수되고 국가민주당과 민주농민당은 사라졌다. 현 독일 수상 앙겔라 메르켈은 동독 기독교민주연합에서 활동했었다.

이들 5개 정당 외에 자유독일청년단, 자유독일통상조합연맹, 독일민주여성동맹, 동독문화협회 등의 외곽단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동독 인민의회에서 의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90년 3월에 동독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유 의회 선거가 치러졌다.

6 행정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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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멸망 후 독일 분할 지도. 미국·영국·프랑스 관할 지역을 합쳐 서독이 되었다. 서베를린은 본래 소련 점령 지역의 일부였으나 수도라는 상징성 때문에 미·영·불 3개국이 압력을 넣어서 분할한 결과 월경지가 되었다.[36] 동독보다 더 동쪽에 있던 지역들은 각각 폴란드와 소련(그 중에서도 러시아) 영토로 합병됐다. 이 중 소련에 합병된 지역은 쾨니히스베르크로, 합병 이후 칼리닌그라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소련이 해체된 오늘날도 같은 이름으로 러시아에 속해 있다.


1949년 당시 동독(빨간색)·서독(파란색·연두색)과 자르 보호령(보라색). 연두색으로 칠해진 지역은 서베를린이다. 이 지도에서는 동·서독 각 주(Land, 복수형: Länder; 영어: state)[37]의 경계선을 그어놓았다. 참고로 동독의 베를린(동베를린)은 '주'가 아니라 특수 지역으로 간주됐다.


자를란트 주의 서독 복귀 이후 동독(빨간색)과 서독(파란색·연두색)의 영역. 동독은 땅이 크지도 않은 데다가 중앙집권형 국가가 되어서 주의 기능이 사실상 정지되었다. 그래서 이 지도에서는 동독의 주 경계선이 그어져 있지 않다. 동독은 대신 주보다 크기가 작은 행정구역들을 사실상의 최상위 행정구역으로 두었다. 동독의 주는 통일 직전에 부활했고 주로서의 기능은 통일 이후에 회복되었다. 2차 대전 이후 그어졌던 다섯 주 그대로 부활했으나 경계선은 변동이 있다. 별도의 특수 지역이었던 베를린(동베를린)은 통일서독베를린(통일 전 통칭 서베를린)에 합쳐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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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이 주의 기능을 정지한 시기 최상위 행정구역(Bezirk, 복수형: Bezirke) 경계선. (동)베를린은 별도의 특수한 행정구역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Bezirk라고 하지 않았지만 베를린 장벽을 친 1961년부터 공식적으로 Bezirk Berlin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도 (동)베를린만의 특수 지위를 보유한 상태였으나 1968년에 헌법을 고치면서 삭제했다고 한다.

7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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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군은 국가인민군(Nationale Volksarmee, NVA)으로 부른다.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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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슈타지 예하 프리드리히 엥겔스 근위 연대의 모습이다.

동독군의 군사 퍼레이드 영상. 일본의 안보교범용 영상으로도 활용되어서 일본어가 간혹 나온다.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 군사 퍼레이드 풀버전

정복이 나치 독일 시절의 군복과 많이 닮은 편에 속하며, 실제로 동독군 정복을 나치 독일군 군복으로 개조하기도 한다. 철모도 나치 독일군의 슈탈헬름과 얼핏 보기에는 달라 보이지만, 실제로 이 철모는 나치 독일군이 도입하려다가 망하는 바람에 도입하지 못한 신형 철모를 개량한 것이었다. 원래는 동독군도 나치 독일군이 사용했던 슈탈헬름을 도입하려 했으나 소련측이 용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이는 정복까지만 그렇고, 전투복 쪽은 완전히 냉전 당시 소련군의 스타일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였다. 전투복의 위장무늬나 철모만큼은 소련군의 것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동독 고유의 독자적인 것을 대신 사용했고, 특히 철모는 나치 독일 시절의 슈탈헬름을 개량한 것이었지만. 그렇기에 동독군의 군복은 러시아식과 독일식이라는 두 가지 양식이 하나로 혼합된 독특한 인상을 주는 것이 되었다.

한편 이러한 것은 인적자원 측면에서도 비슷하였는데, 동독군이나 서독군 모두 전직 나치 독일군 장교들이 상당수 영입되었기 때문었다. 각각 소련식-미군식의 조직을 따랐지만, 1950년대 창군 당시 양국의 영관급 이상 장교들의 거의 대부분은 모두 나치 독일 시절의 독일 국방군 출신이었다.

또한 동독군은 붉은 프로이센군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유튜브에서 동독군의 퍼레이드 영상을 보면 프로이센 시절의 행진곡에 맞추어 행진하는 영상도 볼 수 있다(..) 서독군은 나치 독일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독일제국군과도 완전히 단절을 선언했지만, 동독군은 근대적 군대의 모델이 되는 프로이센 총참모부를 만든 샤른호르스트를 기려 샤른호르스트 훈장까지 만들었을 정도로 프로이센군의 전통을 이으려고 노력했다.

뱀발로 동독군통일 시기였던 1989~1990년간의 행동으로도 유명하다. 동독은 당시 인민의 혁명을 우려하고 동독군을 동원한 진압을 고려했으나 투철한 공산주의 정신으로 무장한(...) 동독군 초급장교들과 부사관 및 장병들이 인민의 군대가 인민을 공격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인식을 가지고 있던 터라 포기했다. 심지어 동독군은 1990년 초까지 국가인민군은 인민의 군대로서 인민을 위해 존속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 되어 동독군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해체 전날(!)까지 평시대로 근무했다. 이후 독일연방군이 재교육을 실시할 때도 연방군 이념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등 통일 기간 동안의 동독군은 여러모로 긍정적으로 평가받았다. 허구헌날 인민들 착취를 일삼는 병신같은 조선인민군과는 비교 자체가 모욕이다.

8 문화

흔히들 생각하듯 윗 동네처럼 막장 국가는 당연히 아니었고, 언론의 자유도 약간은 인정이 되었고 개개인의 자유에는 국가가 관대하게 내버려 두었다고 한다. 1950년대에는 로큰롤 밴드를 조직하였다는 이유로 수감되는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암시장에서 몰래 서구의 음반을 구할 수 있었고, 외국 물건도 알게 모르게 다 들어왔다고 한다. 마치 90년대에 용산에서 애니메이션 비디오 사듯[39]

동독 록밴드 카라트(karat)의 82년곡 푸른 행성(Der Blaue Planet) 내래 독일 민주 공화국 인민의 락을 보여주갔어 고퀄인게 함정

로큰롤 초기에는 동독 정부가 나서서 규제했지만, 이후 록 음악이 전 세계 대중음악계에 대 성공을 거두면서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게 된다. 1960년대에는 싸이키델릭 록 밴드도 생겨나고 70년대에는 펑크 록 밴드들까지 생겨난다. 아니, 생겨나기만 한 수준이 아니라 푸디스(Puhdys)나 카라트(Karat)[40]와 같은 록밴드는 서독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으며, 동독의 락을 가리키는 오스토록(Ostrock)이란 단어까지 생겨났다. 카라트의 82년 앨범 푸른 행성(Der Blaue Planet) 같은 경우는 동서독에서 동시에 한 해에 가장 많이 판매된 앨범으로 기록되었다.

어쨌든 개개인의 사적인 부분은 규제하지 않았고, 정치에 대들지만 않으면 전체적으로 내버려두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는 중앙유럽 국가들의 거의 대부분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덩샤오핑 이후 중국 정도의 수준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그 대신에 슈타지에 의한 감시 체계는 철저했다. 대신 1961년 전까지는 반체제인사들을 물리적으로 고문하였으나, 이후 지상감옥으로 옮기면서는 정신적으로 고문하였다.

게다가 성문화는 오히려 동독이 서독보다 자유로웠다고 한다! 보기 전 주변확인바람[41] 서유럽은 양성 간의 불평등과 제한된 사회 분위기 때문에 오히려 매춘이 창궐하고 성산업이 늘어난 반면, 동독에서는 1960년대 당시 한 여자가 3~4명의 파트너를 가지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한다. 심지어 누드비치도 성업중이었고, 윗줄의 해당 영상을 보면 나체주의자들이 행진하는데 에리히 호네커가 웃으며 손을 흔드는 장면도 볼 수 있다(...) 아마도 동양권 공산주의 국가와 서양권 공산주의 국가의 차이로 보여지는데, 동양에서는 특유의 엄숙주의와 유교적 문화 때문에 성에 대한 공식적 언급이 금기시된 반면, 서양에서는 어디까지나 이것을 사적인 영역으로 취급하여 "국가가 건드려서는 안 될 어떤 것"으로 취급했다고 한다. 공산주의 지상락원을 말하는 것 입니다 여러분! 아, 물론 그와 별개로 포르노물이나 성인잡지같은건 창간되는 일은 없었으며[42] 그렇다고 서구의 성인잡지나 포로노물의 수입도 공식적으로는 금지였다. 포로노는 보면 안되니 나체사진을 봐라 반입했을 때는 압수하였으며 그래서 당시 동독인을은 나체 사진을 보면서 일을 봤다고(...) 섹스용품 가게의 개업도 허가가 나지 않았다. 콘돔을 섹스용품점에서 사는건 안되지만 낙태는 하라

참고로 이 때문에 통일 당시 정작 가장 적극적인 통일 반대론자들은 바로 여성들이었다. 서유럽의 여성 인권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점. 그리고 서독에선 낙태불법인 점을 들어 반대했다고 한다.[43]

나라 사이즈는 작았지만 매우 강력한, 특히 70~80년대에는 소련과 함께 세계를 주름잡는 스포츠 강국이었다. 지금의 네덜란드 인구보다도 더 적은 인구로 하계 올림픽에서 2위를 3차례나 기록했고, 3위도 한 차례 기록했다. 심지어 1984 사라예보 동계올림픽에서는 아예 종합 우승까지 차지했다. 서독과 분리해서 출전한 이후로 단 한번도 종합순위 10위 밖으로 밀린 적이 없는 무시무시한 기록의 소유국. 그나마도 70~80년대에는 아예 종합 순위 2~3위에서 계속 내려오질 않았다.

9 국가

구 동독의 국가는 Auferstanden aus Ruinen(폐허에서 부활하여)이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을 참고하기 바람.

10 남북한과의 관계

1945년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연합국에 의해서 동서 분단이 되자 동독은 1949년 북한과 단독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1955년 남한서독과 단독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되면서 동서독과 남북한 두 분단국가간의 정치적 이념과 대립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988년 대한민국에서 열렸던 1988 서울 올림픽 때는 서독과 함께 한 자리에 참가하였다. 국교는 이뤄지지 못했다. 한편 동독과만 수교한 북한1990년 10월 통일이 되면서 관계가 한때 단절되었다가 2001년 통일 독일 정부와 외교관계를 복원하게 되었다.

11 미디어에서

12 창작물에서의 동독인

13 나무위키에 등재된 구 동독 지역 도시

  1. 국기는 1959년부터 쓰인 것으로, 그 이전에는 서독과 같은 국장이 없는 것을 썼다.
  2. 1989년에 자유선거를 실시하면서 다당제로 변경했다.
  3. 놀랍게도 건국 당시인 1949년 이래 인구가 계속 줄어갔는데, 이유는 인구 상당수가 서독으로 꾸준히 그것도 45년 간 300만이나! 빠져나간데다, 출산율이 상당히 저조했기 때문. 문제는 통일된 지 20년이 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 근데 사실 이 문제는 독일 전 지역의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구 동독 지역이 가장 심하다는 건 부정 못한다 다만 통일 전에는 동독의 출산율서독출산율보다 다소 높았긴 했다. 정확하게는 서독의 출산율이 1970년대 이후에 출산율이 무지하게 낮아져 1명 초반 수준에 머문데 비해 동독은 최소 1명 중후반을 유지한 것이다. 통일 후 역전되었지만(…) 그러나 통일 후에 동독의 출산율이 통일 전의 50%으로 떨어져서, 1994년에는 합계 출산율 0.77명, 1,000명 당 5.1명 출생(...)이라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최근 들어서는 출산율이 서독보다 높아졌고, 인구 유출도 베를린브란덴부르크를 중심으로 나름 개선된 편.
  4. 그래서 올림픽의 동·서독 단일팀 깃발은 처음에는 그냥 흑적금 삼색기를 썼었다. 그러다가 동독이 국기에 국장을 덧댄 이후 동·서독 단일팀은 흑적금 삼색기에 흰색으로 칠한 오륜을 덧붙인 깃발을 썼다#. 참고로 단일팀의 국가는 환희의 송가를 썼다.
  5. 다만 1950년 제정 당시에는 컴퍼스 없이 망치만 있는 단순한 형상이었다. 현재 알려져 있는 국장은 1953년에 개정된 것.
  6. 독일인(서독)들은 옛부터 동독을 동부독일(Ostdeutschland)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DDR이라는 약자를 쓰고 있다. 베를린에 가면 DDR 박물관도 있다.
  7. 한 가지 알아둘 점은 민주주의자유주의는 다른 개념이라는 것이다. 항목을 참조하자.
  8. 현재 동아시아최빈국으로 전락한 북한과 매우 다르게, 동독은 중앙유럽에서 가장 잘 살았던 공산주의 국가였다. 여담으로 2위는 체코슬로바키아.
  9. [1]
  10. 이는 미국 달러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동독 마르크의 경우 서유럽 어느 은행에서도 환전이 불가능했다.
  11. 애초에 서독은 당시 유럽 2위, 세계 4위의 경제대국이었다. 그것도 유럽 1위, 세계 3위였던 소련이 단지 규모만 컸을뿐 실제로는 내실이 영 형편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유럽에서 제일가는 경제대국이 서독이었는데, 이런 서독의 화폐에 감히 동독 마르크가 1:1로 맞다이 깐다는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 한편 '도이치 현대사'에 따르면 세계은행에서 1970년대 말에 한시적으로 영국병에 걸린 영국을 국민소득에서 추월했다고 나와있는데 이것 또한 고정환율빨이다.
  12. 소련동구권 국가들이 이 때 엄청난 불황을 겪었다.
  13. 참고로 남한에서 자가용이 널리 보급된 건 1980년대 후반부터였다.
  14. 다만 소련도 바보는 아니라, 이 배상금을 동독이 망하건 말건 뜯어낸 건 아니고, 경제가 발전한 뒤 분할 상환의 형태로 받아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서방이나 소련이나 2차대전 패전국 독일을 그야말로 알거지로 만들 생각이었지만, 냉전이 본격화하면서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15. 솔직히 북한이 1960년대 남한보다 국민소득이 높은 것은 사실 이것 덕분이다. 전후 복구 한다고 동유럽공산주의 국가들(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기술지원에 소련에너지 자원 지원 덕분에 살림살이가 나아진 것. 이런 좋은 조건을 가지고도 나라를 그 모양으로 만든 김씨 일가의 능력에 감탄하자.
  16. 그래서 당시 동구권 주민들의 저축률은 몹시 높은 편이었다.
  17. 이렇게 된 이유는 통일 이후 중앙정부에서 지방정부로 예산업무가 넘어갔는데 서독정부에서 예산을 많이 줄 처지가 아니고 동독 내의 지방정부도 인구유출이나 실업난 등의 문제로 재정상황이 영 좋지 않았기에 처지였던지라 문화 예술에 대한 지원예산을 확 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회관이나 도서관을 폐관한다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것.
  18. 사회주의 국가 특성상 예술은 어디까지나 인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인민대중을 위한 위로의 매개로서 예술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공연은 입장료가 없었다. 대부분의 예술가는 국가에 소속되어 월급을 받으며 대중을 위해 창작하고 공연한다. 흥행을 목적으로 하는 공연이 없었던 것. 그래서 당시에는 노동자들이 오페라나 관현악 공연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것은 장점이라고 한다. 게다가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상당히 잘 사는 축에 속한 동독이었기에, 지역마다 도서관이나 미술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동독 출신의 사람들이 통일 이후의 변화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먹고 사는 건 지금이 더 나은데, 문화적으로는 그 때가 오히려 더 풍요로웠다"는 것. 다만 이것도 마냥 좋다고 볼 수 만은 없는게 국가가 예술을 통제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검열이 좀 많아서... 멀리 갈 것도 없이 윗 동네에서 '예술'이랍시고 나오는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 같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19. 출처 : 독일 프랑스 공동 역사 교과서 - 동북아역사재단
  20. 애초에 프랑스는 이미 전쟁 초기에 독일에게 점령 당해 전쟁 내내 뭔가 할 건덕지가 거의 없어서 연합국 측에서도 철저히 무시했다. 그나마 샤를 드 골이 나름대로 망명정부를 구상하고 온갖 지지리궁상을 떨어가며 있는 활약 없는 활약 죄다 쥐어짜내 겨우 발언권을 얻은 것. 이 경험 때문에 프랑스는 자신들을 무시했던 미국의 처사를 잊지 않고 이후 미국에게 훌륭한 개김성을 유감없이 선보이게 된다. 미국의 경고를 씹고 핵개발을 강행하는 등...
  21. 대표적인 게 전후 서독 수상으로 라인강의 기적을 이끄는 콘라드 아데나워. 대표적인 가톨릭계 보수정당인 중앙당 정치인이었으나 나치 집권이후 시골에 은거하다가 미군 점령후 쾰른 시장으로 전격 발탁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몇몇 나치관계자들과 독일국방군 출신 군인들도 은근슬쩍 공직에 진출한다.
  22. 비슷한 일이 북한에서도 조선 민주당(조만식)과 북조선로동당의 합병으로 이루어졌다. (북한/정치 참조.)
  23. 사회주의통일당은 통일사회당으로도 불렸으며, 통일민주사회당으로 개편되고 2006년 오스카어 라퐁텐과 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대안이 연합하여 2007년 좌파당이 되었다.
  24. 베를린은 비록 지리상으로는 동독의 한가운데에 있었지만, 오랜 기간 독일의 수도였다는 상징성 때문에 미영프도 베를린만은 포기하지 않으려 하였고 결국 베를린도 미영프와 소련이 나눠서 관리하는 것으로 합의했는데 이 결과 동독 땅 한가운데에 서독의 영토인 서베를린이 생기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25. 이원복현대문명진단 참조.
  26. 그 대신 고속도로에서 조금이라도 과속하거나 도중에 차를 세우거나 하면(이유가 어찌되었든) 바로 벌금딱지. 참고로 먼나라 이웃나라 독일편에 따르면 이것도 동독 정부의 큰 수입원 중 하나였다 한다.동독 정부 : 흐흐~~ 마구 뒤집어씌우라
  27. 서독 마르크를 내면 비자 수수료를 떼고 동독 마르크를 주었다. 서독과 경제적 격차가 점점 불어난 동독의 외화 조달법이었다고 한다.
  28. 다만 서독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모른체 한건 아니라서,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여행올 경우 일정 수준의 여행경비를 지불하긴 했다.
  29. 그리고 간간히 동독에서 서독으로 수학여행가는 경우도 있긴 했다. 호네커의 고향이나 마르크스-엥겔스의 고향같은 데를 주로 다녔긴 했지만..
  30. 동부 독일에 해당하는 Ostdeutschland는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옛 프로이센 땅을 의미했다.
  31. 명목상으론 그러하였으나 실제 서독의 각종 문서에선 독일민주공화국(DDR)이란 말도 많이 보였다.
  32. 동독에서는 이 날을 국경일 '공화국의 날(Tag der Republik)'로 지정되었다.
  33. 대략 독일의 국민소득이 4만 달러를 넘는데 반해, 구 동독 지역은 3만 달러(2만 유로)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물론 이 자체도 아주 낮은 건 아니지만, 서유럽에서는 그 수준이 낙후된 이탈리아 남부(북부 소득의 50%, 2만 달러 내외)보다 약간 높은 수준이라고. 엥? 이탈리아 남부는 공산진영도 아니었는데? 이게 무슨 소리야? 물론 폴란드보다야 훨씬 낫지만.
  34. 현재 한국 기업들은 폴란드체코에 공장을 짓는 경우가 많은데, 물건 팔아먹을 서유럽과의 거리 및 인건비 메리트 때문. 만약 독일통일 안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분리독립처럼 체코슬로바키아처럼 따로 노는 루트로 갔더라면, 한국기업들이 여기에 지었을 수도 있다. 위에서 말했듯 1980년대 말 경기침체로 한국에게 경제 상으로 따라잡혀서 인건비 부담이 덜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 최대의 경제대국인 서독이 바로 옆에 있으니... 그리고 다른 동유럽 언어에 비해 독일어한국에서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으니까.
  35. 서독·통일독일의 자유민주당(FDP)하고는 이름이 다르다.
  36. 참고로 지도에서 프랑스가 점령한 파란색 땅 서쪽으로 옅은 노란색(거의 흰색으로 보임)으로 칠해진 땅이 있는데 이곳은 오늘날의 자를란트 주이다. 프랑스의 요구에 따라 1947년 독일에서 분리돼 프랑스의 보호를 받는 자르 보호령이 되었다가 1956년 서독으로 겨우 복귀해 자를란트 주가 되었다.
  37. 2차 대전 이후 새로 그은 것이라 그 이전과 차이가 있다.
  38. North Vietnamese Army(북베트남군)과 명칭이 같으므로 주의
  39. 당시 동독은 어쨌든 서구와 맞닿아 있는 첨병 역할을 했고, 남한과 북한이 완전히 막혀있는 것과 달리 민간부분의 교류나 교역은 꾸준히 이뤄졌다. 이러한 경로를 통해 서구의 음반이 상당히 많이 들어왔고, 해적판도 더러 제작되어 유통되었으며, 80년대에는 비디오 테이프도 복사본으로 많이 돌았다고 한다. 이거 보고 세운상가청계천을 떠올리는 30대 이상 위키러들이 있을 것이다
  40.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 밴드의 팬이라고 밝혔다. 메르켈 총리도 동독 출신이다.
  41. 아직 못보는 사람을 위해 설명하는데, 남녀의 성기를 모자이크없이 드러내놓고 있으며 심지어 해수욕장 그것도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이 남녀노소 다 벗고 있다! 지구 반대편 반도누군가가 말한 사회주의 낙원은 아마도 이게 아니었을까...
  42. 다만 슈타지에서 포르노 비디오를 불법적으로 제작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공식적으로 포르노 영상물을 만드는건 불법이었기에 용돈벌이용으로 만든 수준이기는 했지만
  43. 얼핏보면 이해가 잘되지 않지만 동독에선 임신 12주까지의 낙태가 이미 자유였던데 반해 서독에선 통일 직전에도(...) 낙태가 형법 218조에 의해 엄격히 제한되었고, 특정 사유없이 낙태하는것이 불법이었다. 정확하게는 빌리 브란트 정부 시기에 낙태를 합법화 했었지만 1975년 연방대법원이 이 낙태법에 대해 빠꾸(...)를 먹이면서 재 불법화 되었던 것. 그래서 서독 여성계에선 낙태를 합법화하기 위한 시도를 벌였지만 1980년대 기민련/기사련이 집권하면서 번번이 무산되었다. 그리고 동독 여성들의 경제활동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었는데 사회주의 국가라는 특성상 대부분의 기업체가 공기업인데다가 동독 정부에서 노동력 유출을 메꾸기 위해 여성의 사회활동을 적극 장려하고 이를 위해 여성들의 지위가 높아졌기 때문에 때문에 여성들이 고위직에 오르는 비율이 상당히 높았고 보육시설도 잘 마련되어있다. 이에 비해 사기업이 대다수를 차지했던 서독에선 여성들이 고위직에 오르는 경우가 적었고, 보육시설이 잘 마련되어있지 않았다(질은 동독에 비해서 우수했다고 하나 수가 부족해서 이용할 수 없다면 그림의 떡일 뿐이다). 그리고 1위 발행 신문에서 대놓고 나체사진을 싣기도 했고(...)
  44. 동독 국영TV의 메인 뉴스 프로그램이었다. 그래봤자 다들 서독에서 송출하는 Tagesschau도 잡아서 봤지만...
  45. 작품의 파생외전 캐릭터도 포함한다. 단 동독군이지만 타국가 출신은 제외.
  46. 작품의 처음에는 서독군으로 나오지만 동독 태생이다.
  47. 실제로는 러시아인으로 소련의 스파이이며 본명은 그레고리 안드로포프
  48. 서독 관할이던 서베를린을 제외한 동베를린에만 국한
  49. 헤센 주에 위치한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과 엄연히 다른 도시다.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새롭게 폴란드와의 국경을 이루게 된 오데르 강변에 위치한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