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 전투

Hundred Days Offensive
백일 공세 (1918년 8월~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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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을 장식한 연합군 최후의 공세.

2 상세

독일군의 춘계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하여 사실상 연합국의 승리는 시간 문제나 다름없었다. 연합국 총사령관인 페르디낭 포슈는 미국의 병력과 물자를 기다려 독일을 완전히 압도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지, 혹은 독일이 공세를 실패하고 여력을 잃은 바로 그 시점에 공격을 개시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했는데, 결국 후자의 안이 채택되어 연합군은 총공격에 나서게 되었다.

연합군은 지난 4년간의 전투 경험을 집대성, 모든 물자를 전선으로 집중시키는 전면 전투를 구성하였고, 독일군의 예비대가 전선의 간극을 매우기도 전에 끊임없는 협조 공세를 계획한다.

작전은 8월 8일 영국 4군과 프랑스 1군이 아미앵을 기습하여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독일군은 붕괴되었고, 연합군은 하루에 13km씩이라는, 유례없는 진격 속도로 아미앵을 휩쓸었다. 여태까지 공세에서 고작 수백 미터를 전진하려 시체의 산을 쌓았던 연합군에게 공세 첫날 13km 진격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독일군의 총수였던 루덴도르프는 이 날을 "독일의 어둠의 날"이라 회고했다. 전선이 붕괴하여 후퇴하는 독일군은 전선 양측에서 계속해서 공격받았으며, 9월 중순까지 힌덴부르크 방어선의 돌출부가 제압됨과 동시에 미군이 엔 강을 건너는 데에 성공한다.

9월 26일부터 29일까지 다시금 대공세가 감행되었다. 영국군이 힌덴부르크 선의 서쪽 부분을 완벽히 붕괴시켰고, 프랑스와 벨기에군이 플랑드르 지역에서 독일군 진지를 돌파했으며, 미군 병력이 아곤 지역을 깊숙히 찔러들어갔다. 이로써 독일군은 재기의 여력조차 없어졌을 정도로 완벽히 무너졌다.

이때쯤 가면 간신히 타 전선에서 끌어온 독일군의 증원군이 전선에 투입되기도 전에 알아서 붕괴돼서 각 병사 단위로 도망치는 사태가 발생했으며, 공세가 끝날 쯤 독일군에게 남아있던 운용 가능 병력은 고작 10개 사단에 불과했을 정도였고, 후방보급체제도 운송체제도 없고 실어나를 물자도 없어서 완전히 붕괴한 상태였다.

다수의 독일병들은 파업에 나서 전투를 거부했고, 전선으로 향하는 병사들에게 파업에 동참하지 않는다며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을 받아들인 독일군 참모차장 루덴도르프가 참모총장인 힌덴부르크와 수상 헤르틀링에게 독일군이 전쟁에 승리할 가망이 없다는 것을 보고하면서 독일 군부도 사실상 패배를 인정하게 된다.

3 영향

이 전투의 결과로 독일에선 킬 군항의 반란이 벌어짐과 동시에 독일 혁명이 발발해서 연합국들에게 휴전을 타전하게 된다.

기갑-보병-포병-공군(정식편제는 아니였지만)등 전 병과의 유기적인 조화가 보였기에 현대 기동전의 시초가 되는 전투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초반 연합군에는 이 교훈을 제대로 해석한 이가 별로 없었다는 게 함정.

4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영국 BBC3에서는 2014년, 제1차 세계 대전 100주년을 기념한 3부작 드라마 "아워 월드 워(Our World War)"를 방영하였고, 3화에서는 전차부대의 아미앵 전투를 다루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