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 군항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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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의 계기가 된 사건. 킬 수병의 반란으로도 부른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독일 혁명이 일어났다.

1.1 원인

춘계 공세가 실패하고 100일 공세가 시작되자 독일연합군에게 평화 협정을 요청했다. 이때 즈음에 사실상 연합군의 대빵급이 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독일에게 "모든 점령지를 포기하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도 중지하며 민주 정부가 아니면 협상하지 않는다."는 협상조건을 내걸며 독일을 압박했다. 근데 저정도만 해도 관대한 것 아닌가 사실 독일의 상황은 저 조건을 받아들여야 할 정도로 최악이었다.

그러나 독일 군부는 독일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전쟁을 위해 물자를 더더욱 쥐어 짰고 독일 국민들의 생활은 더더욱 피폐해져 갔다. 이러고도 독일이 무너져 내리지 않은 건 연합군에게 포위되면서 독일 국민들이 독이 올랐기 때문이다. 또 정말 엄청나게 정교할 정도로 물자를 효율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거의 혁명나기 직전엔 몇주도 안남은 상황이었다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독일 내부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일선 장병들과 노동자들의 불만이 매우 극심했고 러시아 혁명으로 퍼지기 시작한 공산주의 열풍과 전장의 악화, 그리고 무능한 제국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찔렀고 동맹국들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전쟁을 견디지 못하고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독일 내부에서도 고급 장교들이나 제국 각료들을 제외한 모든 독일인들이 제국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1918년 10월 4일 독일 의회는 이미 입헌 혁명을 선언하고 기존의 제국 의회를 해산한 후 입헌군주제를 선언하였다. 하지만 이미 독일의 상황은 그 정도로는 호전될 가망이 없었다. 그리고 입헌군주제로 전환한 이유에는 황제측의 책략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미 패전이 기정사실화된 시점에서 패전의 책임을 민주화된 정부에 떠넘김으로써 황제 본인의 책임을 면해 보려는 속셈이 있었던 것. 그러나 이미 그 정도만으로 수습될 상황이 아니었다.

1.2 발발

1918년 10월 24일 독일 해군 원양 함대는 출항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미 전세는 연합군의 편이였고 독일 해군이 노력해 봤자 연합군의 해군을 이길 리가 없는 상황에서 이런 명령은 결국 자살특공이나 마찬가지였다. 킬 군항의 수병들은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는 빌헬름스하펜 등 다른 해군 기지들로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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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스하펜 군항에서 파업중인 수병들.

독일 육군과는 달리 해군에서 반란이 일어난 이유는 수병들이 전적으로 함상에서 생활하는 것보다는 육지의 자기 집에서 출퇴근(!)하며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후방의 피폐한 사정을 더 절실하게 체험하고 있었고, 종전과 관련된 정보의 유통도 원활했던 터라 용이하게 반란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 정보 통제가 그나마 성공적이었던 독일 육군에게는 반란 따위는 러시아군과 프랑스군, 영국군의 모략에 놀아나는 것이었다. 이 불씨는 곧 독일 전역으로 번져 전국의 노동자들도 파업을 선언하였고 11월 7일 뮌헨에서는 바이에른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렇게 되자 독일 의회에서도 공화국이 선언되었고 황제 빌헬름 2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11월 9일에 결국 황제는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2 결과

독일 혁명정부는 러시아 혁명처럼 공산주의 세력과 기존 기득권 세력의 공존이 된 기묘한 형태로 이어졌다. 하지만 독일 혁명정부는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러시아 임시정부보다 지지 기반과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을 뿐더러 독일 국민들은 공산주의에 매력을 느끼지도 못했다. 도리어 공산당은 오히려 내부로부터의 중상에서 그들을 독일을 망하게 한 장본인으로 몰리게 되어 장기적으로는 지지를 잃었다. 결국 혁명정부는 공산세력과 군부 우익세력의 도전에서 승리하고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를 이루게 된다.

여하간, 독일 혁명정부는 도저히 전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기에 연합군이 독일 영토로 진군해 들어오기 전 정전 협정을 맺을 것을 제의하였다. 연합군도 전쟁에서 지친 것 때문에 독일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11월 11일 독일과 연합군의 정전 조약이 체결되었고 서부전선에서의 전쟁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혁명과 종전 처리가 너무 엉성했기 때문에 독일은 독일대로, 연합군은 연합군대로 찜찜하게 전쟁이 마무리가 되어버렸다. 독일 내부에서는 평화협정에 대한 불만이 치솟기 시작했다. 덤으로 패배를 믿고 싶어하지 않았던 독일 국민 전체는 정신승리법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독일 상황은 물자가 다 떨어지고 총붕괴 상태에 이르렀으나, 그 직전까지는 동부전선은 종결짓고 서부전선에서 공세를 지속했으며, 독일 본토 내부로 연합군이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객관적으로 본다면 패배한 것은 확실하지만, 인지부조화를 약간만 적용하더라도 다 이긴 것을 내부로부터의 중상으로 인해 졌다고 생각하기 딱 좋았다. 결국 이를 이용한 나치가 정권을 잡으면서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게 된다.

다만, 정보 통제에 독일 국민이 완전히 속았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진 거짓 증거다. 애초에 수병의 폭동이 1주일만에 전국으로 확산되어서 황제가 도망치게 된 것 자체가 독일 국민들도 정보 통제 따위에는 속지 않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준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