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녀자들의 베르사유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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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대포는 아무런 추가 장비가 없는 그냥 맨 대포이다. 당시 콩코드 광장에 장식되어있던 대포를 화약이나 탄약 따위는 없이, 그냥 끌고 갔다가 다시 끌고 오게 된다. 이 대포들은 혁명시기 수차례 이동되는데, 민중들은 화약과 탄을 같이 가져간 적이 없다.)

프랑스 혁명의 사건.

1789년 10월, 혁명 당시의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 농촌지역에서 일어난 대공포의 영향으로 파리의 식량사정이 어려워졌다. 이런 가운데 파리에는 갖가지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결국 10월 5일, 파리의 하층계급 부녀자들 7000여명이 앞장을 서고 남편들이 뒤를 따른 가운데 이들은 베르사유 궁전까지 행진하여 루이 16세의 파리 귀환을 요구하며 궁 근처에서 야영했다. 그러나 루이 16세가 이를 거부하자 다음날 이들은 왕궁 주변에 주둔한 육군 병력들이 합세한 가운데 베르사유 궁을 습격하여 스위스 용병들로 구성된 왕실 근위대[1]원들을 살해하고 왕과 왕비를 포위하여 이들을 파리로 끌고와 버렸다.

프랑스 혁명의 과격화의 단초를 놓은 사건으로 이어지는 바렌느 배신사건과 자코뱅주의자들의 출현 등에 영향을 끼친 사건이라 볼 수 있다.

또한 페미니즘에서는 일반 민중의 여성들이 역사의 전면으로 부각된 사건으로 중요시한다.

나폴레옹이 현장에 있다가 이들 시위대가 저지른 잔혹 행위[2]에 질려서 혁명을 혐오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1. 루이 16세가 중간에 근위병들에게 의무를 다했으니 그냥 후퇴하고 살 길을 찾도록 명했으나, 이들은 이를 거부하고 남아 저항했다.
  2. 죽은 스위스 근위병의 바지를 벗기고 성기를 잘라 흔들었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