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최강의 전사들
Reisläufer, 라이슬로이퍼. 중세 스위스 주정청에서 조직한 후 근세까지 유럽에서 맹위를 떨쳤고, 현대까지도 맥이 이어지고 있는 용병부대. 프랑스의 외인부대와 더불어 용병의 전형으로서, 지금도 용병 하면 많은 이들이 스위스 용병을 떠올린다.
1 역사
1.1 시초
스위스가 정확하게 어느 시점부터 용병업을 국가사업으로 운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3세기 시점부터 스위스 용병의 강인함은 유럽 최강으로 정평이 있었다고 한다. 내륙국인데다 국토의 대부분이 알프스같은 산지에 얽혀있기 때문에 무역과 산업이 발달할 기틀이 없었고 이에 따라서 가난했던 스위스는 용병업으로 생계를 꾸렸던 것.
또한 중세 스위스의 역사는 지배자인 합스부르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끊임없는 항쟁의 역사였으며, 그 과정에서 자연히 수많은 전투를 겪은 베테랑들이 양성될 수밖에 없었다. 스위스라는 험준한 환경 속에서 전투를 겪으며 단련된 이들은 자연히 타지로 나와서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였다.
당시 스위스는 강한 중앙집권화 대신 각 주마다 느슨하게 연결된 상태였고, 때문에 저마다 군대를 양성하고 보유하게 된 것도 이들이 나타난 한 이유가 되었다. 즉 타국처럼 왕실이나 정부의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각 주마다 재량껏 군대를 꾸리며, 필요하면 보상을 받고 얼마든지 빌려주는 방식으로 군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군대를 '빌려가는' 입장에서도 돈만 있으면 고용하기도 쉽고 질까지 좋은 스위스 용병은 매력적인 선택이었고, 더구나 이웃 프랑스와 독일은 중세 내내 전란 시기였기 때문에 왕들과 영주들은 자연히 이들의 도움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스위스 내부에서도 용병들은 선망의 직종이 되었다. 수입도 수입이거니와, 국제적으로 칭송받는 강인하고 용맹한 전사들은 청년들의 동경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적지 않은 수가 전쟁에서 희생되거나 부상당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영예로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당연히 용병들 자신들도 국위선양의 자부심에 넘칠 수밖에 없었다. 스위스 현지에서 이들을 지칭하는 단어인 Reisläufer는 '전쟁에 나서는 자'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용병은 신뢰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수 있지만, 스위스 용병대는 계약과 신뢰도, 신의를 목숨보다도 더 중하게 여겼다. 이는 위에서 말했던 땅이 척박하니 용병업이 국가적인 산업이자 생계수단인데, 비겁한 모습을 보이거나 신뢰도를 깎아 먹는다면 자기 하나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지역 용병대 전체의 신뢰도에 해가 가고, 후배와 이웃들의 생계에까지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이 덕분이라고 해야할지 탓이라고 해야할지... 그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결코 도망치지 않았다.
1.2 전성기
15세기를 전후해 이들은 바이킹의 계보를 잇는 유럽의 전투민족으로 그 명성을 떨친다. 국토가 산악지대인지라 목초지가 부족해서 말을 키울수 없었던 나머지 이들은 보병이었다.
보병이라고 하지만 할버드와 장창으로 무장한 이들은 중세 유럽에서 감히 대적할 자가 없었던 강군이었다. 총이 등장하고 그로 인해 스페인 군대가 부상하기 전까지는 단연 유럽의 최강 전력이었고 냉병기 시대를 마감하는 최후 최강의 병사들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와 독일에도 용병으로 생계를 잇는 자들이 많았지만 그중에 그나마 스위스 용병대와 동급으로 평가받은 용병대는 란츠크네흐트 뿐이였고, 그나마도 신뢰성과 명예론 단연 스위스 용병대가 평가가 높았다.
장대무기로 종렬을 이루어 두려움 없이 진격하는 이들의 모습은 적군에게는 경외와 공포의 대상이었다. 스위스 용병들은 포로를 일절 생포하지 않는 전멸전을 선호했으며, 패잔병들은 스위스 용병들의 그 무자비함에 혀를 내둘렀다. 또한 전사를 영예롭게 생각했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화살과 포화가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결코 진형을 흐트리지 않았다. 이는 개인의 이익과 생존을 우선시하던 다른 용병들과는 다른 특이한 면모였다.
이들은 합스부르크와의 격렬한 항쟁 이후 14~15세기 백년전쟁과 부르고뉴 전쟁에서도 두각을 드러냈으며, 교황령에서도 그들의 실력을 인정하고 적극 고용하기에 이르렀다. 그 전통은 지금까지도 바티칸에 건재히 이어져오고 있다.
당시 이탈리아의 각 도시국가에서도 스위스 용병들이 주축을 담당했다. 넘치는 것은 돈이고, 걱정할 것은 외침밖에 없었던 이들 도시국가들에 있어 스위스 용병은 최적의 초이스였다. 마키아벨리는 스위스 용병들의 맹위를 목격한 후 저서 군주론에서 그 용맹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당시 스위스 용병의 활약을 목격한 독일 각지의 귀족들과 영주들은 스위스 용병을 벤치마킹하여 란츠크네히트라 불리는 독일 용병들을 육성하게 된다.
르네상스 시대인 15~16세기에는 조국 스위스의 국토확장정책에 따라 정규군으로 편입되어 활약하기도 했다. 이는 스위스가 합스부르크로부터 사실상 독립한 후 본격적으로 국력을 외부로 발산한 데 따른 것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용병으로서의 입지 역시 건재했다.
그러나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서 이들은 밀라노로 진주해 있다가 프랑스+베네치아 연합군을 맞아 싸우다 프랑스 기병의 근성 랜스 차징에 궤멸당하고 만다. 이 패배를 계기로 스위스는 대외 팽창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영세 중립국을 선언하게 되었으며, 자연히 스위스 군대도 자국의 이익을 위한 전쟁을 중단하고 용병업에만 전업하게 된다.
1.3 란츠크네흐트와의 경쟁
1515년의 마리냐노 전투는 스위스 용병사에 커다란 분수령이 되었다. 스위스군과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는 비록 적으로 처음 인연을 맺게 되었지만, 이후 서로 공생관계로 접어든다.
프랑수아 1세는 적으로 싸웠던 스위스 용병들의 활약을 본 후, 자신이 목적하는 이탈리아로 세력을 뻗기 위해 이들을 반드시 자신의 전력으로 삼을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이미 그 전에 란츠크네흐트를 고용하기도 했지만 이들은 스위스 용병을 상대로 대패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한편 스위스 용병들 역시 자신들의 진가를 알아주고 재정적으로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 프랑스에 큰 매력을 느꼈다.
열정적인 성격의 예술 오타쿠라 할 수 있는 프랑수아 1세에게, 르네상스가 만개한 당시 이탈리아는 그야말로 놓쳐서는 안 될 땅이었다. 대륙의 흔한 능덕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불리울 만치 후원을 아끼지 않는 군주였고, 그것은 문화예술계 뿐만 아니라 용병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마리냐노 전투에서 베네치아와 연합하면서까지 기어이 밀라노를 차지한 것도 이탈리아 정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고, 또한 그것은 유럽 열국으로부터 이탈리아에서 밀려난 선대의 한을 풀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당연히 군사적 진흥에도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었고, 그 목표를 위해 이탈리아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스위스 용병들을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리냐노 전투 이후 스위스 주정부들은 프랑스의 적성국에 용병을 보내지 않는다는 계약을 체결했고 이로써 스위스 용병들은 사실상 프랑스에 예속되기 시작한다.
문제는 바로 이 무렵부터 스위스 용병들에게도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스위스 용병을 벤치마킹하여 조직되기 시작한 독일의 용병대 란츠크네흐트는 처음엔 스위스 용병과 전혀 비견될 대상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명예를 중시하던 스위스 용병과는 달리, 란츠크네흐트는 그야말로 깡패처럼 무자비하고 절도가 없었으며 심지어 자기들끼리도 이해관계가 상충하면 동족상잔을 주저하지 않았다.[1] 전술이나 체계도 스위스 용병을 따라잡는데 급급할 뿐이었다. 이미 1513년에 벌어진 노바라 전투에서 스위스군과 란츠크네흐트간에 기념비적인 충돌이 벌어졌으나, 스위스군은 프랑스가 고용한 란츠크네흐트를 격파하고 대승을 거뒀던 바 있었다. 게다가 그 1년 전인 1512년 라벤나 전투에서도 란츠크네흐트는 무력했다.
그러나, 1520년대로 접어들고 시간이 흐르면서 독일의 란츠크네흐트는 모방 단계를 넘어 스위스 용병의 경쟁자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스위스 용병이 프랑스와 밀월관계를 맺은 것과는 반대로 란츠크네흐트는 프랑스의 적대국인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가 눈독을 들이게 되었고, 그들은 신성 로마 제국군에 편성되어 각종 전투에서 잔뼈가 굵게 되었다. 또한 란츠크네흐트는 스위스 용병과 달리 조국이나 구심점 따위가 없었기에 고용하기가 더욱 수월했으며, 특유의 난폭함과 약탈로 인한 보상이 조합되면 미친 개처럼 굉장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특히 복장에 있어서는 화려한 스위스 용병 이상으로 더더욱 현란하게 치장하여 압도적인 개성을 과시했다.
란츠크네흐트는 16세기 초반 스위스 용병들과의 교전을 통해 전술 교리를 강화시켰고, 더구나 합스부르크의 판도 내에 스페인이 포함되면서부터는 스페인 테르시오들과 합동 작전을 펼치면서 테르시오의 우수성도 벤치마킹하게 되었다. 이렇듯 란츠크네흐트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스위스 용병들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으나 내심 경계심을 가지며 서로간에 용병으로서 라이벌 의식을 갖게 되었다.
1.4 몰락
1520년대, 카를 5세가 합스부르크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면서 유럽 세계는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약관의 젊은 황제인 카를 5세는 신성 로마 제국 외에도 부르고뉴와 스페인을 통치하고 있었으며, 프랑수아 1세 못지 않게 이탈리아에서의 패권을 원하고 있었다. 더욱이 프랑수아 1세는 신성 로마 황위 쟁탈전에서 패배한 경험도 있기 때문에 카를 5세와는 철천지 원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와 밀월관계가 된 스위스 용병들에게 있어서도 이는 공통의 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애초에 이들의 모국인 스위스가 합스부르크와는 숙명의 악연 관계였던데다, 라이벌인 란츠크네흐트는 다름아닌 신성 로마 제국에 가담해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의 대립은 스위스 용병들의 결속을 더욱 굳게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더 한층 프랑스로 기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니 스위스 용병은 사실상 프랑스의 외인부대나 다름 없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비코카 전투(Battle of Bicocca, 1522년)는 스위스 용병의 위력을 검증할 역사적인 실험대가 되었다. 그보다 10년 전의 노바라 전투에서 무찔렀던 란츠크네흐트와 가진 역사적인 재대전이었기 때문이다. 스위스 용병들은 마리냐노 전투에서 바랜 빛을 되찾길 원했고, 란츠크네흐트 역시 노바라 전투에서의 한을 되갚을 기회였다. 또한 이것은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의 대리전으로서 본격적인 이탈리아 전쟁의 개막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결과는 스위스 용병들의 대참패였다. 이는 스위스 용병들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탓이었다. 적국의 황제 카를 5세는 신성 로마 제국 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통치자이기도 했으며, 당연히 제국군의 이탈리아 전역에도 스페인 전력이 일부나마 투입되었다. 이들 스페인 병력은 수세기의 레콘키스타를 통해 화기와 신전술, 발달한 축성술로 무장한 강군이었고 란츠크네흐트도 그들의 선진성을 도입했다. 그럼에도 스위스 용병들은 줄곧 승리를 안겨준 재래식 전술로 일관하여 닥돌했으니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마리냐노 전투 때는 정규군과의 싸움이었고 중과부적 상태에서의 패배였으니 참작의 여지라도 있었으나, 비코카 전투에서의 패배는 같은 용병들이 주력이 된 대결이었으며 프랑스를 등에 업고도 졌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참패였다. 더구나 그렇게 깔보던 란츠크네흐트를 상대로 졌으니 자존심에 입은 타격은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조차도 몰락의 서곡에 지나지 않았다.
1525년에 벌어진 파비아 전투는 비코카 전투에 이어 스위스 용병의 위상에 결정타를 선사했다. 이 전투는 용병들은 물론 양 진영의 정규군과 외부세력까지 모두 참전한 이탈리아 전쟁 최대의 격전이었으며, 스위스 용병들에게는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할 마지막 기회였다. 게다가 그 직전에 카를 5세가 란츠크네흐트를 동원하여 본국인 스위스를 직접 들이치기도 했기 때문에 스위스 용병들의 위기의식과 결속력은 어느 때보다 고조된 상태였다. 숫적으로도 우위였으니 그야말로 져서는 안 될 싸움이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스위스 용병들은 대차게 전멸하고 말았다.[2]
파비아 전투는 스위스 용병들이 궤멸당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고용주인 프랑수아 1세까지 포로로 사로잡힌 대참패였고, 이러니 프랑스 입장에서도 카를 5세의 합스부르크에게 이탈리아의 주도권을 내준 치욕의 패배였다. 이 시점을 경계로 스위스 용병의 명성은 재기불능으로 치달았으며, 처음으로 총을 제식화한 스페인 군대와 란츠크네흐트가 유럽 최강군의 자리로 올라선다. 1525년을 스위스 용병 황금기의 끝으로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후 스위스 용병이 전투의 중핵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격감한다. 물론 이후로도 용병으로서 자주 참전했지만 과거의 찬란한 명예를 회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몰락에 접어들고서도 이들은 여전히 명예와 고용주에 대한 충성을 중시했으며, 그 결과 '패배했음에도 빛나는' 훈훈한 무용담을 낳게 된다. 사실 근대에 이르면 용병의 전투력보다는 외국인이라 자국민보다 오히려 신뢰할 수 있고, 장기간 고용할 수 있어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지만.[3]
1527년 벌어진 사코 디 로마(로마 약탈) 당시, 스위스 용병들은 카를 5세의 군대에 맞서 교황과 로마를 사수하고자 치열하게 싸웠지만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말았다. 그러나 다른 용병들과는 차별화되는 이들의 충성심만은 여전하여 42명만이 살아남는 패전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고용주인 교황을 위하여 싸웠다. 이 영웅적인 활약으로 인해 스위스 용병은 체면을 살릴 수 있었고 바티칸에서는 지금까지도 스위스 용병을 고용하며, 매년 로마가 함락당한 5월 6일마다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도 이들은 앙시앵 레짐 내내 프랑스 왕가의 충성스러운 근위대로서 그 지위를 잃지 않았다. 위그노 전쟁 때에도 이들은 왕실을 위해 가톨릭 진영에서 위그노들과 맞서 맹활약을 펼쳤으며, 프랑스 혁명 때에는 튈리 궁전에 갇힌 루이 16세를 지키기 위하여 분투하다 전멸했다. 군중의 수가 압도적이었기에 사실상 싸워봐야 그들의 목숨만 버리는 의미 없는 전투였고 군주인 루이 16세도 떠나라고 했으며 혁명군 측도 굳이 외국인인 스위스 용병들을 자국 귀족들처럼 죽일 마음은 없었지만 그들 스스로 철수를 거부하고 싸우다 단 한명도 빠짐없이 전멸한 것. 이들이 싸운 이유는 시신에서 프랑스 혁명군이 발견한 편지를 통해 확인됐으며, 소식이 전해지자 스위스 루체른에서는 지금도 이 사건을 빈사의 사자상으로 기념하고 있다. 다만 그와 별도로 프랑스와의 계약은 그대로 유지되어 나폴레옹과도 계약을 맺었고 7,000명의 용병이 러시아 전선에 보내지기도 했다. 다만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에는 더 이상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다.
스페인에서도 16세기부터 이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16세기 후반 펠리페 2세의 실정으로 촉발된 네덜란드의 독립을 진압하기 위해서 스위스 용병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도 30년전쟁과 포르투갈 왕정복고전쟁에 동원되었고, 스페인이 워낙 지역 갈등이 심한 나라인지라 갖은 내전에도 자주 동원되었다. 스페인사에서 스위스 용병들의 마지막 활약은 나폴레옹 전쟁기에 벌어진 스페인과 프랑스간의 전쟁으로, 이 전쟁에서 스위스 용병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함락될 때까지 그 사명을 다했다. 물론 프랑스측도 스위스 용병을 고용했으므로 동족상잔이 벌어졌는데 양측 모두 어쩔 수 없이 죽도록 싸웠지만 이 일이 교훈이 되어 이후 스위스 내에서 자국민의 용병 수출에 대한 반감이 심화되고. 결국 용병수출 자체가 금지된 것이 1840년대 말의 일이다.
위와 같은 에피소드 때문에 충직한 스위스인 용병의 평가는 매우 높았고, 서브컬쳐에서 볼 수 있는 고용주를 배신하지 않는 용병상은 스위스 용병이 모티브가 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2 현대의 스위스 용병
스위스 근위대 항목 참조.
19세기에 스위스의 헌법이 개정되어 용병업이 불법이 됨에 따라, 유일한 스위스 용병인 바티칸의 스위스 근위대는 일종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말이 근위대-용병이지 실제 법률적인 위치는 치안 경찰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