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락

部落

이 항목은 부락이라고 표기되는 사항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1 集落과 같은 용어

원래의 의미는 민가들이 모여 만들어진 작은 지역으로, 집락(集落)과 같은 용어이다. 그리고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도 유목민들의 공동체를 부르는 말로 부락이라는 말이 쓰였다. 한국의 농촌에서도, 공식 행정명이 아닌 통명을 ○○부락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었으나 점차 마을이라는 고유어로 대체해 나가고 있다.

2 일본의 피차별부락

일본에서도 원래는 위 의미로 사용되는 어휘였으나, 행정기관이 과거 일본에서 에타(エタ, 穢多)로 지칭되는 천민, 전염병 보균자, 전쟁포로 등의 집단거주지 거주자를 피차별부락민(被差別部落民)이라는 용어로 쓰던 것이 부락민으로 줄어 정착하면서 일본 천민집단의 대명사로 변질되어버렸고 나쁜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한국사에서 고려시대까지 존재하다 조선시대에 혁파된 향, 소, 부곡을 생각하면 된다

1871년에 일단 법적으로는 피차별부락이 혁파되긴 했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해묵은, 그러나 쉽게 해결되지 않는 고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부락이라는 말 자체가 금기인 경우가 많고, 볼드모트? 지방자치단체에 따라서는 동화정책특별시행지구(同和行政特別施行地区)라는 용어로 대체된다. 게다가 언론에서도 사야마 사건이나 부락지명총람사건 정도 되는 어지간한 대형사건이 아니면 언급을 거의 하지 않는다.

더 자세한 내용은 부라쿠민 참조.

3 남양청 산하의 행정단위

일본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국 독일로부터 서태평양상의 독일령 섬을 양도받은 후에 남양군도(南洋群島)를 신설하면서 남양청(南洋庁)의 하부 행정단위의 하나로 설정한 것을 말한다. 2의 단어와 비교해본다면 기분이 괴랄해지는 용어다

남양군도 붐이 불자, 일본인들이 팔라우, 마셜 제도, 사이판 등지로 이주하는 일이 많아졌고 일본인 집단거주지가 대거 형성되었다. 그래서 남양청에서는 그 집단거주지를 부락으로 공인하여 자치를 용인하였다. 그리고 그 부락의 대표자를 3년 임기의 명예직 총대(総代), 보좌하는 자를 부총대(副総代)로 지정하고, 부락을 다시 몇 개의 구(区)로 임명하여 그 대표자를 총대가 임명하는 구장(区長)으로 하였다[1]. 또한 독립적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25세 이상의 남성 중에서 선발하여 구성하는 2년 임기의 명예직 협의회도 갖추고 있었다.

그렇지만 실제 행정구역은 부락으로 불리지는 않고 일본의 행정구역 체계인 시정촌 체계를 따랐으며, 1932년에서 1937년에 걸쳐 4개 지청 9개 부락이 편성되었고 패전 후 소멸했다.

4 블로그의 대만식 표현

대만에서는 블로그를 음차하여 부로거(部落格: 부락격)이라고 한다. 역시 2의 단어와 비교해본다면 기분이 괴랄해지는 용어다 2

  1. 이미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일본의 남양청이 폐지된 21세기에도, 한국의 농촌지역에는 구장이라는 표현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