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William Edward "Bill" Nicholson OBE |
생몰년월일 | 1919년 1월 26일 ~ 2004년 10월 23일(만 85세) |
국적 | 잉글랜드 |
출신지 | 노스 요크셔 주 스카보로 |
포지션 | 윙 하프 |
소속팀 | 토트넘 핫스퍼 (1938~1955) |
감독 | 토트넘 핫스퍼 (1958~1974) |
토트넘 핫스퍼 역대 감독 | ||||
지미 앤더슨 (1955~1958) | → | 빌 니콜슨 (1958~1974) | → | 테리 닐 (1974~1976) |
68년동안 스퍼스를 사랑해 온 수호자
스퍼스의 황금기를 만들어 낸 명장
1 선수 시절
선수 시절의 니콜슨.
1919년 1월 16일에 노스 요크셔 주 스카보로에서 9자녀 중 8번째로 출생했다. 그는 16살 때인 1936년에 토트넘 핫스퍼에서 트라이얼을 받았다만, 선수로 입단하지 못한 채 구단 관리직원으로 스퍼스와 연을 맺기 시작하여 18살 되는 해인 1938년에 구단과 계약을 맺어 프로 선수로 데뷔했다. 그러나 이듬해에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영국군 조교로 징집되었고, 군 복무 와중에 뉴캐슬 유나이티드에서 임시로 19경기를 뛴 바 있었다.
전쟁 뒤인 1946년에 팀에 복귀한 뒤 그는 1949년에 부임한 아더 로위 감독[1]의 지휘 하에 1951년에 리그 우승을 하는 등 화려했던 선수생활을 보내고 1955년에 은퇴했다.
그의 선수 시절 출장기록은 통산 314경기, 득점 수는 통산 6골, 국가대표 출전 횟수는 1회(1950 브라질 월드컵).
2 감독 시절
니콜슨과 위대한 스쿼드들.
1963년 컵 위너스컵 우승 축하 당시 모습.
은퇴 이후 코치로 친정팀인 스퍼스의 코치로 부임하여 지미 앤더슨 감독을 보좌했고, 1958 스웨덴 월드컵 당시 국가대표 코치로 월터 윈터바텀 감독을 보좌하기도 하다가 1958년에 지미 앤더슨 감독이 물러나자 바로 감독으로 취임, 그는 대니 블랜치플라워와 모리스 노먼, 바비 스미스, 피터 베이커, 클리프 존스 등을 필두로 1958/59 시즌 초반에 강호 에버튼을 10대 4로 승리하여 스퍼스의 새 출발을 알렸다.
비록 첫 시즌은 18위로 강등을 면하긴 했지만 다음 시즌인 1959/60 시즌에 데이브 매카이가 합류한 뒤 3위로 수직상승하여 마침내 1960/61 시즌에는 리그와 FA컵에서 우승하여 팀 역사상 처음으로 더블을 차지했다.
이후 "원대한 목표를 갖고 더 전진하라"는 빌 니콜슨의 의지로 더 나아가 1961년에는 팀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평가받는 지미 그리브스를 영입하여 1961/62 시즌 유러피언컵에서 4강까지 가는 파란을 일으키며 FA컵에서 두 번째로 우승했고, 1962/63 시즌 UEFA 컵 위너스컵 결승에서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5-1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 뒤 그는 모든 팀들과의 경쟁을 펼치면서 비록 팀을 리그 정상으로 이끌지는 못했지만, 그 후로도 팀에 1회의 FA컵 우승(1967), 2회의 리그컵 우승(1971, 73), 1회의 UEFA컵 우승(1971) 트로피를 남겨준 뒤 1974년에 UEFA컵에서 결승으로 다시 진출, 화이트 하트 레인 홈경기에서 페예노르트와 맞붙어서 1차전에서 2-2 동점을 기록했으나 로테르담 원정인 2차전에서 2-0으로 졌다. 이 때문에 스퍼스의 서포터들이 페예노르트 서포터들을 상대로 폭동을 일으켜서 이에 충격을 받고 선수에서 감독까지 38년간에 이르는 스퍼스 생활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3 은퇴 이후
은퇴 이후 론 그린우드 총감독의 제안에 따라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의 고문으로 잠깐 일하다가 1976년에 토트넘 핫스퍼의 고문으로 친정팀에 돌아와 1991년까지 활동하며 글렌 호들, 게리 마벗 등 팀의 기둥이 될 만한 이들을 영입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고, 1991년부터 팀의 명예 회장으로 일하다가 2004년 10월 23일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1975년에 대영제국 3급 훈장을 수여받았고, 1999년에 화이트 하트 레인 근처의 길이 '빌 니콜슨 웨이'로 명명되기도 하고, 2003년에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그도 선수 시절을 스퍼스에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