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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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근처에 있는 비석. 본래 이름은 삼전도청태종공덕비이다.

2 역사

1639년(인조 17년) 병자호란 때 청(淸)의 조선 침공으로 조선은 청에게 참패하게 되고 국왕 인조는 청 황제 태종 앞에서 치욕의 삼배구고두로 항복을 표하였고 이에 청 태종은 조선땅에 자신의 업적과 청군의 승리를 기록한 비석을 세우기로 하여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석촌리(현재의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삼전도에 이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비를 세울때 다들 비석의 초안을 잡기를 꺼려했는데 인조가 이경전,조희일,장유,이경석의 문장이 좋다 하여 맡겼는데 이경전은 병때문에 빠지고 조희일은 일부러 거칠게 쓰고 그래서 장유와 이경석의 글을 보냈더니 청나라는 장유의 글은 인용이 안좋고 이경석의 글은 첨가할 내용이 있다고 해서 이경석의 글을 수정해 세웠는데 싫어도 어쩔수 없이 쓴것임에도 후에 이경석은 이 일로 송시열에게 곤욕을 치룬다.

비석에는 청태종의 치적과 조선을 침공하여 승리하였던 기록과 업적을 새겨넣었으며 조선 왕이 항복하였다는 사실과 청군이 조선에 큰 피해를 주지 아니하고 본국으로 철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비석의 글씨는 한자와 만주 문자, 몽골 문자로 새겨넣었으며 밑에 귀부 조각을 세웠고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석촌리 한강변에 있는 삼전도 석촌호 주변에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3 삼전도비의 수난

1895년 26대 왕 고종이 치욕적인 상징이라는 이유로 비석을 철거하라는 어명하에 광주군 중대면의 땅 속에 매몰했으나 1910년 경술국치로 조선총독부가 총독령에 의거하여 1913년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석촌리 일대 자리에 다시 세워놨다. 그러나 해방 이후 1956년 이승만 정부가 일본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을 때 일제의 사악한 만행이자 치욕이면서 조국의 수치라며 문교부를 통해서 비석을 없애라는 지시에 따라 다시 땅 속에 묻혀졌으나 1963년 대통령 박정희가 집권하고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일대가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3공화국 시절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다시 세워졌다.
파일:훼손당한 삼전도비.jpg
뭐야 무서워

2007년 백모씨가 만취상태에서 비문에다 페인트로 위의 사진처럼 철거라 쓰는 사건이 있어 2010년 고증에 따라 원래 있었다는 지금의 서울 송파구 석촌동 석촌호수 서호 쪽에 복원된 상태로 세워지게 되었다. 험난한 길 걸었다...
원래는 2개의 비석과 귀부가 있었지만 그 중 하나는 비석이 없어져서 귀부만 남아있으며 유일하게 비석 하나만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