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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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 당시 예문관제학이자 효종 대의 영의정이었던 이경석이 썼다.

"여러 해 동안 강화도를 수축하는데 검찰사 이하가 날마다 술마시는 것으로 일을 삼더니, 마침내 백성들을 다 죽게 만들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허물이냐! 나의 네 아들과 남편은 모두 적의 칼날에 죽고 이 한 몸만 남았다.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 <연려실기술> 인조조고사본말, 병자노란[1]

丙子胡亂

1 개요

인조 14년 병자년 음력 12월 2일부터 정축년 음력 1월 30일까지, 양력으로는 1636년 12월 28일부터 1637년 2월 24일까지 벌어진 조선청나라의 전쟁. 이때문에 병자호란은 음력으로는 병자-정축년에 걸쳐있으나 양력으로는 사실상 1637년에 벌어진 전쟁이다. 1627년 정묘호란 발발후 9년만에 다시 일어난 전란이다. 그 외 옛 기록에는 '병자노란(丙子虜亂)'이나,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고 부른 기록도 있다. 병자년-정축년에 걸쳐 있었다는 의미에서는 '병정노란'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위에 인용된 연려실기술의 '병자노란'이라는 표기는 오타가 아니다. 호(胡)나 노(虜)나 '오랑캐'를 뜻하는 글자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제2차 조청전쟁[2]이라는 명명도 있다.

별도의 설명이 없는 한, 이 문서에서는 모든 날짜를 음력으로 표기한다.

2 배경

2.1 청나라의 상황

정묘호란(1627) 이후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은 조선은 강화조약을 체결한 뒤에도 친명배금정책으로 일관하였다는게 세론이나, 실상은 청으로 국호를 고친 청태종 홍타이지명나라와의 전면전 전에 친명 성향의 조선을 확실하게 무력화시키려고한 전쟁이다. 경제적 이유에 대한 논의도 상당하다. 당시 청나라는 내몽골을 제압하고는 만리장성 축조가 제대로 되지 못했던 몽골 지역으로 우회하여 명나라의 북부에 들어가 대규모 약탈과 공격행위를 벌이고 있었다. 바이두 백과사전의 청병입새[3][4] 하지만, 이와 별개로 1626년 영원성 전투 이후 대명 전선은 사실상 돌파구를 찾기 어려웠다. 명나라와의 교역이 중지됨에 따라서 태조 누르하치 때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명과의 인삼, 모피 교역은 파탄상태에 있었으며 청은 만주족뿐만 아니라 요령의 한족, 새로이 손에 넣은 몽골인까지 먹여 살려야 했다.

청나라의 인구 규모는 약탈 경제로는 유지되기 어려운 수준으로 성장했는데, 현물로서 가지고 있는 인삼, 모피 등이 명나라와의 교역이 중지됨에 따라서 가치가 떨어지고 말았다. 인삼, 모피가 썩어문드러지도록 많고 금은보화가 있다한들 생필품과 밥을 먹어야 사람이 살 것이 아닌가? 물론 청나라는 누르하치 시대부터 시하(柴河)·범하(范河)·삼차얼(三岔兒) 등을 개간하며 상업에서 농업 위주로 경제 전환을 노려봤으나 기상 악화로 실패했다.

결국, 만주족은 요령의 한족에게서 식량을 쥐어짜내야 했기 때문에 한족과 만주족끼리의 대립이 심각해졌고, 상황은 1633년의 식량위기까지 겹치면서 경제적으로 극한 상황에 달해있었다. 새로 항복한 백성들에게 줄 땅이 없었고, 병자호란 직전인 1635년과 직후인 1637년에도 식량 위기에 직면했다.[5] 청나라가 영원성 - 산해관을 뚫지 못했다고 쳐도 길게 우회하여 베이징 앞쪽까지 공격 할 수 있었으니 명나라의 동북 방어선이 방어가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으나...당시 청나라는 연운 16주 획득 후의 요나라금나라와 같은 넓은 국토를 얻은 것도 아니고, '습격 & 약탈' 이라는 유목민식 전략 외엔 돌파구가 없었던 상황이다.

2.2 조선의 준비

조선에서도 후금을 막기 위한 군사 준비를 서둘렀다. 흔히 광해군의 방비가 주목받는데 정충신은 5만명만 잘 육성해도 후금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광해군 시절의 군사태세는 인조반정으로 정권의 방비에 있어 한계점을 노출했으므로, 인조 대에 들어서는 중부지방의 방위역량에도 신경을 기울였다. (위의 정충신과 장만도 여기에 참여했으나 병사했다.) 하지만 인조도 전략적으로는 무능하여 이괄의 난으로 병력이 몰살당해 북방 방어선의 공백이 커져버리고, 상당수의 장수들이 이괄의 난에 휩쓸리면서 베테랑 병력의 공백도 심각해졌다.[6][7]

특히, 인조반정 이후 당시 조선의 수비를 담당했던 속오군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었다. 정부 주도로 조총 생산을 서둘러 각 지방에 보급했고, 호패법 을 시행하여 병력을 확보하려 했다. 임진왜란 때 큰 문제를 드러낸 각 지방 수령들의 떨어지는 지휘력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전문적인 무관이 평시 훈련과 전시 단위부대 지휘를 담당하는 전담 영장제가 실시된 것도 인조부터였다.[8] 정권 보위의 핵심이라 전투에 투입되지 않는 훈련도감 대신 실질적으로 전투를 담당할 수 있는 중앙군으로 어영군, 총융군, 수어청 군대가 창설되고 강화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였다. 이러한 노력들을 통해서, 병자호란 직전에는 어영군 6천 여명, 총융군 2만여명, 수어군 1만 4천여명, 훈련도감군 5천명등의 병력이 준비되었고 전국적으로 8-9만 가량의 속오군이 마련되었다(다만, 총융군 병력의 다수는 속오군이었기 때문에 병력이 겹친다). 또한 전국적으로 36-38개의 영(營 - 기효신서 체제의 단위부대로 대략 2500에서 3000가량)과 이를 담당하는 전문 무관인 전담영장이 설치되면서 이러한 병력에 대한 지휘체계도 잡혔다.

하지만 또한 광해군 치세부터 이어진 재정 문제로 인해 준비에 만전을 기하기 어려운데다, 병력 증강에 서둘렀지만 사르후 전투이괄의 난에서 잃었던 20000~30000명 가량의 정예병을 제대로 회복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9] 특히 이괄의 난 이후 반란을 두려워한 정치가들은 그 유명한 첩보형 장수들을 국내의 반란을 감시하는 용도로서 사용했다. 남이흥은 이때 다른 장수들과 국내지방을 감시하느라 자신도 군사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유언 또한 군사훈련 한 번 못해본 것이 안타깝다였다. 당시 중앙 중심의 측근정치로 의한 군권장악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며, 한명기 교수가 남이흥 장군을 안타깝게 여겨 인조를 극렬히 비판하는 부분이다

더욱이 이괄의 난 이후에 반란을 겪은 정치가들의 전형적인 기찰정치가 발휘되어, 서인들의 측근으로 이루어진 중앙의 높으신 분들이 각 군단을 몰빵받았고, 정작 전문가인 각 지방의 장수들에게는 사령관 권한을 주지 않았던 관계로, 실전에선 유능한 정충신남이흥[10]마저도 이괄의 난을 토벌하는 공을 세웠음에도 차별대우를 받으며 한적을 떠돌았다.[11] 장만과 정충신이 병사한 이후 김자점 같은 측근들이 기용된 최고 사령관들의 역량은 매우 부실했다. 따라서 기껏 전문가들이 남긴 위의 수많은 노력들이 실전에서는 허사로 돌아간다. 이 부실한 사령관들은 실제 전란이 일어났을 때 최고 지휘권을 가진 왕과 체찰사 김류가 남한산성에 갇힌 상황에서, 지휘권을 행사해야 할 도원수 천하의 개쌍놈 간첩 김자점이 지휘를 포기해 버려서 조선군 병력들이 제각기 따로 싸우게 하여 패전을 자초하게 된다.

3 원인

전쟁이 촉발된 가장 큰 원인은 1636년 2월 중순 청나라 칸이 황제를 선포하면서 조선에 의견을 묻는다고 쓰고 사실상 강요로 읽는 사신으로 용골대, 마부대 등과 새로이 복속된 내몽골의 보르지긴 왕족들을 보냈기 때문이다. 사신들도 명목상 당시 죽은 인조의 왕후에 대한 조문단으로서 왔는데, 하는 소리는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소리였다. 거기다 이미 정묘호란 때 후금은 조선과 화약을 맺으며, 조선과 명 간의 특별 관계(군신 관계)를 인정하고 조선이 청이 아닌 명과도 외교를 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자세한 건 정묘호란항목 참조).[12] 그런 상황에서 청의 칭제 선언은 조선에 대해 명과 청 사이에서 양다리 서지 말고 이제는 설 줄을 명확히 해라는 요구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런 사절이 청 태종 자신의 명의가 아닌 모두가 왕자급에 불과했던 8명의 호쇼이 버일러(hošo-i Beile, 和碩 貝勒), 17명의 구사이 어전(gūsa-i ejen, 固山 牛祿),[13] 49명의 버일러 명의로 왔다는 외교적 결례까지 있었다.

정묘호란 이후 광해군의 현상유지적 기미정책을 어느 정도 계승하여 후금의 무리한 요구까지도 대부분 받아들이곤 했던 인조 및 대신들은 이에 대해 격앙된 반응을 보였으나 (심지어 강경한 외교문서로 답하려는 기미도 있었다) 정묘호란으로 인해 상대가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대응문제로 시간을 끌게 되었는데, 그렇게 되자 후금 사신들은 조선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고 바로 돌아가면서 전운이 고조된다. 게다가 사신이 떠날 때 백성들이 돌팔매로 응수한 것도 사태를 키웠다. 조선의 강경한 반응에 따라온 몽골왕족들이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나라이니 후금이 황제가 된다면 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는데 어찌 이런 반응을 보이느냐?" 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소릴했다. 물론, 조선 입장에선 깡패 아니 역적이나 다름없었기에 이게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하지만 어느 전쟁이 그렇듯이 한 가지 이유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위와 같은 시각은 근본적으로 전쟁의 피해자에 원인이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의 본질적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당시 청나라는 누르하치 시대의 확장이 산해관에 막혀있던 상태였다. 이는 청태종(홍타이지) 때도 마찬가지 였다. 명나라는 만주족을 토벌하기 위해 여러번 군사를 파견했고, 광해군에게 조선군 파병을 요청했지만 결과는 사르후 전투가 보여주듯이 대실패로 끝이 났다. 하지만 1641년까지도 명나라의 군대는 요동을 지키고 있었다. 비록 청나라는 명나라의 토벌군을 전멸시켰지만,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치명적인 카운터를 맞는다. 바로 경제적 타격이다

청나라는 만주일대를 휩쓰면서 만주족을 비롯한 이민족 뿐만 아니라 한족을 대거 받아들이고, 몽고가 들어오면서 엄청난 속도로 인구가 불어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명나라와의 교역이 끊겼다는 것이다. 누르하치의 청나라는 본래 정벌과 교역을 병행하여, 부를 쌓으면서 성장했다. 하지만, 명나라와의 전쟁이 본격화 되자 교역이 끊기면서 청나라는 매우 심각한 경제상황에 처해진다. 이런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청나라는 대군을 동원하여 산해관을 공격해 중국 본토 침공을 노렸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14] 1625년이 되자 흉작과 겹쳐지면서 청나라의 경제적인 혼란은 심각해지는데, 특히 식량을 포함한 생필품의 가격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는다.

이때 청나라가 얼마나 다급했는지 명나라의 원숭환과 청 태종의 교신에서 볼 수 있는데, 처음에는 화의의 조건으로 막대한 예물을 요구했으나, 명에서 거부하자 점차 낮추더니 끝내는 화의에 약조한 양의 절반이라도라는 매우 굴욕적으로 물자를 애걸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대처에도 경제위기는 나아지지 않았고 1627년에는 4년전에 비해 식량값이 8배 이상 치솟게 된다. 특히 1627년의 식량 위기는 가장 격심했는데, 곡물값이 만주 신(1.8석)당 여덟 냥, 즉 1623년의 여덞 배로 올랐고, 사람을 잡아먹고 강도 질을 한다는 흉문이 돌았다. 새로 항복한 백성들에게 줄 양식이 없었고 곡식 창고는 비워 있었다. 게다가 새로 이주해온 한인들에게 줄 땅도 없었다. 게다가 1635년과 1637년에 또 식량 위기가 닥쳤다. 군대의 보급 부족은 만주의 군사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말은 너무 지치고 약해져 적을 추격하지 못했다(출처: 피터 퍼듀 - 중국의 서진) 이는 1621년부터 식량 배급을 실시하고 있던 청나라에게 엄청난 타격이었고, 요동지방에 명군이 있더라도 적당한 곳을 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미 랴오시에서 농업 생산을 늘리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부유한 지주들에게 가난한 이웃들에게 식량을 나눠주라고 권고해도 대체로 우이독경이었으며, 만주족은 그들이 떨어져 나갈까 봐 저가에 곡식을 팔라고 강제할 수도 없었다. 조선은 다시 한번 매력적인 목표가 되었다(출처: 피터 퍼듀 - 중국의 서진)] 이는 동시에 왜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키면서 속전속결을 원했는지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 후 인조는 조선 내에 전쟁대비를 하라는 강경한 선전(宣戰)의 교서를 내렸는데 그 교서들 중 한 장이 돌아가던 후금 사신들의 손에 넘어간다. 인조가 보내려던 강경한 외교문서도 백마산성에서 잠시 가로막혔으나 역시 후금 사신의 손에 넘어간다

이후로도 지휘관들을 교체하는 등 준전시체제로 돌입하나 대 후금 외교의 베테랑이던 박로가 "지금 우리 걔네 막을 힘 없어요.[15] 지금이라도 미안하다 하고 받아들여요."라고 상소를 올렸고 압록강이 얼어붙으면 끝장이라는 최명길의 상소도 뒤를 잇자 결국 화해를 요청하는 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인조는 강경론을 주도하며 전쟁분위기를 조성해놓고 정작 최명길을 비롯한 현실론의 반박이 있자 충격을 먹고는 자신에게 고무되어 최명길을 비판하는 삼학사등에게 젖비린내나는 애송이라고 꾸짖는 등 완전히 입장을 바꿨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러나 누가 이 조서를 가지고 갈 것이냐를 놓고 거진 7개월 동안 조정에서는 토론이 진행되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이런 조서를 가지고 간다 해서 그게 쉽게 받아들여질 것 같진 않고, 사신으로 가는 사람은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으니. 게다가 손놓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정묘화약때 우리와 명의 특별한 관계를 인정하고 애매하게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그쪽도 알잖슴? 칭제 인정건은 좀 넘어가 주세요."라는 취지의 글을 몇번씩 보냈지만 무반응이었다.

결국 11월에 이르러서야 화친 얘기를 꺼낸 박로가 사신으로 직접 가서 화해를 요청하기로 하고 출발했지만 사신으로 간 박로가 압록강을 채 넘기도 전에 청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다.[16]

4 전쟁의 발발과 흐름

1636년 12월 겨울, 청태종은 타타라 잉굴다이(용골대), 마푸타(Mafuta, 馬福大, 馬福塔)를 지휘관으로 하여 한족, 몽골인, 만주족 혼성부대 10만[17]을 거느리고 침공하였다. 청군은 안주, 평양, 개성을 차례로 함락하고 7일 만에 한성에 다다른다. 이는 상당한 무리수였는데 조선군이 보급선을 끊고 곳곳에서 압박에 들어간다면 관광을 당하는 쪽은 인조가 아니라 오히려 홍타이지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도 나름 생각이 있었는데, 당시 조선군이 임진왜란의 충격을 간신히 추스리던 참에 12년 전 이괄의 난이 터져 금쪽같은 평안도 북방 정예병 12,000명이 절단나버리는 바람에 청의 진격로 상에 제대로 된 군대가 아예 없었고 이를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최정예 함경도병을 포함해 2만 이상의 북방병을 거느린 도원수 김자점은 그냥 손놓고 아무것도 안했다.[18] 물론 의병을 일으키고 청군을 본격적으로 압박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었겠으나 불과 1주일밖에 되지 않는 시간은 그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렸다.

급보를 접한 조선은 두 왕자(봉림대군·인평대군)를 비롯한 비빈들과 문, 무반과 그 가족들을 우선 강화도로 피난가게 하고 인조는 소현세자와 함께 뒤따라가려 하였으나 이미 청군이 한강을 도하하여 김포와 통진 일대를 점령하는 바람에 강화도로 통할 길이 없어, 광주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당시 청군의 공격전략은 산성 따위는 무시하고 큰 길을 통해서 초고속으로 기동하는 것이었다. 조정도 손놓고 있었던 건 아니라서 일반적인 농성전에서 벗어나 산성에서 나와 방어진을 구축할 것을 명령했지만 북도 방위를 맡았던 도원수 겸 매국노 김자점은 이를 대놓고 무시했다. 그가 이끌던 함경도군 2만은 산성에 틀어박혀 방어에만 전념했던 것. 청태종은 인조와 조선 백성들에게 각각 문서를 보낸다.

인조에게 보낸 문서.

대청국 관온인성황제는 조선 국왕에서 조서를 내려 유시[19]한다.

우리 군대가 지난날 동쪽으로 우량하를 정벌했을 때 너희 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맞아 싸웠다. 그 뒤로 또 명나라를 도와서 우리에게 해를 끼쳤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생각해서 이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우리가 요동을 점령하게 되자, 너희는 다시 우리 백성들을 유인하여 명나라에 보냈다. 짐이 진노하여 정묘년에 군사를 일으켜 너희들 벌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다. 이로써 강대함을 믿고 약자를 업신여겨 이유없이 군대를 일으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너는 또 무엇 때문에 너희 변방 신하에게 글을 보내 "사세[20]가 부득이하여 무리한 요구에 얽혔지만, 이제는 정의로써 결단할 때이니, 경은 여러 고을을 깨우쳐서, 충의의 인사로 하여금 지략을 다하게 하고, 용감한 자로 하여금 정벌하는 대열에 따르게 하라'라고 했느냐. 이제 짐이 몸소 대군을 통솔해서 싸우러 왔다. 너는 왜 지모있는 자로 하여금 계책을 다하게 하고, 용감한 자로 하여금 싸우는 대열에 나서게 해서 친히 일전(一戰)을 시도하지 않느냐.

짐은 결코 힘의 강대함을 믿고서 남을 침범하려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도리어 약소한 국력으로써 우리의 변경을 소란하게 하고, 우리의 지경 안에서 인삼을 캐고 사냥을 했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그리고 짐의 백성으로 도망자가 있으면 너희가 이를 받아들여 명나라에 보냈으며, 명나라 장수 공유덕과 경중명 두 사람이 짐에게로 귀순코자 했을 때 짐의 군대가 그들을 맞이하러하자 너희 군대가 총을 쏘며 이를 가로막아 싸운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

이번 전쟁의 원인은 실로 너희 나라에 있다. 짐의 아우와 조카 등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으나 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정묘년에 네가 섬으로 도망가서 화친을 애걸했을때 바로 그 왕들 앞으로 글을 보내지 않았더냐. 짐의 조카나 아우가 어찌 너만 못하단 말인가.

그리고 외번의 여러 왕들이 너에게 글을 보냈는데 너는 여전히 거절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당당한 원나라 황제의 후손인데 어찌 또 너만 못하랴. 원나라 때 조선은 공물을 바치기를 그치치 않았다. 오늘날 어찌 하루 아침에 이처럼 오만해졌단 말이냐. 그들이 보낸 글을 거절해서 받지 않은 것은 너희 혼암과 교만이 극도에 이른 것이다. 너희 조선은 요, 금, 원 세나라에 대하여 해마다 공물을 받치고 신(臣)이라 일컬었었다. 예로부터 너희 나라는 신하로서 북쪽을 바라보면서 남을 섬겨 평안을 보전하지 않은 때가 있었단 말이냐.

짐이 이미 너희 나라를 아우로 대했는데도 너는 갈수록 배역[21]하여 스스로 원수를 만들고 백성들을 도탄에 몰아넣었다. 성곽을 비우고 궁궐을 버려서 처자와 헤어지고 단신으로 산성으로 도망쳐 들어가 설사 목숨을 연장하여 천년을 산들 무슨 이로움이 있겠느냐. 정묘년의 치욕을 씻느다면서 지금의 이 치욕은 어떻게 씻을 것인가. 정묘년의 치욕을 씻으려한다면 무엇 때문에 몸을 움츠리고 들어앉아서 울타리 안에 사는 부녀자의 짓을 본받는단 말인가. 네가 비록 이 성안에 몸을 숨기어 구차스럽게 살기를 바라지만 짐이 어찌 너를 그대로 버려 두겠느냐.

짐의 내외 여러 왕과 문무의 신하들이 짐에게 황제의 칭호를 권하여 올렸다. 너는 이 말을 듣고 이르기를 "이것이 어찌 우리 군신이 차마 듣고 참을 수 있는 말인가" 했다는데 이는 또 무슨 까닭이냐. 무릇 황제의 칭호를 올리고 안올리는 것은 너에게 달려 있지 않다. 하늘이 도우면 평범한 지아비도 천자가 될 수 있고 하늘이 재앙을 내리면 천자도 한 이름없는 사내가 되는 것이니, 네가 한 말은 심히 방자하고 망령스럽다.

또한, 맹약을 어기고, 성을 수축하였으며, 우리의 사신을 접대하는 예의가 소홀했다. 또 우리의 사신이 가서 너희 나라 재상을 만났을때 계교를 써서 우리 사신을 사로 잡으려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명나라는 부모의 나라로 섬기면서 우리를 해치려 꾀했음은 또 무슨 까닭인가. 이상은 너의 죄목 중에 큰 것을 들었을 뿐이고, 그 밖의 사소한 것은 이루 열거하기 어렵다.

이제 짐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너의 8도를 무찌르려고 하는데, 네가 부모처럼 섬기는 명나라가 장차 어떻게 너희를 구해 주는지 보고 싶다. 자식의 위급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부모된 자가 어찌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는 네가 스스로 무고한 인민을 물불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니, 억조의 많은 사람들이 어찌 너를 탓하지 않으랴. 만일 할 말이 있거든 서슴치 말고 소상하게 알려라.

지금까지 강대국들에게 사대해놓고 우리에게만 까불었지? 어디 너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명나라가 도우러 오는지 안오는지 보자꾸나 정도가 되겠다. 근데 인조에게 보낸 이 문서는 조선왕조실록에는 누락되어 있고 병자록과 청나라 실록에만 실려 있다. (다만 승정원일기에는 비슷한 내용이 있다.) 근데 신하들과 인조가 이 문서를 받고 열받아서 길길이 뛰는 내용은 또 있다.

조선 백성들에게 보낸 포고.

"대청국(大淸國)의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朝鮮)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고유(誥諭)한다. 짐(朕)이 이번에 정벌하러 온 것은 원래 죽이기를 좋아하고 얻기를 탐해서가 아니다. 본래는 늘 서로 화친하려고 했는데, 그대 나라의 군신(君臣)이 먼저 불화의 단서를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짐은 그대 나라와 그 동안 털끝만큼도 원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그대 나라가 기미년에 명나라와 서로 협력해서 군사를 일으켜 우리 나라를 해쳤다. 짐은 그래도 이웃 나라와 지내는 도리를 온전히 하려고 경솔하게 전쟁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요동(遼東)을 얻고 난 뒤로 그대 나라가 다시 명나라를 도와 우리의 도망병들을 불러들여 명나라에 바치는가 하면 다시 저 사람들을 그대의 지역에 수용하여 양식을 주며 우리를 치려고 협력하여 모의하였다. 그래서 짐이 한 번 크게 노여워하였으니, 정묘년에 의로운 군사를 일으킨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때 그대 나라는 병력이 강하거나 장수가 용맹스러워 우리 군사를 물리칠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러나 짐은 생민이 도탄에 빠진 것을 보고 끝내 교린(交隣)의 도를 생각하여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우호를 돈독히 하고 돌아갔을 뿐이다.

그런데 그 뒤 10년 동안 그대 나라 군신은 우리를 배반하고 도망한 이들을 받아들여 명나라에 바치고, 명나라 장수가 투항해 오면 군사를 일으켜 길을 막고 끊었으며, 우리의 구원병이 저들에게 갈 때에도 그대 나라의 군사가 대적하였으니, 이는 군사를 동원하게 된 단서가 또 그대 나라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가 우리를 침략하기 위해 배를 요구했을 때는 그대 나라가 즉시 넘겨 주면서도 짐이 배를 요구하며 명나라를 정벌하려 할 때는 번번이 인색하게 굴면서 기꺼이 내어주지 않았으니, 이는 특별히 명나라를 도와 우리를 해치려고 도모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신이 왕을 만나지 못하게 하여 국서(國書)를 마침내 못보게 하였다. 그런데 짐의 사신이 우연히 그대 국왕이 평안도 관찰사에게 준 밀서(密書)를 얻었는데, 거기에 ‘정묘년 변란 때에는 임시로 속박됨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정의에 입각해 결단을 내렸으니 관문(關門)을 닫고 방비책을 가다듬을 것이며 여러 고을에 효유하여 충의로운 인사들이 각기 책략(策略)을 다하게 하라.’고 하였으며, 기타 내용은 모두 세기가 어렵다.

짐이 이 때문에 특별히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대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은 실로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단지 그대 나라의 군신이 스스로 너희 무리에게 재앙을 만나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집에서 편히 생업을 즐길 것이요, 망령되게 스스로 도망하다가 우리 군사에게 해를 당하는 일이 일체 없도록 하라. 항거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고 순종하는 자는 반드시 받아들일 것이며 도망하는 자는 반드시 사로잡고 성 안이나 초야에서 마음을 기울여 귀순하는 자는 조금도 침해하지 않고 반드시 정중하게 대우할 것이다. 이를 그대 무리에게 유시하여 모두 알도록 하는 바이다.
1637년 1월 2일.

즉 난 너네 나라가 자꾸만 우리에게 시비 걸어도 자비롭게 참고 친하게 지내려 했는데 이게 다 인조와 조선 조정 때문이다. 그러니 쓸데없이 달아나거나 항전하지 말고 생업에나 종사해라?로 요약된다.

이후 각지에서 방어하려 했던 조선군이 황급히 한성으로 집결해 근왕을 하거나 평지에서 적을 막으려 했으나 대부분은 이미 청군보다 움직임이 한참 늦었으며, 거기에 한심한 지휘관 때문에 패하거나 고립되는 상황이었다.

청군은 식량 등의 물자를 현지에서 조달하며 기동력을 발휘해 한성에 들이닥첬다. 현지조달로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으니 청군도 상당한 모험을 벌인 것이었다.[22] 일단 내몽골은 정리했지만 배후에는 아직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명나라군이 있었으며, 당시 만주에는 기근이 들어서 식량도 부족했다. 청이 비록 요동의 한족 인구를 흡수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인구에서는 조선이 많았으며, 청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후방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오직 "왕"만 노리고 공격해왔다.

조선군으로서는 민간의 막심한 피해를 무릅쓰고 청야전술을 시행하는 것이 방어전략의 핵심이었다. 인조가 멀리 도망치면서 근왕군을 모으고, 청군의 기세를 죽이면서 시간을 끌어서 청이 더 이상 못 버티고 물러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조선의 전략이었다. 조선이 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있었다면 청군으로서는 영락없이 여수전쟁 때의 우중문, 여요전쟁 때의 소배압 꼴 나기 십상이었겠지만, 조선군의 전략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23] 애당초 성 방위군을 제외하고 전략적으로 기동할 수 있는 야전군이 집결해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수전쟁, 여요전쟁같은 전략을 제대로 운용하기 어려웠다.[24]

조선군은 청군을 제대로 저지조차 못했고, 한성은 개전한지 단 일주일만에 함락 당해 임진왜란 때의 기록(29일)을 큰 차이로 갱신했으며,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갈 시간조차 충분히 벌지 못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후방으로 도망칠 수도 있었겠지만 제대로 된 군대랑 기동력 하나 없는 상황에서 이는 청군의 포로가 되겠다고 자처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의 방위력은 충분 이상이라 평할 수 있었고, 실제 40여 일간 벌어진 공방전에서 대부분 조선군이 선전했다. 12월 18일에는 원두표가 응모한 군사들이 출전해 6명의 청군을 죽였고, 이틀 뒤 20일에는 신경진의 군사가 출전해서 30명의 청군을 죽이며 청군의 진입을 저지했다 하며, 심지어 19일에 청군이 공성을 위해 서양 대포인 홍이포를 남성으로 끌고 와 쐈을 때는 되려 천자총통으로 홍이포를 저격(…)해 버리는 위엄을 과시하기도 했다. 치밀했던 청군이 유일하게 고려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처 성 외부에 있던 식량고에서 성 안으로 식량을 운반하지 못 해,[25] 남한산성 안의 식량은 쌀 1만 4천여 섬, 간장 100여 독에 불과하였다. 군사 1만 2천여 명이 먹기에는 겨우 50여 일 분. 더구나 그해 병자년 겨울은 정말 추웠기 때문에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 결국 포위된지 45일 만에 식량 결핍과 추위로 말미암아 성내의 장병은 방어할 기력을 거의 잃게 된다.

물론 조선군이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어서 곧 남한산성을 구원하기 위한 근왕병이 사방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통합된 지휘와 물자보충이 이뤄지지 않아 각자 알아서 진격하는 상황이 연출되었고 이때문에 청군은 손쉽게 각개격파를 노릴수 있었다. 게다가 인조정권 이래 집중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한 중앙군과 달리 지방군은 훈련도가 제각각이었다.[26]

대표적인 패배 케이스가 청군 선봉 기병 300명 병력에게 대군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주한 쌍령 전투이다. (쌍령 전투는 조선군이 청군을 단기 결전으로 뚫을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사례.)[27]

그래도 조선군이 아주 깨지고만 있던 것은 아니어서 광교산 전투김화 전투 에서는 전라도 지방군과 평안도 지방군이 값진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특히 광교산 전투에서는 청 태종의 사위 양굴리(Yangguri 揚古利, 楊古利, 樣吉利, 白羊高羅)를 비롯한 청군의 굵직한 장수 세 명을 조총으로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체계적인 병력과 군수지원이 이뤄지지 못해 전과를 세우고도 퇴각해야 했다.

조선 최정예 병력인 함경도군 2만을 거느린 도원수 김자점은 태세를 정비한다며 성이 포위당한 수십일간 아무 것도 하지않고 가만히 있었다. 초기에 김자점은 수천의 병력을 이끌고 청군과 교전에 나섰다 도망쳤고[28] 이후 함경도군이 와서 김자점군에 합류했음에도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애시당초 홍타이지는 후방 따위는 무시하고 무작정 밀고 들어와 청군의 상태도 결코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배후에서 타격에 나섰다면 장기전에서 김자점이 역관광당해서 캐발살났더라도 남한산성의 포위망은 숨돌릴 틈을 얻었을 것이며, 김자점은 그토록 욕을 먹지 않았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 홍타이지는 빈손으로 퇴각하고 심지어는 명군의 카운터로 청나라가 크게 위태하였을수도 있었을 것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갇혀 있었던 탓에 근왕군은 남한산성 구원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으며,[29] 지휘권이 분산되어 있어서 통일적인 움직임도 보이지 못했다. 물론 지휘권을 통일했다 해도 그 전력이 속오군이었기에 청군의 상대가 되지 않아 격파-후퇴-반격-격파-후퇴를 반복하게 된다. 사실 대규모의 병력이 집결만 했어도 청군에게는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청나라가 이자성을 칠 때 동원한 병력이 18만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당시 청은 명을 견제할 최소한의 병력 외에는 다 끌고 내려온 것이었다. 당시 조선 속오군은 8도 속오군을 다 합쳐 8만이었다. 후방도 전혀 안정되지 않고 10만이 그대로 수도권에 대기타고 있는 상황에서 10만 가까운 조선군이 집결하기만 해도 청은 남한산성의 포위를 오랫동안 지속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에 대해 집결명령을 내릴 수 있는 명령권자- 즉 도원수 김자점이 지휘를 사실상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에 통일적 움직임이 없다시피 했다.

청군은 비록 대포까지 동원하고도 조선 본진인 남한산성 공략에는 끝내 실패했으나, 계속되는 조선군의 구원을 물리치면서 남한산성 내의 인조와 장병들을 심리적으로 강하게 압박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조가 버티자 결국 강화도를 공격했는데 당시 방어를 맡았던 김경징이 제대로 싸우지 않으면서 청나라 수군에게 강화도가 함락되고 말았다. 세자와 왕족들은 남한산성으로 압송되었고, 이 소식을 접한 인조는 얼마 후 항복을 결정하고 삼전도로 가게 된다.

인조가 항복한 이유는 간단하다. 다 끝났기 때문이다. 조선군의 상태는 이미 쌍령 전투로 증명되었고, 남한산성 함락도 사실상 시간문제인 상황이었기 때문. 물론 인조가 포로가 되거나 전사한다고 해도 강화도가 건재했다면 조선군의 저항은 지속되었을지 모른다. 어떻게든 이렇게 버텼다면 대몽항쟁 때와 달리 장기전에 대한 대책도 없던 청군은 그냥 철수하거나 인조만 잡아가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인데, 강화도가 함락됨으로써 조선 정부 전체가 완전히 궤멸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항복을 거부한다면 최소한 백제 멸망 때처럼 인조와 그 자손들은 조선 왕좌를 지키지 못하는건 당연하고 심지어는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

5 결과와 영향

음력 1월 10일 이후 최명길 등이 여러 차례 청군과 화평교섭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몇차례 망신을 당하기도 했고 강화도가 함락되었단 소식에 마침내 전의를 상실하여 1월 27일에 항복문서를 보낸다.

조선 국왕 신 이종[30]은 삼가 대청국 관온 인성 황제 폐하께 글을 올립니다. 신이 이달 20 일에 성지(聖旨)를 받들건대 ‘지금 그대가 외로운 성을 고달프게 지키며 짐이 절실히 책망하는 조서(詔書)를 보고 바야흐로 죄를 뉘우칠 줄 아니, 짐이 넓은 도량을 베풀어 그대가 스스로 새로와지도록 허락하고, 그대가 성에서 나와 짐을 대면하도록 명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그대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복종하는지 확인하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그대에게 은혜를 베풀고 전국(全國)을 회복시켜줌으로써 회군한 뒤에 천하에 인애와 신의를 보이려고 함이다. 짐이 바야흐로 하늘의 돌보심을 받들어 사방을 어루만져 안정시키니, 그대의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함으로써 남조(南朝)의 본보기를 삼으려 한다. 만약 간사하게 속이는 계책으로 그대를 취한다면 천하가 크기도 한데 모두 간사하게 속여서 취할 수 있겠는가. 이는 와서 귀순하려는 길을 스스로 끊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성지를 받들고서부터 천지처럼 포용하고 덮어 주는 큰 덕에 더욱 감격하여 귀순하려는 마음이 가슴 속에 더욱 간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신 자신을 살펴보건대 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에, 폐하의 은혜와 신의가 분명하게 드러남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서를 내림에 황천(皇天)이 내려다 보는 듯하여 두려운 마음을 품은 채 여러 날 머뭇거리느라 앉아서 회피하고 게을리하는 죄만 쌓게 되었습니다. 이제 듣건대 폐하께서 곧 돌아가실 것이라 하는데, 만약 일찍 스스로 나아가서 용광(龍光)을 우러러 뵙지 않는다면, 조그마한 정성도 펼 수 없게 될 것이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신이 바야흐로 3백 년 동안 지켜온 종사(宗社)와 수천 리의 생령(生靈)을 폐하에게 우러러 의탁하게 되었으니 정리(情理)상 실로 애처로운 점이 있습니다. 만약 혹시라도 일이 어긋난다면 차라리 칼로 자결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진심에서 나오는 정성을 굽어 살피시어 조지(詔旨)를 분명하게 내려 신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소서.

최명길은 인조의 굴욕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곤룡포를 입을 것을 허락해줄 것과 삼배구궤두 대신에 남한산성에서 태종을 향해 절을 하는 것 정도로 의식을 대신하는 것을 제안하는 등 최대한 노력했지만 용골대는 완강했고 죄인인 인조가 정문인 남문으로 나오는 것도 허락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이날 김상헌과 정온이 자결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1월 28일 청태종의 답변이 도착한다.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 국왕에게 조유(詔諭)한다. 보내온 주문(奏文)을 보건대, 20일의 조칙 내용을 갖추어 진술하고 종사(宗社)와 생령(生靈)에 대한 계책을 근심하면서 조칙의 내용을 분명히 내려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청하였는데, 짐이 식언(食言)할까 의심하는 것인가. 그러나 짐은 본래 나의 정성을 남에게까지 적용하니, 지난번의 말을 틀림없이 실천할 뿐만 아니라 후일 유신(維新)하게 하는 데에도 함께 참여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지난날의 죄를 모두 용서하고 규례(規例)를 상세하게 정하여 군신(君臣)이 대대로 지킬 신의(信義)로 삼는 바이다.

그대가 만약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롭게 하여 은덕을 잊지 않고 자신을 맡기고 귀순하여 자손의 장구한 계책을 삼으려 한다면, 앞으로 명(明)나라가 준 고명(誥命)과 책인(冊印)을 헌납하고, 그들과의 수호(修好)를 끊고, 그들의 연호(年號)를 버리고, 일체의 공문서에 우리의 정삭(正朔)을 받들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는 장자(長子) 및 재일자(再一子)를 인질로 삼고, 제대신(諸大臣)은 아들이 있으면 아들을, 아들이 없으면 동생을 인질로 삼으라. 만일 그대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면 짐이 인질로 삼은 아들을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할 것이다.[31]

그리고 짐이 만약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조칙을 내리고 사신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보병(步兵)·기병(騎兵)·수군을 조발하거든, 혹은 수만 명을 기한내에 모이도록 하여 착오가 없도록 하라. 짐이 이번에 군사를 돌려 가도(椵島)를 공격해서 취하려 하니, 그대는 배 50척을 내고 수병(水兵)·창포(槍砲)·궁전(弓箭)을 모두 스스로 준비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대군이 돌아갈 때에도 호군(犒軍)하는 예(禮)를 응당 거행해야 할 것이다.

성절(聖節)·정조(正朝)·동지(冬至) 중궁 천추(中宮千秋)·태자 천추(太子千秋) 및 경조(慶吊) 등의 일이 있으면 모두 모름지기 예를 올리고 대신 및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표문(表文)을 받들고 오게 하라. 바치는 표문과 전문(箋文)의 정식(程式), 짐이 조칙을 내리거나 간혹 일이 있어 사신을 보내 유시를 전달할 경우 그대와 사신이 상견례(相見禮)하는 것, 혹 그대의 배신(陪臣)이 알현(謁見)하는 것 및 영접하고 전송하며 사신을 대접하는 예 등을 명나라의 구례(舊例)와 다름이 없도록 하라.

군중(軍中)의 포로들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고 나서 만약 도망하여 되돌아 오면 체포하여 본주(本主)에게 보내도록 하고, 만약 속(贖)을 바치고 돌아오려고 할 경우 본주의 편의대로 들어 주도록 하라. 우리 군사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다 사로잡힌 사람은 그대가 뒤에 차마 결박하여 보낼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내외의 제신(諸臣)과 혼인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하도록 하라. 신구(新舊)의 성벽은 수리하거나 신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대 나라에 있는 올량합(兀良哈) 사람들은 모두 쇄환(刷還)해야 마땅하다. 일본(日本)과의 무역은 그대가 옛날처럼 하도록 허락한다. 다만 그들의 사신을 인도하여 조회하러 오게 하라. 짐 또한 장차 사신을 저들에게 보낼 것이다. 그리고 동쪽의 올량합으로 저들에게 도피하여 살고 있는 자들과는 다시 무역하게 하지 말고 보는 대로 즉시 체포하여 보내라.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아나게 하였으며, 거의 망해가는 그대의 종사(宗社)를 온전하게 하고, 이미 잃었던 그대의 처자를 완전하게 해주었다. 그대는 마땅히 국가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를 생각하라. 뒷날 자자손손토록 신의를 어기지 말도록 한다면 그대 나라가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짐은 그대 나라가 되풀이해서 교활하게 속였기 때문에 이렇게 교시(敎示)하는 바이다. 숭덕(崇德) 2년 정월 28일.

세폐(歲幣)는 황금(黃金) 1백 냥(兩), 백은(白銀) 1천 냥, 수우각궁면(水牛角弓面) 2백 부(副), 표피(豹皮) 1백 장(張), 다(茶) 1천 포(包), 수달피(水㺚皮) 4백 장, 청서피(靑黍皮) 3백 장, 호초(胡椒) 10두(斗), 호요도(好腰刀) 26파(把), 소목(蘇木) 2백 근(斤), 호대지(好大紙) 1천 권(卷), 순도(順刀) 10파, 호소지(好小紙) 1천 5백 권, 오조룡석(五爪龍席) 4령(領), 각종 화석(花席) 40령, 백저포(白苧布) 2백 필(匹), 각색 면주(綿紬) 2천 필, 각색 세마포(細麻布) 4백 필, 각색 세포(細布) 1만 필, 포(布) 1천 4백 필, 쌀 1만 포(包)를 정식(定式)으로 삼는다.

인조는 음력 1월 30일 성문을 열고 왕세자와 함께 삼전도(오늘날의 송파구에 있었던 하중도)에 설치한 수항단에서 청 태종에게 갓에 철릭 차림으로 삼궤구고두의 항복 의식을 치른다. 후에 이것은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불리게 된다. 해당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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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은 조선을 멸망시키는 것까지는 어려웠다고 해도[32] 인조를 잡아가거나 혹은 퇴위시키고 세자 및 다른 왕족을 왕으로 대신 세움으로써 원나라가 그랬든 조선을 보다 직접적으로 조종할 수도 있었다. 애시당초 전쟁 패배 책임만으로도 인조가 퇴위당할 이유는 충분했으니까. 그런데 청은 그러지 않았다.[33] 요나라나 금나라 예처럼 한반도에 발목을 잡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가능성도 있고, 조선이 생각 외로 극렬하게 저항하는 대신 조용히 항복을 택하고 패전에 따른 복종의사를 표시해서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34] 그 외에 다양한 가능성이 있지만, 진짜 본심은 그 당사자들 외에는 알 수 없다. 여하간 청은 목표했던 물자를 해결했고, 후방의 위협을 제거한 것이다.

어쨌든 결국 조선은 청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강화조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명 황제가 수여한 고명, 책인[35]을 바칠 것.
  • 명과의 국교를 끊고 청과 군신관계를 맺을 것.
  • 명의 연호 대신 청의 연호를 쓸 것.
  • 세자, 왕자 및 대시의 자제를 청의 수도(심양)에 인질로 보낼 것.
  • 청이 명과 가도[36]를 공격할 때 원병을 보낼 것.
  • 정기적으로 조선은 청에 사신을 파견할 것.
  • 조선의 인질이 조선으로 도망할 경우 무조건 심양으로 송환할 것.[37]
  • 양국 신하 자제들과의 통혼을 장려, 우의를 다질 것.
  • 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짓지 말 것.[38]
  • 조선은 매년 예물을 청에 세폐로 보낼 것.

세폐의 양은 황금 100냥, 백은 1,000냥, 수우각궁면(水牛角弓面; 활을 만들 때 필요한 소의 뿔[39]) 200우, 표범 가죽 100장, 차 1,000포, 수달 가죽 400장, 청서피(靑黍皮; 다람쥐류의 가죽) 300장, 후추[40](胡椒) 10두, 호요도(好腰刀) 26자루, 단목(丹木; 소목(蘇木)이라고도 하며 붉은 물감의 원료로 주로 천을 붉게 물들일 때 쓴다.) 200근, 호대지(好大紙) 1,000권, 순도(順刀) 10자루, 호소지(好小紙) 1,500권, 오조룡석(五爪龍席; 화문석의 일종) 4령(嶺), 각종 화석 40령, 백저포(白苧布; 흰모시) 200필, 각색 면주(綿紬; 명주) 2,000필, 각색 세마포(細麻布) 400필, 각색 세포(細布; 麻布) 10,000필, 포(布) 1,400필, 쌀 10,000포.
이로써 조선은 개국 이래 이어오던 명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이 청과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다.

요구사항을 놓고 보면, 일단 세폐가 어마어마한 수치로 늘었다. 이는 나라에 보내던 조공품의 몇배에 달하고 병자호란 이전에 청의 공갈협박에 보내던 세폐의 3배에 달하는 수치다. 거기다 예전 중화제국이 관례로 보답하는 하사품도 별거 안내줘서 그야말로 등골 빠지는 수준의 세폐를 요구했다. 임란 이후 명 사신들이 와서 뜯어가는 걸 고려한다 해도 청나라의 요구로 세폐가 너무 크게 늘어서 조선이 지는 부담은 엄청나게 가중되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이는 청이 세폐를 전쟁 배상금 명목으로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 명나라 공격에 원정군을 자비로 파견해야 했다는 점도 엄청난 부담이였다. 실제로 조선군이 참전한 전투 중에는 나중에 항복한 명군 장수들이 조선군의 저격[41]에 피해가 컸다며 이를 가는 경우도 있었다. 거기다 청은 전쟁 직후 귀환할 때도 약탈을 해대서 치를 떠는 기록이 존재하며, 남하시 현지보급으로 초토화된 서북방면 대신 약탈을 피했던 함경도 방면으로 귀환하는 등 계획적으로 강간 약탈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여 북도 일대의 피해는 가중되었다.

물론 장기적으로 보면 임진왜란 이후의 명나라에 사대하던 시절보다 크게 나빠진 게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어마어마했던 세폐도 청이 입관한 이후 크게 줄였고 하사품이 늘어나 이전의 정상적인 조공외교 관계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 사이에 뜯긴 걸 돌려주지는 않았기에 조선은 전쟁에서 진 대가를 분명히 치러야 했다.

무엇보다 자신들에게 조공을 하던 오랑캐에게 반대로, 조공관계를 맺는 속국이 된 사실[42] 조선인들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이는 가히 윤관의 여진 정벌 이후 순식간에 완안아골타의 금나라가 군신관계를 주장한 상황 그 이상이었다. 생각해보자. 청나라 황실의 조상 몽케티무르는 소시적 태조 이성계의 부하였고, 세종대왕 때는 4군 6진의 땅을 뜯어내기도 했고, 유목민[43] = 예비 약탈자라는 상황 탓에, 약탈하러 오기 전에 작살내 놓자는 생각으로(예방전쟁) 조선군이 틈틈히 쳐들어가서 여진족의 농토에 소금을 뿌리고 건물들을 작살내는 통에 노약자들이 울부짖었다는 기록도 많다. 그러니까 조선 초의 여진족은 그냥 조선군과 명군의 동네북이였다. 그것이 이렇게 뒤집힌 것이었다.

또한 당시 청군이 끌고 간 "환향녀" 문제는 당시 조선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들 중 상당수가 나중에 조선으로 귀환하여 시가(媤家)를 다시 찾았는데 인조가 직접 강간피해는 이혼의 대상이 아니라며 내치지 말라고 명령했음에도 사대부들이 무시함으로써 조선의 평판을 크게 깎는 데 기여했다. 결국 이들 대부분은 비구니가 되거나 아니면 친정으로 돌아가거나, 이도 저도 아닌 경우에는 성매매를 하게 된다.

조선은 얼마 뒤 멸망한 명나라에 비해 매우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고 하는데 사실 전혀 그렇지가 않다. 청이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은 것은 최초의 전략적 목표가 명을 치기 전에 후방을 안정하게 위해서였기에 당연히 인조는 퇴위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지만 여러 방법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었다. [44] 그나마 무엇보다 탈출한 조선인들에 대한 청나라의 강제적인 송환 요구도 초기의 일이지, 나중에는 적당히 눈감아주는 쪽으로 바뀐다.[45]라는데 애초에 청나라가 도망친 조선 백성들을 적당히 눈 감아준 이유 자체가 나중에 쳐들어 올떄보다 한숨 돌려서 먹고 살만해졌기 때문이다

조선은 속된 말로 삥을 뜯겼지만 명나라처럼 점령당하지도 않고, 한족들처럼 변발로 머리가 밀리는 등 풍습에 변화를 겪지도 않았다는데 애초에 전략적 목표 자체가 명이라는 주목표를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니 목적이 당연히 점령이 아니니까 변발을 안 당한 것이다

당시 동북아시아 각국의 군사적, 외교적 관계가 어느 정도 적용이 되었겠지만, 청이 조선에 대해 매우 호감을 가졌음을 엿볼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이 있는데, 말이 안된다 청이 조선에게 매우 호감을 가져서 한겨울에 심양까지 끌려가는 도중에 죽은 사람들 빼고 도착한 조선 포로들이 60여만 명이나 된다. 고위 왕족들이 조선 여인과 결혼을 하려 한 경우는 극소수였으며 대부분 포로 신분으로 첩으로 끌려간 조선 여인들은 청나라인 남편이나 본처들에게 심한 학대를 받아 죽거나 장애인이 되는 경우가 많아져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에 청 태종 홍타이지가 조선 여인을 학대하는 남편은 처벌하고 조선인 첩을 학대한 본처는 남편 사망시 무조건 순장하도록 칙령을 내릴 정도였다. 조선 여인들의 입장에선 그저 병 주고 약 주기일 뿐이었겠지만 조선 여인들 : 우릴 포로로 끌고 와놓고 이제 와서 법으로 보호해주겠다고? 명을 칠 때 조선을 끌어들이거나, 러시아가 남하하자 나선정벌에서 병력을 요청한 경우도 청이 조선에게 호감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호란 때 이미 청측에서 조선군의 조총병에 대한 평이 높았다. 그렇기에 조선군을 철저하게 고기방패로 이용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전쟁의 승리로 청은 뒷통수가 약간 근질근질하던 후방을 단단히 다져두었고, 경제 문제를 상당히 해결했으며, 명을 공격하는데 모든 전력을 쏟아부을 수 있게 되었다.

여담으로 인조는 왕좌를 지킨 이후에 대대적인 처벌극을 벌여 김경징, 장신을 비롯해서 강화도에서 달아났던 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고 호종하지 않은 신하들과 근왕병을 데리고 오지 않은 장수들을 적을 눈앞에 두고 임금을 벌리고 달아난 죄를 물어 엄벌했다. 이때 김자점도 도원수가 되어 뭉기적거리고 있었다고 처벌당했으나 이후 강빈의 사사와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 때 인조에게 영합함으로 최고 권신 자리를 차지한다.신도 부처도 없는가 그리고 호종한 신하들에겐 상을 주었으나 김상헌, 김상용 등에게는 영 좋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강도(江都) 수호의 임무를 받은 제신(諸臣)들이 방어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날이나 보내면서 노닐다가 적의 배가 강을 건너자 멀리서 바라보고 흩어져 무너진 채 각자 살려고 도망하느라 종묘와 사직 그리고 빈궁(嬪宮)과 원손(元孫)을 쓸모없는 물건처럼 버렸을 뿐 아니라 섬에 가득한 생령(生靈)들이 모두 살해되거나 약탈당하게 하였으니, 말을 하려면 기가 막힙니다.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 부사(副使) 이민구(李敏求), 강도 유수(江都留守) 장신(張紳), 경기 수사 신경진(申景珍), 충청 수사 강진흔(姜晋昕)은 모두 율을 적용하여 죄를 정하소서.

군부(君父)가 외로운 성에 거의 두 달이 되도록 포위당하여 군사는 고단하고 양식은 적어 조석을 보전할 수 없었으므로 머리를 들고 발돋움하며 구원병이 이르기만을 날마다 기다렸지만 팔도의 군사를 거느린 신하로 한 사람도 성 밑에서 예봉을 꺾고 죽기를 다투는 이가 없었으니, 군신(君臣)의 분수와 의리가 땅을 쓴 듯 없어졌습니다. 함경 감사 민성휘(閔聖徽), 전라 감사 이시방(李時昉), 경상 감사 심연(沈演), 황해 감사 이배원(李培元), 북병사 이항(李沆), 남병사 서우신(徐佑申), 전라 병사 김준룡(金俊龍), 황해 병사 이석달(李碩達), 경상 좌병사 허완(許完), 충청 병사 이의배(李義培)를 모두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김경징·이민구·장신 등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신경진·강진흔 등은 그들이 지킨 곳을 김경징에게 물은 뒤에 처치하라. 민성휘 등은 용서할 만한 도리가 없지 않으니 우선 죄를 논하지 말라. 삼남(三南)의 병사는 이미 죄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하였다.

6 영향과 평가

병자호란은 그 피해가 임진왜란보다 상대적으로 경미했다고 생각될 수 있으나 그 충격과 영향은 임진왜란에 못지 않게 조선에 큰 타격을 주었다.

오늘날 조선 중기는 사극에서도 역덕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시기이지만 호란에 대한 관심은 왜란과 비교조차 안될 정도로 미미하다. 왜란은 시작은 안습했을지언정 마지막은 침공자를 몰아내는 통쾌함이나마 있었거니와 이순신 등 수많은 명장들이 활약하며 이야기거리를 양산했지만, 호란은 시작부터 끝날때까지 안습의 연속이라 완전히 흑역사가 되어버렸다.[46] 추노(드라마) 정도가 그에 근접한 시대를 다루었고, 병자호란 시대를 다루려는 추노2가 기획되었으나 현재까지는 깜깜 무소식.

흑역사지만 여러 매체에 역사물을 다룬 작품들 중에서 임진왜란과는 다르게 의외로 침략자에 대해 관대하게 평가받는 해괴랄한 역사이기도 한데, 심지어 어느 매체에서는 청나라에 우호적이지 않은 집단들은 대차게 까이기까지 한다(...). 여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아래와 같은 이유가 주된 이유인 것으로 보인다.

1. 전쟁기간이 3달 정도로 지극히 짧았다. 그만큼 기록도 적고 극적인 요소도 적어 청군의 만행이 덜 알려졌다. 바로 앞에 임진왜란 7년 전쟁이 있었으므로 아무래도 비교가 된다.
2. 일제시대 일본학자들이 정착시킨 만선사관과 광해군 긍정론[47]의 영향이다. 한반도의 역사를 만주에 딸려가는 부속품으로 여기니 당연히 무작정 숙이고 들어가지 않은게 문제라는 인식이 생겼고 광해군에 대한 대책없는 긍정론이 퍼지면서 전쟁을 피할 수 없었던 정황은 무시되고 인조 정권에 근거없는 비난이 쏟아졌다. 당장 병자호란의 원인을 청에게서 찾게 된게 언제적 일인지 생각해보자? 그나마 그것도 사학계 이야기고 대중역사학은 아직도 때린 놈이 아니라 맞은 놈에게서 원인을 찾고있다.[48]

그리고 동시에 사르후 전투 이후 후금이 기적적인 승리를 보이자[49] 국방에 관심을 보이는 모습도 광해군일기와 인조실록에도 기록이 되어있는데 광해군 대에 북방에 배치한 숫자들의 병력은 상당했고, 무기들도 꾸준히 지원하고 군사훈련도 자주 시키는 모습이 보이며 쓸만한 무장들을 골라내 배치시키며 이 때 정충신남이흥 같은 유능한 장수들이 발탁되어 중용되기도 했다.[50] 또한 홍타이지를 경계하며 홍타이지를 포섭하려 시도하면서도 동시에 홍타이지와 따이샨을 이간시키려는 시도도 벌어졌고, 후금에 대한 첩보를 명하여 상세한 정보를 얻어내고 홍타이지 포섭 시도는 명나라에는 그냥 적진을 탐색하는 것으로만 알려지도록 속여넘기기도 했다.

문제는 도성 내의 군사가 3000 이하까지 떨어질 정도로[51] 정신병적인 방비를 보였으며 인조실록에 따르면 약 광해군 10년대부터 광해군이 몰락하는 15년까지 남쪽에서 군사들을 자꾸 징발해서 민심이 흉흉해졌다고 되어있으며 군사력 강화병이 궁궐병 못지 않은 상당한 정신적 집착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왕권강화라는 말도 있는데 왕권을 강화하려는 왕이 자기 호위할 병력까지 국경에다가 박는 일은 말이 되지 않는다. 홍타이지가 후계자가 되었을 때 후금과 충돌도 광해군이 각오했던 만큼 병력들을 상당히 집중시켰고, 정충신이 이괄의 난 직후 올리는 보고에 따르면 본래 북방에 있던 병력들이 여러모로 규모가 상당하여 방비가 튼튼했었고 절반만 복구시켜도[52] 후금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아낼 수 있다고 하는 식을 보면 국방 강화는 오히려 궁궐병 때문에 등시한게 아니라 궁궐병 못지 않은 심각한 정신병의 영역이었다. 이른바 쌍벽을 이루는 정신병으로 민생에는 크나큰 타격이 가해졌을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인조가 즉위 직후 인조는 북방에 있는 강대한 정예병들을 보고 후금을 상대로도 자신감을 보였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렇듯 청을 관대하게 보면서 지나치게 미화, 왜곡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데, 분명 조선 정부의 실책이 있었고 명에 비하면 훨씬 나은 처분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청이 이때에 저지른 짓들이 잊혀질 수 있게 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53]

6.1 일반적인 인식과 실상

조선은 사대주의로 명나라를 섬기다가 병크의 병크를 거듭하여 자멸하였고 홍타이지가 자비를 베풀어서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았다는 편견이 퍼져 있지만, 계속 싸워서 소모전이 벌어졌다면 청나라 측에서도 경제적인 고갈에 의한 역관광을 걱정해야할 만큼 위태로운 상황이었다.[54] 병자호란은 전면전이 벌어진 전쟁이 아니라, 조선의 왕정을 뒤집어서 외교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한 단기 전쟁이었다.[55]

국내의 병자호란사 담론은 청나라가 처했던 위기 상황보다도, 침략을 당한 조선의 사정만으로 해석하려는 경우가 대다수이나 이런 해석에 대해, 한림대의 오수창 교수는 『청淸과의 외교 실상과 병자호란』이라는 논문에서 이런 '자초한 전쟁' 이라는 통념들에 대해 비판을 하기도 했다. “병자호란 조선이 자초한 전쟁 아니다"

광해군과 달리 아예 반청외교만 했다는 일반적 상식과는 달리 청나라에게 대놓고 강경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56] 조선은 청나라에게 군신관계를 맺거나, 명나라를 버리라는 요청 말고는 다 들어주었다. 그러나 이런 수준은 청조 입장에서는 불만족스러운것이었고 청조의 외교사절에게 기왓장을 던지는 백성을 저지하지 못 한 것이나 사신들의 대한 푸대접 등으로 외교적인 실수를 보여 청을 자극하고 말았다. 하지만 홍타이지의 입장상, 전략상, 경제상, 위기상 어차피 청나라의 의지로 쳐들어올 전쟁이었으므로, 조선이 자초하여 침략당했다는 사관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전왕이었던 광해군은 홍타이지가 집권하면 전쟁이 필연임을 예상했으며, 실제로도 홍타이지를 광적으로 두려워하고 경계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신흥 대륙정권들은 최대 9~10회 이상 한반도가 어떤 외교적인 제스쳐를 취하든 입조하기 전까지는 예방전쟁의 일환으로 한반도를 연속침공했다. 병자호란은 10여년에 걸친 홍타이지의 전략구도상 불과 2번째에 불과한 침공이었다. 고작 외교제스처로 침략을 자초했다는 것은 당시 역사의 주체였던 청나라가 아닌 인조랑 조선을 중심으로 주변국을 파악한 잘못된 역사관이란 뜻이다.[57]

아무튼 인조대에 들어서 수적으로는 우세해진 조선이었으나, 병력의 질이라는 측면에선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았던 청조에게 밀렸으므로, 중요한 전투마다 밀리게 되어 결국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경험하게 된다.[58]

단순히 병력의 질적 문제뿐만 아니라 총 사령관들의 인사정책이 패전의 이유중 하나였다. 북방에서 유일한 군단을 이끄는 도원수에는 김자점, 최중요 거점인 강화도에는 김경징처럼, 싸움조차 하지 않는 원균급 간신들을 사령탑으로 편성하는 실책을 저지른 인조의 모습은. 선조가 초기에는 이순신권율처럼 각 지방의 실무자들을 대우했고, 류성룡이라는 전시재상을 잘 써먹으면서 인재기용에 있어 특정한 당파논리에 휘둘리지 않았다는 점이랑 대비된다.[59]

모 드라마에 따르면 흡혈귀들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라 카더라

7 여담

병자호란 이전 조청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안 일본은 조선측에 군사원조를 제의한 적이 있었다. 물론 조선에서는 단칼에 거절. 이괄의 난 때 이괄군의 항왜(왜관)를 대응하는 것조차 주저했던 조선이다. 실제 일본에서 정말로 군사원조를 해줄 생각이 있었는지는 따져봐야 할테지만 만약 이 제안이 받아들여졌다면 청일전쟁은 260년 앞서 일어나게 됐을 것이다(...).[60]

사실 일본은 정묘호란 직후부터 조청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대단히 촉각을 곤두세웠다. 바로 다음 차례는 자기들일 거라는 것을 원나라의 일본정벌로 역사적으로 깨달았기 때문. 이 때 쓰시마 도주는 정묘호란 직후의 혼란한 틈을 타 조선과의 관계에서 실익을 챙기고자 노력했고 실제로 조선한테서 삥을 뜯는것도 성공한다. 문제는 쓰시마의 가로(家老)이던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쓰시마 도주 소오 요시나리와 뒤집어지게 싸우다가 쓰시마가 조선에게 쳤던 사기[61]에도 막부에 까발려서 크게 문제가 되었다. 시게오키는 막부 핵심인사와 친한 자신의 인맥을 믿고 이런 하극상을 벌였지만 정작 막부측에선 조선과의 외교관계가 중요했기 때문에 대조선외교 노하우를 지닌 소오가문을 내칠수가 없어 결국 요시나리의 손을 들어주고 시게오키를 처벌한다. 이 사건은 조선에서도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는데, 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일본에서 조선과의 외교를 전담하는 쓰시마를 건드리고 있으니 불안할 수밖에. 결국 조선은 남쪽방면의 안정을 위해 일본에 유화책을 쓸 수밖에 없게 된다.

항왜중 한 명이었던 김충선 장군은 임진왜란에 이어 또 한번 활약한다. 무려 60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분전했으나 결국 국왕의 항복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보게 된다. 안습

병자호란이 터지고 인조가 항복한 이후에 명나라로부터 조선에게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황제의 서한을 받는다. 이 당시 명나라는 바로 그 이자성이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그 외 여러곳에서도 도적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있던 상황이여서 조선에 신경을 쓸 여유도 없었고, 애초에 병자호란의 전개가 너무나 빠르게 돌아가서 만약 임진왜란때처럼 제대로 돕고 싶은 의도가 있었다 해도 제대로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다만 전혀 돕지 않으려 한건 아니라서 그나마 명맥상 산둥 지방에서 약간의 수병을 보내려고 했다 하는데, 이 마저도 풍랑 때문에 중단됐다고 한다(...). 물론 이 약간의 수병으로 전쟁의 결과가 뒤바뀌진 않았겠지만, 그나마 강화도를 수비하는데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수 있었는지 모른다. 적어도 아예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기 바빴던 김경징 보단 나았을테니. 어쨌거나 모문룡 건과 더불어 이 일을 겪은 조선은 재조지은을 충분히 했다고 자체 결론을 내리고 명과의 관계를 정식으로 단절했으며, 이후 청의 편에 서서 명을 멸망시키는 데 앞장섰다.[62] 그나마 도망쳐온 명 유민들을 받아준 게 유일한 성의였지만, 그것도 인구 늘리려고 받은 거지, 상국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같은 게 아니다.[63]

청군이 백마산성을 피해서 한성으로 직행하는 바람에 청군과 직접 싸울 기회가 전혀 없었던 임경업은 이 당시 후방 생각을 안하고 쳐들어온 청군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청나라의 수도인 심양으로 역침공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다. 청태종은 당시 조선 침략에 정예 병력의 거의 대부분을 올인한 상황이였으니 청의 뒷통수를 치는 아이디어 그 자체만큼은 나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카르타고의 뒤통수를 쳤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와 달리 임경업의 군은 고작 400명 밖에 안됐다, 고로 원래는 아마 명나라의 군대나 김자점의 북방군과 연계해서 역침을 할 계획이였을듯 한데 이미 위에 언급된거처럼 김자점은 애초에 청나라군과 싸울 의지가 없었고 명나라는 국내 각종 도적들의 반란들 때문에 이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이 앞뒤사정을 알게 된 임경업은 대신 평안병사인 유임과 함께 연합전선을 펴고자 했지만 유임은 임경업이 공을 세울것을 시기하여 어명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그러나 유임의 거절 이유도 충분히 타당하다. 청나라의 수도를 공격하는 것과 같은 국가적 중대사는 임경업과 유임 정도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게다가 이 당시에는 이미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어있는 상황이여서 모든 군은 인조를 구하러 가는게 당연히 우선이였다. 그리고 애초의 유임의 병력도 겨우 2000명이여서, 이는 심양을 치기 위해 임경업이 원했다 하던 5000명에는 한참 부족했다. 또 있다고 쳐도 훈련도 제대로 안된 군사들이 먼 지역에 원정을 하라고 하면 제대로 될 가능성이(...) 여튼 이는 여러모로 현실성이 없는 작전이였고 당연히 실현되지 못했다. 결국 임경업은 이미 화의를 맺고 철군하던 청나라 황제의 조카 요퇴의 병력 300을 압록강 인근에서 공격하여 격파했으나, 전쟁은 이미 끝난 뒤였고 오히려 분쟁이 다시 촉발될 위험만 야기한 뻘짓이었다.

병자호란 직전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됐던 조선 통신사들은 전쟁 직후에 귀국을 해서 전쟁을 피했다. 그러나 돌아와보니 종로 길거리가 폐허로 변해있었던 것은 큰 충격. 일본 가서 도쿠가와 이에미츠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는 등 성공적인 외교를 펼치고 돌아오니 이 모양 이 꼴이 된 상황에 통신사들은 땅을 치고 통곡을 했다고 한다. 다만 이들의 노력 덕택에 그나마 조선이 북부의 평안도 지역[64]만 청에게 밟히는 걸로 피해가 최소화됐던 것도 사실이다. 일본이 개입할 움직임을 보였다면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임진왜란과는 달리 병자호란에선 준비를 어느 정도 했음에도 패한 이유는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을 거치며 나타난 정권의 불안정성과 믿을만한 무장들의 손실이었다. 일단 광해군때 중용된 인사들을 쳐내면서 적지 않은 무관이랑 실무직이 갈려나갔다. 그나마 남은 사람이 최명길의 장인인 장만과 그 장만의 후원을 받은 남이흥, 이항복의 제자로 북인과 거리가 있던 정충신 정도인데 3명다 병자호란 이전에 사망했다. 특히 남이흥의 죽음에는 인조 정권의 문제점이 크게 작용했다. 인조가 손수 수레를 밀어주며 보냈던 이괄이 난을 일으켜 평안도 방어군이 날아가고 도성이 점령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자 인조 정권은 무장들에 대한 기찰을 대대적으로 강화하고 믿을 수 있는 인물인 남이흥에게 이 임무를 맡겼다.

정권보위를 위해 한 행동이었으나 이는 지방군사들의 훈련도가 부실해지는 결과를 초래했고 정묘호란때 크게 문제가 된다. 더 큰 문제는 전쟁에 문외한인 조정대신들이 끼어들었다는 점이다. 정묘호란 당시 이귀는 전략거점인 안주를 사수해야 한다는 남이흥의 주장을 무시하고 구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인조는 이귀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 결과 청군은 안주로 쳐내려왔고 수백의 병력만 데리고 긴급파송된 남이흥은 분전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가뜩이나 지휘관이 부족한 상황에 이런식으로 소모시킨 대가는 병자호란때 도원수 김자점에 강화유수 김경징이란 참사를 불러왔다.[65]

8 관련 항목

8.1 조선측 관련 인물

8.2 측 관련 인물

8.3 관련 작품

8.4 관련 서적

  1. 전쟁 중 온 가족을 잃은 어떤 노파의 절규. 병자호란 직후 백성들의 심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다.
  2. 1차 조청전쟁은 정묘호란
  3. 대략적인 내용을 소개하면, 변방에서 명나라가 청나라를 막고는 있었지만 우회해서 들어온 청군이 베이징 주변의 현대 행정구역 기준으로 허베이 성, 멀게는 산둥 성까지 내려가서 약탈을 행했다는 내용. 병자호란이 있던 1636년도에는 홍타이지의 동생인 아지개가 만리장성을 우회해 현대 행정구역상 베이징시 외곽구역인 창핑구 외 16곳을 공격해서 가축 17만여 마리를 약탈하였다. 명나라로서는 수도 앞마당까지 약탈당한 셈.
  4. 병자호란 이후에도 명에 대한 약탈은 계속되어, 병자호란 2년 후에는 명으로부터 가축 46만 마리를 약탈하였으며, 1642년, 즉 병자호란 6년 후에는 금 2200냥, 은 200만냥, 진주 4400개가량, 가축 32만마리를 약탈하는 등 청나라는 지속적으로 명나라를 약탈해서 엄청난 물자를 얻어냈다. 조선이 금화 100냥, 은화 1000냥을 청에 바치는 것도 힘겨워한 것에 반해, 병자호란 6년 후 시기에 명나라로부터 청나라가 약탈한 물자는, 조선이 바쳤던 공물을 기준으로 금 22배, 은 2000배에 달한다.
  5. 출처는 예일 대학의 중국사 교수 피더 퍼듀 교수의 China Marches West 중 pp.166 ~ 167
  6. 인조는 반란에 가담한 투항자들이나 생존한 장수들도 닥치는대로 모아서 쓰려고 했다. 문제는 측근들에게 지휘권이 집중되느라, 실제로 쓸만했던 이 장수들은 수백에서 수천 단위의 병력만 통솔하게 되었다. 이런 실전 경험자들의 대다수는 전쟁초기부터 말기까지 가장 분전했으나 병력차로 허무하게 고립되었다.
  7. 이괄의 난 당시 시원하게 깨져나가던 수도권 북부 방어를 위해 총융청을 설치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8. 중앙에서 전문적 무신이 영장으로 파견되어 지방 수령이 가진 군사권을 넘겨 받아서 훈련 시키는 것이었다. 인조 5년 시작되어서 인조 15년 사실상 폐지되었다. 이것을 병자호란의 패착이라고 쓰는 사람이 있는데, 최고 사령관님들의 적전도주와는 관련이 없었고 오히려 병력증강에 조금이라도 신경을 썼던 결과였다. 문제는 영장을 맡을 무관의 수가 부족하여 폐지되게 된다.
  9. 12년이나 지나서 서북 지방의 인구수는 회복되었지만, 임진왜란을 거친 정예병력까지 회복되기에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특히 실전 경험을 쌓았던 고-중-하급 장교들이 이괄의 봉기로 역적이 되거나 그들을 막으며 죽었다는 손실이 큰 문제가 되었다.
  10. 이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은 것도 있고, 심지어 소모품으로 버려졌다.
  11. 단, 정충신과 장만은 행정에 뛰어난 인재들이었기에, 외교적인 조언은 듣지 않더라도 군사태세를 정비할 권한은 주었다. 인조시절의 수비전략이 최소한 말이 되는 방면으로 투자되었던 것도 이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분들이 병사하고 다시 망했다.
  12. 여기에는 명과의 조공무역으로 값진 물건을 얻어서 자신들에게 싼값에 파는 빵셔틀이 되라는 이유가 존재했다. 이는 병자호란 이후에도 마찬가지. (명과의 조공무역은 막았지만 일본과의 무역에는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
  13. 구사(gūsa, 固山)가 만주어로 기(旗)라는 뜻이므로 팔기대신(八旗大臣)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즉, 각 팔기의 대신들.
  14. 참고로 산해관은 명나라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청나라가 돌파하지 못했으며, 이 문을 열게 된 것도 청이 아닌 반란군 오삼계 세력의 배반 덕분이었다.
  15. 조선의 방위체제, 특히 청을 막아야 할 평안도의 방위체제는 이괄의 난을 계기로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상태였다.
  16. 박로는 이런 상황에서도 용케도 살아남아(...) 남한산성에 피란간 인조에게 합류했다.생존왕
  17. 이 혼성부대에 조선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18. 토산 전투에서 대패한 후 성에 틀어박혀서 히키고모리 나오지 않았다.
  19. 諭示, 타일러 가르친다
  20. 事勢, 일이 진행되는 형세
  21. 背逆, 은혜를 저버리고 거스리는 것
  22. 이게 얼마나 무모한 계획인지를 알고 싶다면 이 항목을 들어가보자. 그만큼 아무리 현지가 곡창지대거나 물류의 유통지인 대도시라고 해도 청야전술등의 전술을 사용하면 그냥 굶어 싸우는수 밖에 없다. 의지로 싸우면 된다고 하면 모랄빵이 왜 있을까?
  23. 최정예 병력인 북도군을 거느린 도원수 청의 간첩 김자점이 한달 넘게 가만히 있던 게 컸다.
  24. 여수전쟁, 여요전쟁 때는 방위군이 버텨낸 틈을 타 집결한 야전군이 후퇴하는 적의 뒷덜미를 후려쳐 결국 승기를 잡아냈다.
  25. 처음 축성될 때 성 안에 있던 식량창고를 광주목사 한명욱이 험준한 산에 창고가 있으면 운반하는 백성들에게 민폐라며 성 밖으로 끌어냈는데 이것이 큰 실책이었다. 게다가 이것도 사실 운송을 담당한 상인과 야합했다는 말이 있다.
  26. 물론 중앙군에 집중투자한 이유는 인조 자신이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27. 현장 지휘관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준 사례이다.
  28. 정확히 김자점은 튀었고 남은 평안도 포수들은 알아서 싸워서 적의 공격을 격퇴했다.
  29. 참고로 조선 각지의 근왕군이 임진왜란 당시 유연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선조가 안전을 보장받은 게 컸다.
  30. 실록 원문에는 임금의 이름을 피휘 하기 위해 성휘姓諱 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31. 이게 나중에 인조가 소현세자를 적대하는 주요 떡밥이 된다.
  32. 애시당초 명이 아직 건재한 상황인데다 조선 왕실이 건재하여 조선 각지에서 의병이 조직되고 정규군이 다시 반격하는 한편, 각 지역의 수비군이 산성을 나와 게릴라와 보급선 차단을 목적으로 반격에 착수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다.
  33. 대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잡아갔다. 그리고 인조는 야사를 중심으로 반청을 했다는 인식과는 달리 청에 대한 복수심을 행동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34. 혹시 모를 일본의 침입에 대한 일종의 방파제로 염두했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하여 함경도까지 올라간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가 여진족 마을까지 침략하여 약탈을 저지르다가 여진족에게 역관광당한 바 있음을 감안하면 나름 신빙성이 있다.
  35. 고명(誥命)은 황제가 제후 등등에게 준 임명조서, 책인(冊印)에서 책은 책봉 내용을 담은 문서, 인은 인장을 뜻한다.
  36. 모문룡이 설치한 명나라의 동강진이 있었다. 모문룡은 정묘호란 이후 원숭환에게 잡혀 죽고 부하들은 청에 투항했으나 동강진엔 일부 명나라 난민들이 남아 청에 저항하고 있었다.
  37. 다만 이 부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켜지지 않는 일도 있었다. 애시당초 노동력 부족 때문에 끌고 간 것이어서 생긴 문제였지만.
  38. 이것 때문에 효종이 즉위년에 성곽을 개수하려다가 청나라 사신의 질책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다만 이경석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유배가 있었던 김자점이 효종의 대외정책을 청에 고자질한 것이다. 결국 김자점은 이 사건으로 반역 혐의가 적용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39. 그냥소가 아니라 물소의 뿔인데, 조선군의 주력무기중 하나인 각궁의 주요 재료다. 문제는 이게 정작 조선땅에선 나지 않아서 명나라 아니면 일본을 통하여 오키나와에서 수입하던 것...
  40. 후추는 조선에서 나지 않는 향신료였다. 요즘은 흔해 빠진게 후추지만 당시엔 값도 매우 비쌌고 물량은 전량 일본에서 수입해 조달해야만 했다.
  41. 실제로 청은 병자호란 당시 조선을 이기고 있을 때에도 조선군 조총병의 기량은 상당히 높게 평가한 바 있다.
  42. 다시 말하지만 청은 당시 조선(1,100만명 내외)보다 인구가 훨씬 적었다. 여진족이 50만~100만인 판국에 조선에서 끌려간 포로가 50~60만에 정묘호란까지 합치면 70~80만명에 육박한다. 물론 그때 청에는 귀부한 한인도 여진족만큼 있었고, 몽골인(20만)에다 이들 전체 숫자와 맞먹는 하층민들까지 있어서 총 인구는 그래도 200만~400만까지 나오므로 포로와 여진족 인구가 같은 상황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지나치게 증가한 인구로 인한 식량부족도 병자호란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43. 다만 여진족은 유목민이라기 보다는 농사와 수렵, 수렵으로 확보한 모피등을 내다 팔고 부족한걸 사오는 교역을 더 중시하는 반농반수렵 민족이였다. 주변 털러 다니지 않은건 아니였지만.
  44. 하지만 백성들이 돌아오려면 돈을 내야 했다 애초에 필요 노동력을 초과하는 60만명이나 되는 조선 백성들을 끌고 갔다.
  45. 그래도 많은 백성들이 속환되는 일이 어려웠는데 그 이유가 가관이다. 병자호란 후 인조정권의 권력자들이 포로로 잡혀간 본인들 가족들만 빨리 구하기위해 은 수천냥에서 수만냥의 몸값을 치르자 조선인 포로 몸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갔고 당연히 이런 돈이 없는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간 가족이 자력으로 탈출하거나 조선인 포로 주인의 자비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46. 게다가 왜란은 임진왜란정유재란을 걸쳐 7년 정도의 장기전(물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사이엔 휴전 기간이었으나 왜군이 남부 지방에 왜성을 쌓아 주둔하긴 했다.)이어서 더욱 영향이 심했으나 호란은 2달 정도의 단기전이란 차이도 있다.
  47. 이것은 일제시대의 학설을 따르는 방식이 전부가 아니라 신채호 선생의 영향도 있다.
  48. 광해군이 대동법을 적극추진했다는 소리가 2000년대까지 학자들 입에서 나왔다. 단순히 쌀로 걷는다는 개념에서 지방재정, 국가재정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정책으로 나가는 완성판 대동법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과정이었던 인조 정권의 삼도대동법과 재생청은 아직도 대중들에겐 유명무실한 정책으로 철저하게 무시받는다. 전왕인 광해군은 내치에 관해선 연산군과 다를게 없었다. 궁궐공사를 위해 뇌물 상남액의 많고 적음 징세관인 조도사들에 대한 협조 여부로 지방관과 변방장수들의 근무성적을 평가하는등 한나라의 국왕이 수탈을 부추기는 막장짓을 한 임금이었다. 지나친 궁궐공사와 수탈이 얼마나 심했는지 광해군 12년 여름을 기점으로 농민 경제는 확실하게 붕괴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하여 이 무렵에는 "이렇게 가다가는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중앙과 지방의 관료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심지어 아예 백성들은 공정하고 관대하게 행정업무를 수행하는 지방관이 탄핵받거나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될 경우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그의 연임 운동을 펼치기까지 했다. 일례로 광해군 14년 (1622)10월 전라도 나주 백성들이 목사 유석증의 유임을 위해 쌀 1000석을 바치거나 함평 백성들이 현감 이홍망의 재부임을 위해 쌀 300석을 바친것이 그 사례이다. 유석증은 임지에서 근신하면서 잘 다스렸고, 이홍망도 청렴하고 근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기록한 사관은 "백성들의 마음이 무척 감동적이다"면서 감탄하고 있다(...) 그러니까 청백리 목사와 현감의 가격이 각각 쌀 1000석 · 300석이라면, 백성들이 돈을 바치고 그들의 수령을 스스로 구입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 실사례. 끝도없는 궁궐공사 재원마련을 위해 전국에 영건도감 소속 조도사를 내려보내 면포를 걷었는데 영건도감 자체가 왕의 지대한 비호 아래 부패, 권력기구화하여 정해진 수량(1개도에서 50~100필 가량)에다 방납가를 적용, 최대 100배까지 징수해 백성의 고혈을 쥐어짰기에 관료들이 광해군에게 조도사들의 불법행위를 고발하자 조도사들이 취한건 별비(別備)지 백성들에게 취한게 아니라는 궤변으로 지방수령들의 탄원을 무시하고 조도사들의 수탈을 지원하는등 막장짓을 했던 것이다. 조도사의 수탈
  49. 사르후 전투는 명군이 주력이고 조선은 약간 힘을 보태는 정도였다. 근데 기후가 후금을 도운데다가 명군에서 벌어진 지휘관들의 내분 덕분에 어이없이 압도적인 숫자를 지니고도 각개격파를 당했다.
  50. 사실상 광해군의 외교의 핵심은 정충신이 담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충신이 아프면 일이 미뤄질 정도였다. 광해군의 외교를 지지하던 것은 대북이 아니라 소북인 박승종과 서인인 윤휘, 정충신이었다. 그리고 윤휘는 광해군 몰락 후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다는 이유로 같은 서인들 중 강경파들에게 살해시도를 받기도 했으나 유능한 능력 때문에 살아남았으나 인조는 딱히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고, 그 탓에 인조는 병자호란 당시 윤휘에게 "경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이 되었다."라고 사죄했다고도 한다. 또 정충신 역시 이항복의 제자로 따지자면 서인 쪽임에도 불구하고 서인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정작 조선을 구원할 비전과 가능성이 있었던 유능한 서인들은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기에 한직으로 밀려나는 인조 정권의 한계가 낳은 비극이라고 봐야할 듯.
  51. 3000명도 안되어서 도성 내에 근무를 할 인력도 없어서 병사들의 불만이 대단했었고, 심지어 광해군이 북방에 더 보내려고 하니 이제 호위할 병력도 없다고 제발 좀 그만보내라고 만류해서 광해군을 말리는 내용까지 있다...
  52. 근데 그 절반도 못했었다. 정묘호란을 막아냈다면 병자호란의 그런 압도적인 규모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괄의 난이 가져온 것은 그만큼이나 치명타였고, 광해군이 준비해놓은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강대한 북방병력의 증발은 홍타이지가 정묘호란 당시에 이미 조선을 쳐서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는 원인이 되었다.
  53. 기록만 봐도 <지천집>: 50만 명이 포로, <남한일기>: 심양으로 속환한 사람 60만 이상. <산성일기>: 심양 시장에서 팔린 사람 66만 이상, <비어고>: 60만 이상이 포로. 이런 식이다. 물론 정확히 집계를 낸 것이 아니고 전쟁 중에 신상 파악이 불가능해진 사람들도 억지로 집어넣었을 수 있기에 실제 포로는 그보다는 훨씬 적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엄청난 숫자.
  54. 애초에 조선과 청나라의 국력 격차는 멸망이나 정복이 이루어질만큼이 아니었다. 청이 조선의 멸망을 노렸다면, 더 기나긴 소모전 구도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55. 역사적으로 비슷한 상황이었던 고려여요전쟁이 승전이라 단순히 넘어가지만, 2차 여요전쟁 때도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사로잡힐 뻔 하고 징집병들이 무능하게 전멸하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단 고려는 2차 전쟁의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3차 전쟁 때는 소모전을 철저하게 대비하고 요군의 진격로 곳곳에서 피해를 입혔다. 결국 막타로 가용병력을 모두 끌어모아 귀주에서 집결시켜 요나라의 정예 대병력을 전멸시키는 타격을 입히면서 대등한 자격에서 강화를 성립시켰다. 다만 인조고려현종처럼 소모전을 벌일 때까지 시간을 끌지도 못했고, 중요한 통제 사령탑으로 기용한 측근들이 싸움을 회피하거나 패배하여 청조를 막아내지 못했다.
  56. 정충신 같은 국제첩보인력을 국내 감시용으로 썩혀버렸고, 조선강경파인 홍타이지가 청의 후계자로 올라서면서 외교적인 입지가 줄어든 것도 문제였다.
  57. 그 광해군도 사르후 전투에 명나라에 파병을 했을 정도로, 명나라는 버릴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당대 정세만 보자면 명나라의 멸망은 예언가라도 있지 않은 이상 불가능했다. 이미 송을 발라버리고 고려와 화친한 금나라와는 달리, 상식적으로 보면 명나라는 무너진게 아니었으므로, 그것을 빌미삼아 쳐들어올 청나라와의 충돌은 누가 왕이라도 필연이었으며, 광해군도 병적으로 홍타이지 대비에 열을 올렸던 것이다.
  58. 인사정책면에서 야전을 경험해본 실제 지휘관들에겐 제대로 된 군권이 없었다는 점도 한몫한다. 2번에 걸친 침략에서 서북 방면에서 이름을 남긴 장수들은 수백명만 갖고도 전쟁이 끝나거나 죽을 때까지 계속 싸웠다. 이들의 지휘력은 그나마 좋은 편이었는데, 인조의 측근들이 수만명을 갖고도 태만하거나 패배했던 행적과 매우 비교가 된다.
  59. 물론 선조도 전쟁 도중에 이순신의병들을 족치려고 원균과 측근들을 기용하여 실무자들을 숙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나마 이내 후회하고 다시 이순신을 기용해서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지만 하지만 인조는 붕당에 매몰되어서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원균급 비실무자들을 권력의 측근이란 이유로서 2명씩(김자점, 김경징)이나 대군의 군권을 주거나 중추지역의 지휘관으로 앉혀놨을 정도로 차원이 달랐다. 아..답이 없다.
  60. 다만 당시 일본도 시마바라의 난과 연이은 막부 내 다이묘 숙청으로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았기에 실제로는 일부 영주 중심으로 소수의 파병만 이뤄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청의 해군은 당시 명나라에서 투항한 한족들 덕에 일취월장했다. [1] 청 시기 동안 수백 년간 화기나 선박의 발달이 거의 없어 유럽에게 추풍낙엽처럼 털리는 바람에 정크선에 대한 인식이 안습하지만 명 시기까지만 해도 동양에서 해군이 가장 강했다.즉 있어봐야 거의 도움이 안 된다는 소리. 오히려 홍이포와 몽골기병이 주력인 팔기군에게 조선군이랑 함께 패배했을 확률이 높고 경우에 따라선 조선의 약체화를 확인한 일본군이 청군이랑 함께 조선까지 진격하여 배를 타고 조선 재침공을 시전해 병자호란+임진왜란 2를 찍었을 확률도 있다.
  61. 일개 번에서 보낸 사절을 막부의 사절이라 속이고 국서를 위조주작했다.
  62. 다만 진짜로 '의리'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 횡의사건도 일으키고 금주성 전투에서는 일부로 태업을 행했다.
  63. 당장 이 명나라 유민들 대부분은 조선 사회에 동화를 강요당했다.
  64. 함경도의 경우 적극적인 약탈보다는 그냥 뜯어내는 형태가 많았다. 전쟁이 끝난 상황이라 추가로 포로를 데려갈 수도 없었고.
  65. 장만,정충신,남이흥은 이괄의 난 진압에 가장 큰 공을 세울정도로 활약이 큰데 김자점+김경징은 실무직을 나선 경험이 전무하다.
  66. 비중은 크지 않으나, 우리나라에 강시가 생긴 계기로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