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건 사고 관련 정보
- 관련항목 : 조직폭력배, 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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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6년 8월 14일 서울 강남의 대형 룸살롱인 서진회관에서 일어난 집단 살인 사건, 목포 출신 조직폭력배들의 사소한 분쟁이 희대의 집단 살인 사건이 되어 반대파 조직원 4명이 살해되고 주범 2명은 사형에 처해졌다.
2 사건 개요
2.1 발단
1986년 8월 14일 오후 10시 30분 서울 강남에 있는 대형 룸살롱 서진회관 17호실에서 목포 출신 조직폭력배인 맘보파 멤버 7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교통사고를 낸 뒤 실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들어갔다가 광복절 특사로 풀려난 조직원 고용수(당시 28세)의 석방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그 옆방인 16호실에서는 용인 유도대학(현 용인대학교) 선후배 사이로 스스로를 서울 목포파로 부르던 8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창 흥을 돋우며 조직원의 출소를 축하하던 맘보파 일행 사이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술 시중을 들던 남자 종업원의 태도가 기분 나쁘다며 일행 중 한 명이 마구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다른 조직원들이 말린 후 종업원을 밖으로 내보냈는데, 구타당한 채 울면서 방 밖으로 나오던 종업원을 화장실에 다녀오던 서울 목포파 조직원이 발견하고 이유를 따져 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서울 목포파 조직원들은 평소 자신들을 무시하던 맘보파 일행이 자기네 구역에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밀고 들어와 맘 놓고 술을 마시는 것도 마땅찮은데, 동생 같은 종업원을 구타하기까지 하자 분노했다. 하지만 분명히 자신들보다 실전 경험도 많고 센 상대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서울 목포파 조직원들은 주저했다.
2.2 범행
갑론을박과 계획, 작전을 거듭한 끝에 종업원들을 통해 맘보파가 무기 없이 무방비 상태로 술에 취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야 칼과 방망이를 꺼내들었다. 비록 오랫동안 무술 훈련을 받아온 유도대학 선후배들이었지만, 실전 경험이 많지 않은 어린 서울 목포파 조직원들은 손에 무기를 들었으면서도 강적인 맘보파 조직원들이 무서웠다. 특히, 맘보파의 행동대장 조원섭은 일대에서 유명한 싸움꾼으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마음을 다잡고 무기를 손에 든 서울 목포파 조직원들은 17호 방의 문을 열어젖히고 소리를 지르며 난입해 들어갔다. 닥치는 대로 칼과 방망이를 휘둘렀지만, 특히 그들이 가장 무서워 한 조원섭을 향해 공격이 집중되었다. 맘보파 조직원 7명 중 4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나머지는 중상을 입었다. 광복절 특사로 출소해 축하받던 고용수 역시 피살당했다. 자신들이 저지른 짓의 결과에 압도당한 서울 목포파 조직원들은 이미 사망한 4명의 시신을 차에 싣고 20분 거리인 동작구 사당동에 있는 한 정형외과 수술실 앞에 내려놓고는 “교통사고 환자요!”라고 소리치고 달아났다.
범행 직후 도주했던 조직원들은 사건의 파장이 예상보다 커지고 경찰의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되자 하나 둘 경찰에 자수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실제 사건 현장에 있지도 않았고 관계도 없는 주변 인물들을 위장 자수하게 하는 등 수사에 혼선을 빚기 위한 꼼수가 사용되기도 했다. 그 사이에 주범인 김동술과 고금석은 전북 임실에 있는 한 저수지 안 외딴섬에 숨어들어가 낚시꾼으로 위장한 채 은둔했다.
2.3 수사
경찰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서진 룸살롱 사건’의 정확한 실체와 연루자들을 모두 밝혀내기 위해 수사에 총력을 기울였다. 결국 위장 자수한 자들을 솎아내고, 가담자들의 실체를 파악한 경찰은 달아난 주범 김동술과 고금석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정보망을 총동원했다. 결국 두 수배자의 위치를 알아낸 경찰은 5명의 무술 고단자 형사를 현장에 급파했다.
‘독 안의 쥐’가 된 김동술과 고금석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형사들의 접근을 눈치챈 두 사람은 칼과 낚시 도구 등 흉기들을 들고 끝까지 저항했다. 그러나 결국 노련한 형사들의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검거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온 김동술과 고금석은 TV 카메라 앞에서도 고개를 뻣뻣이 들고 전혀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들의 허세는 오래 가지 못해서 재판에서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자 엉엉 울면서 죽을 죄를 졌다고 하소연하는 등 처량한 모습으로 돌변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총 12명의 두 폭력조직 조직원들이 구속되었고, 항소와 상고를 거쳐 1987년 10월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내려졌다. 주범인 김동술과 고금석은 사형, 김승길과 장진석은 무기징역 그리고 나머지 조직원들에게는 각 가담 정도에 따라 유기징역 형이 내려졌다. 김동술과 고금석은 사건이 발생한 지 3년이 지난 1989년 8월 4일, 사형이 집행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3 여파
사건이 발생한 서진회관은 서울 목포파에서 보호하고 관리하던 업소였고, 김태촌의 범서방파 방계 조직으로 강남 일대에서 세력을 과시하고 있던 맘보파 일행은 대학생 중심의 서울 목포파를 무시하고 서진회관을 축하 파티 장소로 정했던 것이다. 사건이 발생한 후 수사 과정에서 일부 서울 목포파 조직원들은 당시 무장한 상태에서 맘보파의 옆방에 있었던 것은 상대방이 방심한 틈을 타 기습하겠다는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진술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유도대학은 조폭 양성소라는 비난을 들었으며 교명을 용인대학교로 개명하는 계기중 하나가 되었다.
이 사건의 피해자인 조원섭은 서울과 목포에 이름난 싸움꾼으로 허영만의 만화 비트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2007년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보복 폭행 사건에 이 사건과 연관된 맘보파 두목 오모씨도 연루되어 구속되어진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