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세바스티아노 로시 (Sebastiano Rossi) |
생년월일 | 1964년 7월 20일 |
국적 | 이탈리아 |
출신지 | 체세나 |
신체 조건 | 198cm |
포지션 | 골키퍼 |
소속팀 | AC 체세나 (1982~1990) 포를리 FC (임대) (1982~1983) 엠폴리 FC (임대) (1984~1985) 론디넬라 (임대) (1985~1986) AC 밀란 (1990~2002) AC 페루자 칼초 (2002~2003) |
국가대표 | 0경기 |
1 소개
밀란 제너레이션의 주역이자 로렌조 부폰, 파비오 쿠디치니[1]와 함께 밀란 역대 최고로 꼽히는 골키퍼로 12시즌동안 리그 346경기 밀란 골키퍼 출전횟수 2위가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2] 국대에서는 팔류카, 젱가, 페루찌등의 존재로 발탁된 적이 없는 비운의 골키퍼.[3]
2 밀란 시절 이전
체세나 태생으로 농구를 하자는 권유를 뿌리치고 79년 체세나 유스로 들어간다. 82-83시즌 세리에 C1에 속한 포를리 FC로 임대되어 백업 키퍼로써 11경기를 출장한다 이때 나이가 겨우 15세였다. 이후 엠폴리와 론디넬라에 임대되어 28경기를 더 뛰고[4], 체세나로 복귀 이후 주전으로 도약하여 4년동안 127경기를 출장한다.
3 밀란 시절 및 그 이후
이런 그를 주목한 팀이 있으니 당대 챔스 2연패를 이룩하고 최강의 팀이라 칭송받던 AC밀란이 그를 영입한다. 초창기에는 지오바니 갈리의 백업으로 사용하려 했으나 갈리의 이적으로 프란체스코 안토니와 주전 경쟁에서 승리. 파올로 말디니, 프랑코 바레시,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마우로 타소티라는 전설적인 수비라인의 일원이 된다.[5]
자신을 영입했던 아리고 사키와는 1년밖에 지내지 못했지만 후임 파비오 카펠로의 휘하에서 주전으로 활약. 카펠로의 밀란은 카펠로의 데뷔시즌부터 리그 무패우승[6] 을 포함한 리그 3연패, 93-94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포함한 챔스 결승 3연속 진출을 이룩하며 전성기를 구사한다.
하지만 그 영광도 계속된 부상으로 인해 당시 전례가 없던 연골 수술을 시도했으나 대실패로 끝나 끝내 은퇴한 마르코 반 바스텐을 필두로 프랑크 레이카르트의 아약스 이적[7], 루드 굴리트의 삼프도리아 이적으로 오렌지 삼총사가 와해되고, 프랑코 바레시의 은퇴등으로 팀은 암흑기에 접어들게 된다. 로시의 기량도 점점 하락하고 있었고, 결국 98-99시즌 모종의 사건으로 5경기 출장 정지를 당하면서 크리스티안 아비아티에게 주전경쟁에서 밀리고 후보로 전락한다. 결국 01-02시즌이 끝나고 페루지아로 이적한다. 페루지아에서 12경기를 출장하며 건재함을 보인 로시는 시즌이 끝난 후 은퇴한다. 이 시즌이 끝나고 전 팀 동료였던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역시 밀란을 떠나 스페인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한다. 은퇴 후 밀란의 프리마베라 골키퍼 코치를 수행했다.
4 기타
93-94시즌 당시 929분 무실점 기록을 세우며 디노 조프의 리그 최장 무실점 기록을 깨기도 했다.- ↑ 첼시에서 주전으로 활동했다가 체흐의 백업역할을 완벽히 수행했던 카를로 쿠디치니의 아버지.
- ↑ 1위는 자신을 몰아낸 크리스티안 아비아티의 374경기. 애석하게도 아비아티는 팀의 암흑기 시절 주전이라 고생이란 고생은 온갖하면서도 2000년대 영광의 시절에는 디다와의 주전경쟁에서 밀려서 밀란 역대 레전드 골리로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안습,
- ↑ 사실 당대 밀란의 수비진이 워낙 압도적인지라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이유가 크다. 일례로 아리고 사키는 94 미국월드컵 당시 밀란의 수비진을 통째로 뽑아와 주전으로 기용했다.
- ↑ 론디넬라에서만 출장한 기록이다. 엠폴리에선 0경기
- ↑ 아이러니하게도 현재는 다시는 안나올 역대 최고의 수비진의 일원으로 꼽히지만 당시에는 이 수비라인으로 인해 국가대표팀에 콜업이 되지 못했다.
- ↑ 3년간 58경기. 이 기록은 92-93 시즌 파르마의 야스프리아에게 결승골을 먹히면서 이 무패기록도 깨진다.
- ↑ 레이카르트와는 이적한 이후 챔스 결승에서 다시 재회한다. 이때가 챔스 3연속 결승 진출 마지막이였던 94-95 시즌으로 결국 젊음을 앞세웠던 아약스에게 패배하여 준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