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레이카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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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이름프랑클린 에드문도 레이카르트
(Franklin Edmundo Rijkaard)
생년월일1962년 9월 30일
국적네덜란드
출생지암스테르담
신체 조건190cm, 87kg
포지션수비형 미드필더
소속 클럽AFC 아약스 (1980-1987)
스포르팅 CP (1987-1988)
레알 사라고사 (1987-1988) (임대)
AC 밀란 (1988-1993)
AFC 아약스 (1993-1995)
지도자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 (1998)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98-2000)
스파르타 로테르담 감독 (2001-2002)
FC 바르셀로나 감독 (2003-2008)
갈라타사라이 SK 감독 (2009-2010)
사우디아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1-2013)
몬트버디 아카데미 기술고문 (2013-)
국가 대표73경기 10골
1988 Ballond'or
수상
마르코 반 바스텐
2위
루드 굴리트
3위
프랑크 레이카르트
1989 Ballond'or
수상
마르코 반 바스텐
2위
프랑코 바레시
3위
프랑크 레이카르트
FC 바르셀로나 역대 감독
라도미르 안티치
(2003)
프랑크 레이카르트
(2003~2008)
펩 과르디올라
(2008~2012)

1 개요

오렌지 삼총사의 방패

역사상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FC 바르셀로나UEFA 챔피언스리그 전성기 문을 연 감독

2 플레이스타일

당대 최고이자 역대 최고를 논하는 수비형 미드필더이며 수비수로서도 출중한 능력을 과시했다. 한 시대를 지배했던 아리고 사키의 AC 밀란의 압박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압박을 담당했다. 190cm라는 건장한 체격에 흑인 특유의 운동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체력과 활동량이 초인적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상대편의 숨통을 틀어쥐는데 능했으며 탁월한 시야에다 드리블과 키핑 기술까지 보유했기에, 공을 탈취했을 때는 밀란이 아닌 여느 팀이었다면 공격형 미드필더를 해도 될 정도의 공격적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또 이뿐 아니라 하프라인 이하의 중앙에서는 센터백, 수미, 박스투 박스, 리베로 등 모든 역할을 초일류로 수행해냈다. 즉 축구괴물.

3 선수 시절

수리남 출신의 아버지와 네덜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레이카르트는 1970년, 7살의 나이로 암스테르담 스포츠 산하의 유소년팀에 입단한다. 1979년 암스테르담 선발팀 대표로 아약스 유소년팀과 경기를 갖게 되었는데 뛰어난 실력으로 아약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되었고 당시 아약스 유소년팀 감독인 레오 벤 하커 감독의 권유로 아약스에 입단하게 된다. 레오 벤 하커가 1군 감독으로 취임한 1980년, 17살의 나이로 1군에 승격하게 된다. 초창기엔 당시 노장이자 팀의 레전드인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뛰었으며, 요한 크루이프의 이적후에는 팀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며 중앙 수비수 (1981~1985), 중앙 미드필더 및 우측 윙 (1985~1986) 등 다양한 포지션에서 활동하며 3차례의 리그 타이틀과 3차례의 FA컵 우승, 컵 위너스 컵 1회 우승, 1985년 네덜란드 올해의 선수상 수상 등 화려한 경력을 쌓는다. 1986-87 시즌 종료 후 AC 밀란으로 이적한 동료 반 바스텐에 이어 주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1987-88 시즌 직전 라이벌 PSV 아인트호벤과 비밀리에 계약이 체결된 사실이 알려졌다. 네덜란드 축구협회의 중재로 이적은 불가 판정받고 아약스에서 뛰게 되지만 당시 감독인 요한 크루이프[1]와의 불화를 겪게 되고 레이카르트는 다시는 요한 크루이프 밑에서 뛰지 않겠다는 발언을 하며 포르투갈의 명문 스포르팅 CP로 이적하게 된다.

1987-88 시즌 윈터브레이크 기간에 스포르팅 CP와의 이적이 성사되었지만, 아약스가 이적동의서를 늦게 발급하여 계약은 너무 늦게 체결이 되었고 포르투갈 축구협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여 선수 등록을 하지 못해 경기에 뛸수 없었고, 레이카르트는 부득이 스페인의 사라고사에 임대되어 1987-88 시즌을 보냈다.

1988-89 시즌 아리고 사키의 부름을 받아 AC 밀란으로 이적한다.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와 함께 오렌지 트리오를 형성. 기존에는 중앙 수비수로도 활약한 레이카르트지만, 아리고 사키 감독의 압박 축구에서 중심이 되는 홀딩 미드필더로 완전 전환하게 되며 유럽 챔피언스리그 2회연속 우승에 큰 공헌을 한다. 상대의 공격을 압박하고 공격의 활로를 열어주는 역할을 수행했던 레이카르트의 역할은 훗날 패트릭 비에이라로 대표되는 미드필더들의 롤 모델이 된다. 아리고 사키의 후임인 파비오 카펠로 감독 밑에서도 팀의 핵심역할을 하며 1991-92 시즌 세리에 A 무패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5시즌 동안 2차례의 리그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우승, 2회연속 발롱도르 3위등 황금기를 보낸 레이카르트는 31살, 친정팀인 아약스로 복귀하게 된다. 루이스 판 할 감독 밑에서 당시엔 새파란 유망주였던 파트릭 클루이베르트, 마르크 오베르마스, 데니스 베르캄프, 프랑크 데 부르, 로날드 데 부르, 에드가 다비즈, 클라렌스 세도르프, 에드윈 반 데 사르 등을 이끌며 1994-95 시즌에는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달성한다. 그리고 1995년, 34살의 나이로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

4 감독 시절

현역 은퇴 후 잠시 의류업계에 몸 담기도 했던 레이카르트는 1997년 지도자 라이선스를 취득, 거스 히딩크 감독의 부름을 받아 1998 프랑스 월드컵 네덜란드 대표팀의 코치로 임명되어 지도자 수업을 받는다. 월드컵 이후 히딩크 감독의 후임 감독으로 임명된다. 히딩크 감독을 보좌하고 팀의 사정을 잘 아고 있다는 이유로 후임감독으로 임명되었지만 당시 경험 미숙으로 반대의견도 많았다. 그리고 홈에서 열리는 유로 2000에서 유로 96 준우승국 체코, 유로 92 우승국이자 1998 월드컵 8강 진출국 덴마크, 그리고 1998 월드컵 우승국 프랑스와 같은 조에 속해서 무거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그러나 조별예선에선 체코(1-0), 덴마크(3-0), 프랑스(3-2)를 무난히 격파하고 8강전에는 유고슬라비아(6-1)를 꺾고 4강에 진출하며 자신의 지도력을 과시하던 레이카르트는 4강전에 이탈리아(승부차기 패)에게 일격을 당하며 결승진출에 실패했고 그 직후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사임한다. 비록 우승컵은 못 얻었어도 레이카르트에게는 감독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해준 무대였다.

2000-01 시즌 네덜란드의 스파르타 로테르담 감독직으로 취임하지만, 영 좋지 않은 자금사정과 약한 전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팀을 2부리그로 강등시키기에 이른다.

그 후 2년동안 휴식을 취하던 레이카르트는 FC 바르셀로나의 감독으로 임명된다. 당시에도 유로 2000의 4강 진출은 선수빨이었다는 의견과 2000-01 시즌 로테르담의 2부리그 강등으로 인해 레이카르트 감독 취임을 바르셀로나 내부에서도 반대를 했었다. 오히려 그 당시 감독 0순위는 거스 히딩크과 로날드 쿠만(...)이었다. 하지만 팀의 레전드이자 당시 신임 회장인 조안 라포르타와 친분이 깊은 요한 크루이프가 둘의 감독임명에 반대했고[2] 오히려 마르코 반 바스텐과 레이카르트를 후임으로 거론한다. 반 바스텐은 코치 라이선스가 없다는 이유로 본인이 사양했고, 크루이프의 강력한 추천으로 팀 내부의 반대에도 레이카르트가 감독으로 임명된다.

당시 바르셀로나는 2002/03 시즌 루이스 판 할 감독이 깽판친 영향으로 순위가 폭풍하락했고, 뒷수습을 위해 임명한 라도미르 안티치 감독조차도 이 상황을 해결 못하고 리가 6위로 시즌을 마무리하면서 경질됐다. 과연 레이카르트가 분위기 반전에 성공할 수 있을지 여부에 관심이 모아졌다. 후안 로만 리켈메를 비야레알로 임대보내고 새롭게 바르셀로나의 부활의 전조를 알릴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호나우지뉴당시엔 호날두는 안중에도 없었던 우리의 UCC스타 히카르두 콰레스마[3], 루이스 가르시아, 라파엘 마르케스 등을 영입을 하며 팀의 분위기를 바꾸며 레이카르트를 뒷받침 했다.

하지만 시즌이 절반이 넘어갈 때까지 제대로 된 스타팅 라인업은 구성하지 못했고 레알 마드리드와의 엘 클라시코에서는 수비형 미드필더만 4명을 쓰는 이해하기 힘든 선수운용, 수비적인 전술, 호나우지뉴의 비효율적 활용 등으로 비판을 받았고 성적은 나아질 기미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2004년 1월, 유벤투스에서 여태까지와 달리 갑자기 부진에 빠지던 에드가 다비즈를 임대영입하며 다비즈-차비 에르난데스-필립 코쿠의 강력한 중원을 형성하고 클루이베르트를 과감히 제외시킨 뒤 호나우지뉴-하비에르 사비올라[4]-가르시아의 스리톱을 형성시키며 팀을 재정비 시킨 레이카르트는 그 뒤 15경기 무패행진을 달리기 시작하고 2003-04 시즌 우승 팀 발렌시아와 승점 5점 뒤진 상태로 준우승을 차지한다. 만약 바르셀로나의 팀 재정비가 2, 3경기만 더 빨랐어도 발렌시아의 우승이 위협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팀을 재정비한 레이카르트는 2004-05 시즌에도 개혁을 멈추지 않고 히오바니 반 브롱크호르스트를 제외하고 코쿠, 클루이베르트, 오베르마스, 라이지허, 다비즈[5]로 대표되는 네덜란드 대표 후배들과의 결별을 과감하게 선택하는 대신사무엘 에투, 데쿠, 루도빅 지울리, 에드미우손, 벨레티, 시우빙요 등을 영입한다. 데코-사비-에드미우손의 강력한 중원으로 숫적 우위를 점하고 전통적인 윙 포워드인 지울라와 화려함을 주무기로 삼는 외계인 호나우지뉴, 폭발적인 득점력을 자랑하는 사무엘 에투로 이어지는 강력한 스리톱으로 2004-05 시즌 6시즌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한다. 그 다음 시즌인 2005-06 시즌 중간에 사비의 장기 부상이 있었지만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의 활약으로 공백을 메꾸고 당시에 바르셀로나의 희망이었던 리오넬 메시의 등장 등 더욱 강력해진 바르셀로나는 2005-06 시즌 역시 리그 우승에 성공함과 동시에 챔피언스리그 우승까지 거머지게 되며 레이카르트는 감독으로서 전성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2005-06 시즌 이후 레이카르트와 팀을 함께 이끌던 텐 카테 수석코치가 팀을 떠나게 되고 선수들 역시 리그 2연패와 챔피언스리그 우승 등으로 동기부여가 없어진 상황에서 2006-07 시즌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유벤투스의 칼치오폴리 사태로 인해 지안루카 잠브로타릴리앙 튀랑 등을 영입하며 팀의 전력을 한층 강화시켰지만 동기부여가 없어진 선수들은 풀어지게 된다. 평소에도 자유방임주의적이던 레이카르트와는 달리 다소 강압적으로 선수들을 지휘하던 수석코치 텐 카테의 존재로 선수들을 장악할수 있게 되었는데 텐 카테의 후임인 요한 네이스컨스 수석코치 역시 레이카르트와 비슷한 자유방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한채 2006-07 시즌 유에파 슈퍼 컵에서 세비야에게 일격을 당하며 최악의 상태로 시즌을 출발하게 된다. 06/07 슈퍼 컵 당시 세비야는 선수와 코칭 스태프가 단체로 합숙을 하며 심기일전하며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던 반면에 바르셀로나의 경우 레이카르트는 오히려 선수들에게 자유 시간을 주고 가수들을 선수단이 머무는 호텔에 초대하며 느슨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차이가 세비야와 바르셀로나의 승패를 가른것. 결국 2006-07 시즌은 다 잡았던 리그 우승을 급 추격하던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에게 내주게 되고 챔피언스리그는 16강에서 탈락하는 등 최악의 상황으로 끝나게 된다.

2007-08 시즌에는 당시 바르셀로나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던 보드진의 주도로 야야 투레, 가브리엘 밀리토, 에릭 아비달 등을 영입하였으나 당시 팀의 핵심이었던 호나우딩요와 데쿠의 태만한 모습[6], 부실한 선수관리로 인한 선수들의 연속 부상, 감독과 선수와의 불화 등으로 비야레알에게 밀려 리그 3위로 추락하고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리오넬 메시의 활약으로 4강까지 올라가는데 성공하였으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밀려 결승진출에는 실패하게된다. 레이카르트는 나름대로 3-4-3의 전환이나 보얀, 지오반니 도스 산토스 등 10대 후반의 유망주들을 활용하며 팀의 분위기를 바꿔보려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불과 2시즌 만에 바르셀로나를 추락시킨 레이카르트는 결국 감독직을 사임한다. 그가 사임한 2008년 5월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 1-4 참패를 당한 바르사는 내리 2년을 레알 마드리드에게 타이틀을 내주었다. 바르사를 지지하는 스포츠 신문 <문도 데포르티보>는 헤드라인으로 "창피하다!"라고 내걸었고, <스포르트> 역시 "당신들은 바르사 유니폼을 입을 자격이 없다!"라는 문구를 어떠한 사진 없이 검은 배경에 배치한 1면에 내보내며 극도의 실망을 표했다.

1년간 휴식을 취하던 레이카르트는 2009-10 시즌 터키의 갈라타사라이 감독으로 취임한다. 그러나 2009-10 시즌 리그 3위, 2010-11 시즌에는 유로파리그 예선탈락 및 초반 부진으로 해임된다.

2011년 사우디 아라비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월드컵 3차 예선에서 호주와 오만에게 밀려 본선진출에 실패하였고 2013 걸프컵에서도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 하였고 곧바로 해임되었다.

그 이후 2013년 미국 플로리다 몬트버디에 있는 몬트버디 축구 아카데미의 기술고문으로 취임하여 지금까지 활동중이다.

5 전술 철학

사실 레이카르트는 바르셀로나 시절전술의 틀만 잡았을 뿐 사실상 전략을 꾸미던 사람은 수석코치인 행 카텐이였다.[7] 주제 무리뉴펩 과르디올라처럼 자신이 전술을 연구하고 짜는 감독도 있고 세부적인 전술을 수석코치나 전술진에게 위임하는 감독도 있는데 레이카르트는 알렉스 퍼거슨, 위르겐 클린스만 등과 함께 후자에 속한다.

요한 크루이프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임명된 만큼 공격적인 축구를 구사한다. 4-3-3을 바탕으로 스리톱과 강력한 중원, 수비수들의 적극적인 공격 가담으로 높은 라인을 유지하고 점유율 축구를 바탕으로 팀을 꾸려나간다. 이것은 후임 감독인 과르디올라 유사하지만 레이카르트의 경우 스리톱(호나우딩요-에투-메시)이 포지션 체인지를 시도할때도 다른 스리톱의 선수가 빈자리를 서로 메꿔주며 각자 자신의 자리는 지키는 형태로서 형식상 포메이션일뿐 실제로는 포지션 파괴를 보여준는 후임감독 펩 과르디올라와 비교하면 이러한 포메이션 부분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그 대신 자유방임주의적인 성격에서 드러나듯이 에투의 뒷공간 침투나 호나우지뉴와 데코의 개인기 등 선수들을 믿는 프리롤 부여가 비교적 많은 편이었다. 한마디로 펩 과르디올라가 포메이션이나 포지션 파괴등을 보여주는 대신 약속된 플레이로 경기를 진행한다면 프랑크 레이카르트의 경우 전체적인 포메이션으로 자리는 지키되 경기 안에서는 자유롭게 놔뒀다고 보면 된다.

다만 공격일변도는 아니었다. 2004/05 시즌 유럽 챔피언스리그 16강전에서 첼시를 상대로 홈에서 벌어진 1차전에서는 2:1의 근소한 우위를 가져갔으나 2차전에서 공격 일변도로 2:4로 완패를 당했다. 하지만 그 다음 시즌인 2005/06 시즌 챔피언스리그 16강전에서는 다시 상대하게 된 첼시를 상대로 라인을 내려 드록바를 고립시키고 양 윙백의 오버래핑을 자체시켜 로벤-조콜의 역습을 차단 후 호나우지뉴-에투-데코-메시의 카운터 어택으로 첼시를 격파하는 등 유연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6 기록

6.1 선수 시절

6.2 감독 시절

  • 바르셀로나 (2003/04 - 2007/08)
    • 스페인 라 리가 (2) : 2004/05, 2005/06
    • UEFA 챔피언스리그 (1) : 2005-06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 2005, 2006

7 수상 기록

7.1 선수 시절

  • 네덜란드 골든 슈즈 (2): 1985, 1987
  • 유로 1988 베스트 일레븐
  • 발롱도르 브론즈 어워드 (2): 1988, 1989
  • 이탈리아 세리에 A 올해의 외국인 선수 (1) : 1992
  • 이탈리아 세리에 A 올해의 선수 (1): 1992
  • FIFA 100

7.2 감독 시절

  • 돈 발론[8] 올해의 감독 상 (2) : 2004/05, 2005/06
  • UEFA 올해의 감독 (1) : 2005/06
  • UEFA 올해의 팀 감독 부분 (1): 2006
  • IFFHS 올해의 감독 (1): 2006
  • 옹즈도르 올해의 감독 (1): 2006
  1. 은퇴 후 1984-85 시즌부터 아약스 지휘봉을 잡았다.
  2. 히딩크는 크루이프와 축구 철학이 다른 편이고, 쿠만은 성격 자체가 워낙 강성이라...
  3. 한 시즌만에 쫓겨난다.
  4. 사비올라 역시 그 다음 시즌 사무엘 에투의 영입으로 팽 당한다.
  5. 반 시즌만에 인터밀란으로 이적하면서 떠났다.
  6. 호나우딩요는 당시에 훈련장에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 라는 이야기까지 있다.
  7. 이 점을 높이산 첼시가 무리뉴 경질후 카텐 감독설 링크가 뜨기도 했다.
  8. 해마다 프리메라리가에서 활약한 최고의 스페인 선수, 외국인 선수, 영플레이어, 감독, 심판을 뽑는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