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진컴퓨터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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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게 이름 세진컴퓨터
사진의 촬영시점은 96~97년 이후로 추정된다.[1]

1 개요

1992년에 설립되어 2000년에 파산대한민국컴퓨터전문 유통업체.

90년대 중후반 중고딩 컴덕들의 전당이던 컴퓨터 전문매장. 아직도 주로 가던 세진컴퓨터랜드 매장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다. 한창 잘나가던 때는 세진때문에 동네 컴퓨터매장들도 값을 내려파는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잘 나갔다. 그 정도로 저렴한 가격을 앞세워 컴퓨터를 팔았다. 저렴한 가격을 어필하기 위해 자주 바겐세일을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온갖 명목으로 '세일기간'이 1년 내내 끊이지 않게 되었다.연쇄 할인마

한상수 사장이 부산에서 대우통신 대리점으로 창업한 것이 최초였다.[2]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서울에도 진출하는 등 전국적인 컴퓨터 전문매장이 되었으며, 무서운 기세로 매장을 확장해 나갔다. 이는 2011년 기준으로 비교하자면 카페베네의 확장과 맞먹는 속도였는데, 카페베네가 프랜차이즈형 카페인 데 반해 세진컴퓨터랜드는 컴퓨터를 파는 곳이었음을 감안하면 얼마나 공격적이고 무모한 확장이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특히나 마케팅도 상당히 공격적이였는데 당시 일했던 직원에 말에 따르면 매일 퇴근 후에는 10톤 탑차에 전단지를 가득실고 북한삐라 뿌리듯이 전단지를 뿌려대고 매장 주변 아파트,전봇대 등에 전단지를 붙이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마케팅이 지방에는 먹혀서 지방에서 압도적인 점유율을 기록했다. 처음에는 다른 회사의 컴퓨터 및 주변기기, 소프트웨어 판매만 했으나 나중에는 자체 브랜드PC 판매도 했다.[3]

지점 하나하나가 상당히 컸는데 오직 PC와 그 관련제품만 팔았다. 가전제품 양판점인 하이마트나 전자랜드21 정도 되는 매장에서 컴퓨터만 판매한다면 비슷한 규모일 듯.

오늘날에는 지방에서도 인터넷으로 간단히 가격을 비교하며 카드로 택배주문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지방에서 용산제 컴퓨터를 구입하려면 용산의 매장 전화번호를 구해서 전화를 걸어 주문을 한 다음 은행에 가서 무통장입금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비교적 용산 수준에 가까운 저렴한 가격에 매장에서 실물을 보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지방 소비자들에게 대단한 메리트였다.

뿐만 아니라 용산에 비해 훨씬 더 훌륭한 쇼핑경험을 제공했다. 서비스 수준에 있어서는 재래시장과 대형마트 정도의 차이가 있었는데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친절 교육을 받은 직원들이 단정한 복장을 입고[4] 접객을 했다.
  • 호객행위를 하지 않았다. 용산처럼 욕설 같은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 깔끔한 매장에 누구나 집어볼 수 있도록 각종 물건이 진열되어 있었다.
  • 지금의 가전용품 매장처럼 컴퓨터를 직접 사용할수 있게 되있었으며 대형 화면으로 게임도 할수 있게 되어있었다. 심지허 프린트,복사,스캐너,팩스 까지 무료료 쓸수 있었다.
  • 정찰제였기 때문에 누구나 바가지 걱정없이 안심하고 살 수 있었다.[5]
  • 결제는 나갈 때 일괄로 한 번만 하면 됐다.
  • 무료 컴퓨터 교실을 상시적으로 운영했다. [6]
  • 정품 윈도우를 설치했다.
  • 컴퓨터 구입 고객에게 평생 무상 A/S를 제공했다. A/S 직원도 단정한 복장을 갖추고 지금 기준에서도 아주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지역이 멀더라도 상관없이 직원이 찾아가 무상 A/S를 해주었다. 심지어 도서지방이면 직원이 배를 타고, 산간지방은 산을타고 올라가서 무상 A/S를 해주었다!

오늘날 아이코다나 컴퓨존 같은 업체들이 서비스를 우위로 영업하는 업체들이 나타났지만 여전히 세진의 수준과 규모에는 미치지 못한다.

2016년 지금 봐도 세진컴퓨터랜드는 시대를 앞서나간 감이 있는데, 동네에 세진컴퓨터랜드가 들어서면 몇층짜리 건물 전체가 세진컴퓨터에 시설도 매우 깔끔하고 한층은 PC게임으로 가득찼다든지 깔끔한 정찰제에 친절한 직원들, 산뜻한 최신 인테리어를 갖춘 시설과 배치 등 당시 인터넷도 없던 어린아이들에게 최신 컴퓨터와 게임을 눈 앞에서 구경할 수 있는 세진컴퓨터랜드는 천국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당시 아이들에겐 용산에나 가야 최신문물을 접할 수 있던 시절인데, 용산은 멀고 복잡하고 용팔이들의 호객행위로 인해 쾌적한 구경이 힘들었던 반면, 세진컴퓨터랜드는 서울과 지방 동네 곳곳에 세워졌기에 아이들이 학원 끝나고 가볍게 들러서 구경하기도 좋고, 호객행위도 없고 딱히 구경한다고 눈치를 주거나 하지도 않았기에 편안히 구경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참고로 그 당시엔 PC가 없는 아이들도 많았고 PC가 워낙 고가였던 시절이라(200만원 정도로 당시 서울 목동 27평 아파트 전세가 5000만원) 많은 아이들에게 PC자체가 그림의 떡이라서 친구네 집에서나 할 수 있던 아이들도 많던 시절인데, 눈 앞에서 최신PC와 최신PC게임들을 구경하는 그때의 심정이란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엿보는 듯한 느낌이 나기도 했을 것이다. 세진컴퓨터랜드의 전성기가 불과 몇년이었을 뿐인데 지금까지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당시 나름대로 유명했던 자체 브랜드로는 고급형으로 세종대왕 시리즈와 보급형으로 진돗개 시리즈가 있었다. 팔려간 진돗개가 진도의 옛 주인에게 돌아왔다는 실화를 내용으로 한 CF가 유명하다. [7] 국민PC가 등장하고서는 그쪽에 집중하였으나 이후 대기업들의 PC가격 인하로 국민PC의 설 자리가 없어지자 덩달아 큰 타격을 입었다. 광고모델로는 진돗개와 강호동이 있었다. 또 "세종대왕문맹 없는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세진은 컴맹 없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광고 캠페인도 있었다. 세진대왕


회사자체가 폐업으로 사라져서 평생 A/S가 의미 없어져 버렸다(...). 참고로 해당 광고의 나레이션은 성우 故장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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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강호동의 모습(…)

2 무리한 확장 그리고 파산

너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만 하다가 어느날 흔적도 없이 파산하고 말았다. 직접적인 원인은 끝없이 매출이 성장하지 않으면 망하는 차입경영에 있었다. 외상으로 물건을 들여 싸게 팔고 그 매출액을 기반으로 다시 물건을 외상으로 들여오는 물건이 잘 팔리지 않으면 즉각 부도가 나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과다한 광고비를 집행하였고 이것이 외상과 함께 누적 적자를 가중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PC를 팔아 남는 이익금을 제조사에게는 한푼도 주지 않고 전부를 매장수 확대와 마케팅에 써버렸다.

1995년 1차로 부도위기를 겪은 뒤 지분의 51%를 당시 대우그룹의 컴퓨터관련 사업을 담당하던 대우통신에게 넘겨 대기업의 후광을 빌어 경영하였으나[8] 경영악화가 만성화되던 1997년 2월, 대우통신에게 완전 매각되어 회생할 뻔 했다.[9] 그러나 이후 대우그룹 해체 과정에서 대우통신을 통한 자금조달과 경영지원이 불가능해진 것이 결정타가 되어 2000년 7월 1차 부도 후 9월에 법원의 파산선고를 받고 망했다.

파산 당시 세진컴퓨터랜드의 자산은 780억원에 불과하였으나 부채는 4,800억원에 달했다. 4,800억원 중 대우통신의 몫이 4,000억원 이상이었는데(...), 대우통신도 대우그룹 해체에서 비롯된 청산과정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세진컴퓨터랜드는 망하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주거래은행이었던 한빛은행의 여신은 전체의 1%도 되지 않는 30억원, 말하자면 대부분의 부채가 외상값(...)이었다는 것이다.

망하기 전에 직영매장을 정리하고 프렌차이즈화 하는 것으로 경영방침을 전환했는데[10], 파산 시점에 직영점 52개를 포함해 258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2.1 사장 맘대로식의 직원 관리

한상수 사장은 전형적인 카리스마적 리더였다고 하며 한국의 경영자들이 흔히 오는 정주영[11] 이 심했었다고 한다. 그런 부류의 창업자가 흔히 그렇듯이 그런 기질들 덕분에 빠른 확장이 가능했고 결국 그 독단에 발목을 잡히게 되었다. # 또 한상수 사장은 다혈질로서 직원폭행사건 등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

여담으로 링크의 기사를 보면 네티즌이라는 말 대신 통신인이라는 말이 쓰여 시대(PC통신 시절)를 느낄 수 있다. 직원을 군대식으로 관리해서 물의를 일으켰으며[12], 실력주의를 말하며 오로지 나이, 년차에 관계없이 능력으로 평가하겠다라며 신입사원 교육 2주차인 사람에게 대리로 승진을 시켜주는가 하며 부산지점의 과장은 전화 받는 목소리가 작다면서 즉각 서울로 올라오라고 명령을 내린 뒤 부랴부랴 올라온 사람을 그 자리에서 일반사원으로 강등시키는 등 막장행보를 보여왔다.[13]

이러한 군대식으로 사람을 관리해 입사한 사람 중 절반 이상이 교육 과정인 한달 안에 세진을 떠났다.한상수 사장 인터뷰 기사 고객한테만 잘할 게 아니라 직원한테도 잘했어야지? 상기했듯 이러한 군대식 관리로 서비스 부분에서는 매우 우수했으나 근무 환경은 당연히 최악이었다. 이를 계기로 사원이나 점장들 역시 단결투쟁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1997년 2월부터 세진컴퓨터랜드에 노동조합이 생겨 한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한 사장 사퇴 이후 군대식 문화가 사그러지고 프랜차이즈 점이 많아지면서 그나마 자랑거리던 우수한 서비스도 말년에는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1995년 당시 시사저널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사례가 나온다.

  • 울산점 오픈을 하루 앞둔 날, 서울 잠실점에서 울산으로 파견 근무를 나가 있던 여직원 1명이 한상수 사장에게 폭행을 당했다. 개막 준비로 어수선한 매장에서 한사장은 스티커 작업이 소홀하다는 이유로 “남녀를 동등하게 대해 주겠다”며 여직원을 주먹으로 때렸다. 여직원이 뒤돌아서서 울자 한사장은 다시 우는 것을 트집잡아 때렸다. 폭행을 당한 여직원은 그날로 사표를 썼다.
  • 7월 어느날 서울 잠실점에 근무하던 여직원 한 사람은 사적인 통화를 한다고 큰 꾸지람을 당했다. 그날 저녁 석회 시간에 전직원 앞에서 다시 인격적 모욕을 당한 여직원은 울면서 계단을 내려가다 넘어져 앞니가 모두 부러진 채 병원에 실려갔다. 한사장은 다음날 그 여직원을 해고 조처했다.
  • 7월 한달간 전직원 휴무 금지 조처가 내려졌다. 직원들이 피곤과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상태에서 8월20일 일요일 근무를 하는 도중 갑작스런 방송이 나왔다. 다음날 대구에서 단합대회가 있으니 전직원은 대구역 앞에 새벽 5시30분까지 집결하라는 방송이었다. 사전 예고가 전혀 없는 갑작스런 일정이었다. 청바지와 운동화를 미처 준비하지 못한 직원들에게 일괄 구입 지시가 내려졌고, 서울 잠실점의 경우 근무가 끝난 밤 10시에 대기해 둔 버스를 타고 전직원이 대구로 이동했다. 전국 각지 5개 점에서 모인 직원들은 잠도 제대로 못잔 상태에서 10km 구보를 했다.
  • 단합대회를 떠나기 직전 전격적인 임금 인상 조처가 발표됐다. 전직원의 임금 제도를 연봉제로 바꾸고 신입 평사원의 연봉을 1천8백만원으로 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러나 이 발표는 하루 만에 번복되었다. [14]

3 파산 이후

현재 본사[15]가 있던 건물은 그대로 있으나 세진컴퓨터랜드의 흔적조차도 없고, 단지 경영학 입문, 마케팅 관련 교재에 대표적인 경영 실패 사례로 그 흔적을 남겼다. 안습.

세진전자와는 이름 때문에 같은 계열사로 혼동하기 쉬우나 절대 관계없는 회사이다.

당시 만들어냈던 자체 브랜드 PC의 경우 케이스가 경이로운 내구성을 자랑하기 때문에 [16] 가끔 컴덕들이 진돗개 케이스를 찾아다니기도 한다. 사실 내구성이라면 세종대왕 [17]이 甲 대우를 받지만 이 쪽은 너무 옛날 제품이라 규격 때문에 현시점에서 써먹긴 힘들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117-3번지 네이버, 다음 지도 검색 결과는 세진컴퓨터랜드가 아직 현존하는데 과거 세진컴퓨터 프랜차이즈 점으로 회사가 망한 이후에도 업체 이름을 바꾸지 않고 현재도 사용중으로 추정된다. 네이버 지도 거리뷰 다음 지도 로드뷰 설마 한상수 씨가 재기를 위해 다시 차린 가게일 리는 없겠지? 2016년 4월 현재 네이버 지도에는 디지털세진컴퓨터랜드라고 나오며, 간판에는 '세진컴퓨터' 달랑 써있으나, 문에는 DSEJIN이라고 쓰여있다. 익숙한 SEJIN의 CI지만, 자세히 보면 D가 하나 더붙어있다.(...) 저 가게만 보면 'D'가 뭐지라고 의아할 수 있는데 네이버 지도에 나온 검색결과를 보면 디지털을 의미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옛날에는 저 근처에 실제 세진컴퓨터랜드 매장이 있었다. 거리 사진에서 오산 방향으로 올라가다 왼쪽에 요양병원이라고 쓰여 있는 건물이 예전 세진컴퓨터랜드 매장 건물이다. 그런데 위 사진 속 간판에 쓰인 것과 같은 CI를 쓰는 세진컴퓨터 안계점이 경북 의성군 안계면 용기리에 있다. 네이버 지도 거리뷰 세진컴퓨터랜드의 부활? 여긴 우리가 아는 SEJIN의 CI와 완전히 동일하다. 간판에 크고 또렷하게 박혀 있다. 오래된 낡은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추억의 세진컴퓨터랜드 간판을 깨끗한 네이버 지도 거리뷰로 볼 수 있다니, 마치 타임머신타고 추억 속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나지만, 구 세진컴퓨터랜드와는 별 관련이 없어보인다는게 함정.(...) 어쩌면 사장 이름이 '세진'일 수도? 참고로 현주몰이란 곳에서 구 현주컴퓨터의 로고를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는데, 대표이사 이름이 박현주다.(...)

세진컴퓨터랜드는 짧고 굵은 인생의 표본이었는데, 전성기는 90년대 중후반으로 불과 몇년에 불과했으나, 그때 워낙 폭발적인 열풍을 불러일으켰던지라 망한지 20년 가까이 다 되가는 지금도 세진컴퓨터를 자처하는 곳들도 있고, 컴덕들이 진돗개 케이스를 찾아다닌다든지 하는거 보면 한국 컴퓨터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대단한 기업은 기업인 셈. 마이크 타이슨과 비슷한 면이 큰데, 타이슨의 전성기와 세진 컴퓨터랜드의 전성기는 90년대로 거의 일치하며, 둘 다 전성기는 매우 짧았으나 사람들에게 워낙 인상적인 면을 남겼기에 망한지 20년 가까이 다 되가는 지금도 전설처럼 불리고 있다. 물론 저러한 부정적인 면은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추억 보정이 크지만.
  1. CI모양을 자세히 보면 후기형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96년 이전까지는 구 CI(우측 하단 참조)를 사용.
  2. 2000년 파산할 때까지 끊임없이 얽힌 대우통신과의 인연의 시작이 여기에 있었다.
  3. 하지만 서울에 매장을 개설한 1995년을 기준으로 매출의 절반 이상을 대우통신의 제품이 차지했었고, 1차 부도 위기를 겪은 1995년 11월 기사를 뒤적거려보면 업계 종사자들은 좀 커다란 대우통신 대리점으로 생각하기도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 1997년 대우통신이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대우통신의 제품비중이 더 커졌다. 대우통신은 PC사업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삼성, LG, 삼보 같은 다른 PC제조사들과는 달리 대리점 유통망이 전무했기 때문에 때문에 전국적인 유통망을 유지하기 위해서 유독 관대했었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1993년에 삼성, LG, 삼보는 외상거래가 일정기간 지속되자 대금지급이 될 때까지 일시적으로 거래를 끊기도 했었다. 그때 다른 제조사들과 함께 거래를 끊었다면 (세진은 그때 망했겠지만) 대우그룹은 1조원정도의 손실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4. 지점장을 제외하고 전직원이 하늘색 줄무늬 셔츠를 입고있었다.
  5. 부품 구성에 사기를 치지도 않았다. 90년대 용산에서는 이런 일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6. 컴퓨터 학원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등 대호황인 시대였다.
  7. 94년도 이 실화가 TV에 방영되며 화재를 모았었다. 이 실화를 바탕으로 하얀마음 백구 라는 애니메이션도 나왔다.
  8. 보유지분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이때부터 1997년 초까지는 한상수사장이 계속 경영했고, 대우통신이 지급 보증을 서는 등 아낌없이 경영 지원에 임했다.
  9. 49%의 한상수사장의 지분을 대우통신 임원들이 분산 매수해 공정거래법상 계열사가 아닌 것처럼 위장하기도 했다.
  10. 프랜차이즈점의 서비스는 직영점보다 나빴다. 정책상 AS는 무상인데도 요금을 청구한다든지, 방문설치기사의 친절도가 떨어진다든지 하는 등으로 평판을 깎아먹는데 크게 일조했다.
  11. 직원들을 무슨 군대마냥 군기를 심하게 잡으면서 독단적이고 즉흥적으로 결단을 내려버리고 정주영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하려는 것을 흔히 정주영병이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정주영병에 걸린사람으로 STX 강만수 회장을 꼽을수 있다. 정주영을 상징하는 명대사 "이봐, 책임자. 해봤어?"
  12. 아예 공군 중령출신을 임원으로 앉혔다. [1]
  13. 결국 이 과장은 처자식이 있었음에도 눈물을 흘리며 퇴사를 했다.
  14. 이말을 번복하며 사장이 했던말이 "월급을 올려줘도 고마워 할줄 모른다." 였다. 지금으로 치면 약 4000만원으로 전자제품 판매업종중에 압도적으로 높은 연봉이라고 볼수 있다. 당시 4년제 대학생들이 세후 월급 100만원을 받아봤으면 좋겠다라고 할때였으니 말이 必要韓紙
  15. 주소는 서울시 강서구 염창동 260-15번지인데 옛날의 그 건물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다른 건물이 있다. 현재 건물 이름은 도레미빌딩인데 세진컴퓨터랜드가 있던 시절 건물 이름은 알 수 없다. 세진빌딩이었을 수도 여담으로 지금의 도레미빌딩은 시키면 한다! 약간 위험한 방송의 주 촬영지이기도 하였다.
  16. 탈크를 섞은 플라스틱을 사용했다. 자동차 범퍼 등 외장재에 범퍼로 쓰이는 재질이다.
  17. 컴퓨터에 시계가 달려있었다. 20150924093600_knESCLvp_1111231541252.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