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숙오

孫叔敖
춘추시대 패자였던 초장왕의 명신, 춘추시대 초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명신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초장왕을 춘추오패로 만든 일등공신이다. 손숙은 그의 자인데, 춘추시대의 습관 중 하나가 자+휘로 사람을 부르는 것으로 손숙오도 그 예이다.

본래 이름은 위오蔿敖로 위씨(한자 표기는 蔿=薳 두 가지로 하는데, 薳은 '원'으로도 읽히기에 원씨라고 읽기도 한다)는 초왕 분모 이후로 대대로 유력 세경가 중 하나였다.[1]

그러나 초장왕이 왕위에 오르고, 당시 영윤이었던 투월초의 세력이 줄자, 이에 불만은 품은 투씨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군 총 책임자였던 사마 위가[2]를 가장 먼저 제거하자 위오는 도성을 탈출해 살아남았다.

투월초의 반란이 진압되고 초장왕이 나라를 안정시킬 인재를 뽑았을때 당시 영윤(초나라 재상의 호칭)이었던 우구가 천거하여 영윤자리에 올랐다.[3]

그가 세운 업적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업적은 토지 개간과 화폐 개혁이 있다.

토지 개간은 내전으로 황폐화된 도읍 영성(삼국지로 치면 강릉)의 농지를 복구하고 땅을 다듬어 민생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화폐개혁은 그간 무거웠던 화폐를 경량화시켜 매매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하여 형주지역[4]의 교통까지 자연스레 활발하게 만드는데 지대한 공을 하였다.[5]

이를 두고 초장왕이 "제환공에게 관중이 있었고, 초성왕에게 자문[6]이 있었듯이 내게는 손숙오가 있도다."라고 할 정도. 게다가 제환공과 초성왕을 본받아 초장왕도 초나라 사람이면 함부로 그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다만 군사적 능력으로는 정치적 능력만큼 뛰어나지는 않았는지 진晉나라와 일대 결전을 벌인 필邲의 전투에서는 일개 장수였던 오삼에게 일등공신 자리를 내준다. 어쩐지 제갈량이 생각나는 대목.[7]

후에 죽을 때는 그릇 하나 성한 것이 없고, 또한 가진 재산이 없어 집이 깨끗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생긴 단어가 청빈. 또한 위씨 집안의 후계자를 자신의 아들인 손안에게 물려주지 않고 철저히 능력 위주로 물려줘 조카 위빙에게 물려주었으며 이 일로 초장왕은 그를 잃은 것을 더욱 애달퍼하였다. 사서마다 민간에 전해지는 내용이 각자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궁중배우 우맹이 손숙오의 아들이 비천한 삶을 구해주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8]

  1. 당시 세경가는 자국 왕공족 출신이 대부분이지만 초나라는 그 경향이 아주 심했다. 가장 대표적인 춘추시대 초나라 세경가인 투씨, 성씨, 굴씨, 위씨, 전국시대 세경가인 굴씨(앞의 굴씨 맞다), 소씨, 경씨 모두 그 뿌리를 초나라 왕실에 두고 있다.
  2. 손숙오의 아버지
  3. 손숙오가 침沈 땅에 은거하고 있을 시절 머리가 2개인 뱀(양두사)를 보고 죽여서 음덕을 세워 영윤에 올랐다는 민간이야기가 여기에서 전해진다.
  4. 주나라 기준에서의 천하 9주를 말한다.
  5. 사마천의 사기에서 둔리열전에 따로 소개하고 있을 정도다.
  6. 관중과 나란히 비견되는 인물로 초성왕 시절의 명신이다. 이름은 투곡오도며, 뜻은 호랑이 젖을 먹은 사람이란 뜻으로 역사서마다 곡어토, 누오토 등으로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7. 좌전에서는 손숙오가 영윤이 되자 영전令典이 바로잡혔다고 기술할 정도
  8. 역사가들이 각자 다른 버전의 민간전승을 채택해서 기술하였기 때문에 이야기의 차이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