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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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남은 뭐랄까, 송대관과 정대만을 섞어 놓은 이름이다. 내 이름은 송대만, 포기를 모르는 네 박자지. 뭐 이런 느낌"

- 2012 런던 올림픽 금메달 획득 후 나온 어느 트위터리안의 트윗(...)

대한민국의 전 유도 선수, 현 유도 코치.
런던 올림픽 유도 남자 -90kg급 금메달리스트.
-대한민국 올림픽 도전 역사상 개인 종목 최고령 금메달리스트-[1]

1979년 4월 5일 생. 경민고등학교와 청주대학교를 졸업했다.

소년체전 입상 등 유도 유망주로 주목을 받았던 선수였지만, 경민고 2학년 때부터 슬럼프에 빠지며 별다른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해 유도계의 빅 3 대학교인 용인대학교, 한국체육대학교, 한양대학교 등으로부터 부름을 받지 못했다. 이 때 당시 청주대학교 유도부를 이끌던 박종학 감독의 눈에 들어오면서 1998년 청주대학교에 입학했다.

청주대학교에 입학한 후 1999년 춘계전국대학 연맹전(66kg급) 우승, 2000년 전국체전(73kg급) 준우승, 2001년 추계전국대학 유도연맹전 73kg급에서 우승하며 조금씩 다시 이름을 알린 그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린 시기는 2005년부터로, -81kg급의 국가대표로 군림해 각종 국제대회에 출전, 우승을 차지하면서 세계 랭킹 1위에도 오를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번번히 부상과 불운이 겹치며 올림픽에 계속 나가지 못했고, 상무에서 군 복무를 했다.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권영우에게 밀려 아테네행 티켓을 놓쳤고,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73kg급의 이원희 vs 왕기춘의 경쟁에서 밀려 81kg급으로 체급을 올린 김재범의 대두로 인해 치열한 선발 경쟁을 벌여야 했다. 결국 연장 접전 끝에 김재범에게 최종 선발전 결승에서 판정패하면서 베이징행 티켓을 헌납해야 했다. 그리고 그 대회에서 김재범은 은메달을 차지하면서 동 체급의 강자로 떠올랐고, 이어 2010년과 2011년 세계선수권 우승 등으로 최강자의 입지를 굳히게 되면서 졸지에 송대남의 입지는 묘하게 흔들리게 되었다. 그리고 2010년 11월 무릎 부상을 당해 무릎 십자인대를 잇고 연골 봉합 수술을 받아 재활하게 되면서, 4개월 넘게 유도판을 떠나 있었다.

갑자기 굴러들어온 돌에게 밀려난 송대남은 처음에는 방황했지만, 정훈 감독의 지도 아래 방황을 멈췄다. 대신 동 체급의 강자로 부상한 김재범과의 경쟁을 피하기 위해 -90kg으로 또 한 번 체급을 올렸다. 하루에 스테이크를 12개를 먹는 강행군 끝에 증량을 시도해서 자리를 잡는데는 성공했지만, -80kg과는 달리 세계 무대에서 초강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다행히 이 체급은 대한민국 선수들이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상황이어서 자동 시드 배정자가 없었고, 결국 이규원과의 대표 선발전 끝에 2012 런던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2012 런던 올림픽 당시에는 만 33세로 일종의 다크호스 정도로 여겨졌지만, 본선에서 그야말로 인생 최고의 경기를 선보이면서 8강에서 당시 세계랭킹 1위의 일본 선수를 누르면서 4강 진출에 성공하더니, 4강에서는 브라질 선수를, 결승에서는 쿠바 선수를 연장 접전 끝에 끝내기 안뒤축 기술로 극적인 금메달을 차지했다. 그리고 2012 런던 올림픽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하면서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선수 생활을 화려하게 마무리하는 데 성공했다.

은퇴 후에는 남자 유도 국가대표팀 코치로 재직 중인데, 2015년 세계선수권에서 대한민국 남자 유도가 금메달 2개를 따내고, 안바울, 안창림, 곽동한 등 많은 유망주들이 등장하면서 코치로서의 능력도 인정받았다.

여담으로 런던 올림픽 당시 국가대표팀 감독인 정훈 감독은 송대남과 동서 사이, 즉 정훈 감독의 처제가 송대남과 결혼했다. 정훈 감독이 사람 좋고 성실한 모습에 처제를 소개시켜 줬다고.
  1.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동갑내기 권총 사격선수 진종오에 의해 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