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海林 太郎(しょうじ たろう). 1898년 12월 11일 ~ 1972년 10월 4일.
1 가수가 되기 전
1898년(메이지 31년)생의 일본 가수.무려 옆나라에서 만민공동회 할 때 태어났다 아키타 현 출신. 양친은 남만주철도의 직원으로 만주에 있었기에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장성하여 와세다대학 경제학과에 진학하였고, 졸업하고 나서 부모처럼 만주에 건너가 남만주철도의 직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와세다대학 재학 시절에 하필이면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했기에 사상 관계로 좌천당하고 이에 낙담하여 귀국한다. 그 뒤 모교 앞에 해당하는 도쿄 타카다노바바에서 중국집을 개업했고, 당시 일본에서는 교자 붐이 일었기에 그의 생활은 꽤나 윤택했다고 한다.
2 가수가 된 후
그러나 1931년, 명월적성산(名月赤城山)을 취입하여 가수로 데뷔, 이후 여립도중(旅笠道中) 등의 히트곡을 내며 전전(戦前)을 대표하는 가수가 된다. 하지만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부터 맥과 병대(麦と兵隊), 상해함락만만세(上海陥落万々歳), 칭다오행진곡(青島行進曲), 전우의 유골을 안고(戦友の遺骨を抱いて) 등 주로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관한 전시 선전 가요를 부르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이를 선전한 가수가 된다. 쇼지 타로가 와세다대학 학사의 고학력자, 즉 지식인이라는 점과 더불어 그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했던 것 때문에 쇼지 타로에 대해서는 「나는 무식했으니까 나라에서 시키는 건 무조건 옳은 줄 알고 그랬습니다」 같은 변명이나 옹호는 불가능하다. 결국 일제 패망 후 그가 부른 노래들은 대부분 잊혀지며[1], 본인도 주일미군에게 감시받는 생활을 한다. 패전으로부터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는 일본가수협회의 초대 회장을 하는 등 직접적으로 음반을 취입하기보다는 원로 가수로서의 활동에 주력하다가 1972년에 사망.- ↑ 원래는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전쟁색이 지나치게 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상당수는 카라오케 기계에도 등록될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