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満州鉄道株式会社
The South Manchuria Railway Co., Ltd.
일명 만철(満鉄). 만주국에 있던 회사. 철도 사업을 경영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여, 광업, 유통업, 제조업, 출판업 등 만주국의 산업 전반을 지배하였다.[1] 동척이나 동인도회사처럼 사실상의 수탈기업이자 일본의 국책기업이었다. 단순히 철도 사업에만 치중된 회사가 아니라, 직접 광산이나 항만을 운영하는가 하면 정유, 숙박, 교육, 의료, 원자재 등 다양한 분야에 문어발식 확장을 하였고 1920년대에는 일본 정부의 1년 세입의 4분의 1에 달하는 막대한 연간 수익을 기록하였을 정도로 만주국의 경제, 산업을 지배하였다.
1906년 러일전쟁 직후 러시아에게서 할양받은 철도와 부속지를 바탕으로 설립되었으며, 초대 총재는 대만총독부 민정장관으로 대만 식민정책을 총 지휘했던 문관출신 고토 신페이였다. 한편 1910년 경술국치이 기정사실화된 배경에는 만주 철도의 중립화를 둘러싼 미일러간의 암투가 촉매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러일전쟁 끝나고 미국이 만주철도에 개입하려는걸 눈치챈 일본이 바로 전쟁끝낸 러시아와 협상하고 미국에 앞서서 만주철도 관련 이권을 선수친것. 그런 관계로 만주-중국으로 향하는 이권의 교두보를 위해서 한일합방을 공고화했다는것이 이 글의 요지이다. 임진왜란 때도 중국 털기 위한 길을 만드려고 조선을 털려다 막혔지 아마 만철에 근무하는 일본인들의 경제적 보상 역시 좋은 편이었다. 만철에 근무하는 일본인들은 2만 명이 넘었는데, 이들은 중국인 하인을 고용하는 등 마치 귀족과 같은 삶을 만주에서 누릴 수 있었다. 역시 물가가 저렴해야
1917년부터 1925년까지 조선총독부의 철도, 즉 한반도의 철도를 위탁경영하기도 하였고[2], 동양척식회사와 동업으로 만주 이민계획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만철도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까지도 철도청에서 만철이 생산한 화차를 사용하였다고 하니 의외로 그 흔적은 끈질겼다. 심지어 중국 신강위구르 자치구의 오지에선 1980년에도 만철제 화차가 현역으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특기할 만한 점으로는 중국이나 러시아와 인접한 만주에서 사업을 벌이는 만큼 산업이나 경제, 시장, 자원탐사 등의 분야는 물론 국제정세와 안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많은 신경을 썼고, 이를 위해 우수한 인력들을 대거 고용하여 연간 6천 건이 넘는 보고서를 생산해내는 싱크탱크를 운영하였다. 이 만철의 조사부는 정보 획득을 위해 뉴욕이나 파리 등에도 지부를 설립하는 등, 당시로서는 첨단 지식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이 일본 제국의 싱크탱크라고 부를 만한 만철에는 일본의 신진 학자들이 많이 참여하였으며 마르크스주의자나 여타 다양한 사상을 가진 학자들이 골고루 포진되었고, 이들은 이제 산업 개발이 이루어지려 하는 만주에서 첨단의 도시 계획이나 정책을 만들어내는 일을 맡았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일제가 패망한 뒤에는 소련이 남만주철도를 모두 차지했으며, 중국이 공산화된 후 스탈린이 공산화 축하 선물로 1952년 반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