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 누만티누스 <Publius Cornelius Scipio Aemilianus Africanus Numantinus>, BC185~BC129
고대 로마의 장군으로 제 2차 포에니 전쟁에서 활약한 유명한 장군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처조카인 인연으로 양손자, 즉 그의 장남의 양자로 들어갔다. 제 3차 포에니 전쟁 때 카르타고를 공격하여 맹렬한 저항을 받은 끝에 3년 만에 카르타고를 멸망시켰다.
먼나라 이웃나라에는 카르타고의 도시를 정복하고 파괴한 참혹한 현장을 보고 그 자신이 멸망시킨 카르타고의 잔해 아래서 눈물을 흘려 카르타고인들이 3년 동안 버틴 것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여 노예로 만들거나 전리품으로 끌고가지 않고 아프리카의 외딴 곳으로 보냈다고 한다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런 거 없었다. 죽거나 노예거나(...). 다만 카르타고 함락 이후 전쟁에 동행한 역사가 폴리비오스(이 당시 스키피오는 폴리비오스의 후견인이었다.)와의 대담이 전해지는데, 파괴되어 불타는 카르타고를 바라보며 트로이 전쟁의 장수 헥토르의 말을 언급했다고 한다.[1] 이때 폴리비오스가 왜 지금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묻자 "언젠가 우리 로마도 카르타고처럼 멸망할 것이다"라고 대답한 일화는 유명하다.
뒤이어 스페인의 누만티아를 정복하여 로마의 지배를 확립한 공으로 누만티누스라는 칭호를 받는다.
그라쿠스 형제와는 친가 쪽으로는 5촌, 양가 쪽으로는 4촌 형제였으며 아이밀리아누스가 그라쿠스 형제의 누이인 셈프로니아와 혼인했기 때문에 처남 매부 사이로 아주 가까운 사이였으나,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에는 반대했다. 그 후 기원전 129년, 농지개혁을 단행하려는 그라쿠스 파의 연설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기 하루 전에 의문사를 당하였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죽음을 방조한 것에 분노한 아내 셈프로니아 혹은 형제의 어머니 코르넬리아가 그를 독살한 것이라고 하나 증거는 없다.
스키피오는 이전에 그라쿠스의 개혁안과 거의 동일한 것을 자신이 후원하던 호민관을 통해 내게 했다가 반대에 부딪혀 철회한 적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그라쿠스를 지지하였는지는 당시 사람들도 궁금했는지, 훗날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자 스키피오는 "만일 그의 목적이 공화정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다면, 그는 정당하게 살해된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사실 그라쿠스가 죽은 이유는 농지법보다는 호민관 연임이었고, 이는 참주가 되려는 시도처럼 비쳐졌기에 개혁 자체는 찬성했어도 그를 반대한 이들이 많았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티베리우스가 죽었을 때, 스키피오는 "그와 같은 일을 도모하는 자는 그렇게 망하리라."는 고인드립성 독백을 남겼다고 한다. 당연히 민중들에게 욕을 엄청 먹었고 전쟁 영웅으로서의 인기를 거의 다 까먹었다.- ↑ "언젠가는 트로이도, 프리아모스 왕과 그를 따르는 모든 전사들과 함께 멸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