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르미움 전투

Battle of Sirmium(Battle of Sirmion)
헝가리어:Battle of Zemun(zimonyi csata)

시르미움 전투
날짜
1167년 7월 8일
장소
현대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제먼(Земун, Zemun) 구 인근
이유
헝가리 왕국동로마 제국의 발칸 영유권 다툼, 헝가리 왕위 계승 문제
교전국동로마 제국
헝가리 왕국
지휘관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바치(Bacs)백작 데니스
결과
동로마 제국의 결정적인 승리
영향
발칸 서북부의 영유권을 동로마 측이 획득, 헝가리 왕국의 종속국화
병력15,000~20,00015,000?
피해규모알 수 없음포로 800여명, 수천여명 사상

1 배경

1163년, 왕위에서 한번 쫒겨났던 이스트반 3세는 자신을 쫓아냈던 라즐로 2세의 동생 이스트반 4세를 쫓아내고 헝가리 왕국의 왕위를 되찾았다.쫓쫓쫓 그러나 주변의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이스트반 4세는 후원자인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해 보호령인 시르미움으로 가있었고 자신의 동생 벨라 3세는 달마티아 지방과 시르미움 지역의 영유권을 가진채로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서 마누일 1세의 장녀 마리아 콤니니와 결혼했으며 친왕(Despotes)으로 선포되어 후계자로서 교육받기 시작했다. 당장의 왕위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자국령에 동로마 측이 간섭할 가능성이 있었으며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 두명이 모두 동로마 측에 신병이 넘어가 있었고, 동로마 황가의 여인들과 결혼한 상황이었다.

동로마 측이 이전부터 헝가리령 발칸 서북부 영토를 탐냈던 것을 돌이켜보면 이미 영유권 침식이 시작 되었다고 볼 수 있었고, 왕위 계승권자들이 외교적인 카드로 이용될 가능성이 농후했으며 장래 헝가리 왕가 측에 동로마의 입김이 강해지거나 최악의 경우 - 이스트반 3세가 죽고 벨라 3세가 왕위와 제위 모두를 계승할 경우 - 동군연합이 성립하거나 아예 헝가리가 동로마 측에 통합 될 가능성도 있었다. 결국 1164년, 여러 갈등이 쌓인 끝에 이스트반 3세는 헝가리 영토이자 동로마의 보호령인 시르미움 지역을 향해 군대를 일으켰다.

2 준비

1164년의 시르미움 지역에 대한 헝가리의 공세는 마누일 1세의 친정으로 좌절되는 듯 했다. 동로마 측은 마찬가지로 보호령인 달마티아 지역 또한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수도로 귀환하자 헝가리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다시 시르미움에 나타난 헝가리군은 이스트반 4세가 머물던 셈린을 포위하였고 곧 이스트반 4세를 독살시켜버렸다. 구심점이 사라진 셈린은 함락되었고 시르미움 지역은 헝가리 측으로 넘어갔다.

1165년 황제는 다시 친정을 감행했다. 이번에는 헝가리의 동맹인 갈리치아 공국을 이탈시키고[1] 최근 복속시킨 룸 술탄국세르비아의 군대까지 소집하는 등 상당히 공을 들인 원정이었다. 결국 헝가리군이 물러나고 시르미움 지역이 수복되었으나, 헝가리 인들은 항복하지도, 평화조약을 제안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1166년이 되자 재차 반격하여 동로마 측이 점령한 달마티아와 시르미움을 모조리 뱉어내게 하였다. 제국측도 슬슬 지쳐갔고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3 진행

결국 상당수의 중앙군이 소집되어 이를 중심으로 하는 야전군이 조직되었고 헝가리의 남, 동, 동북 방면을 향한 3로 공격이 가해졌다.[2] 1167년에는 황제가 신임하던 제국 해군 총제독(Megas Doux)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Andronikos Kontostephanos)[3]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중앙군 1만 이상에 용병과 봉신군을 붙여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그 즈음 바치(Bacs)백작 데니스(Denes - 동로마 측 기록에서는 디오니시오스Dionysios)가 이끄는, 독일계 군대가 포함된 15,000여의 헝가리군이 시르미움 재점령을 위해 남하하자, 제국군은 요격을 위해 재빨리 북상했다. 베오그라드에 이른 제국군은 사바강을 도하하여 멀리 헝가리군이 보이는, 도나우 강을 오른편에 둔 곳에서 진영을 갖추기 시작했다.

4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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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세가 비슷한 양군은 전투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근래의 승전으로 사기가 올라있던 헝가리군은 기사-중기병의 충격력을 믿고 이를 중심으로 삼아 보병과 뒤섞은 진형을 갖췄고, 제국군은 예비대인 중군과 기병비율이 높은 좌우 1진, 보병이 주력인 좌우 2진으로 진형을 짰다. 정찰을 통해 상대를 가늠한 쌍방은 헝가리군이 전진하고 동로마 측의 좌,우 1진이 기세를 꺾기 위해 사격을 가하면서 전투를 개시했다.

그러나 헝가리 기사대의 돌격은 멈추지 않았고 곧 제국군의 장창진에 부딫혔다. 이는 쌍방에 큰 타격을 주었고 특히 충격을 받는 입장인 제국군이 흔들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끝내 전열은 붕괴되지 않았고 작전이 꼬여 이탈했던 1진이 복귀하여 헝가리측의 진격이 크게 둔화되었다. 헝가리 측 사령관인 데니스는 동로마 측의 반격이 개시되자 적의 예비대인 중군을 타격하여 전황을 타개하려 하였으나 이는 좌절되었고 안드로니코스 장군이 바랑기안 가드를 중심으로 하는 예비대를 투입하자 헝가리군의 패색이 짙어졌다.

12시간에 달하는 전투 끝에 - 병장기들이 못 쓰게되어 부무장인 메이스(mace)따위의 둔기를 꺼낼 지경이었다. - 헝가리군은 붕괴되었고 수천여가 죽거나 다쳤고 나머지는 패주했다. 도나우 강 방면으로 도망치던 헝가리군은 이미 강을 거슬러와있던 동로마 해군에게 공격당해 800여명의 포로와 5명의 지휘관을 생포당했다. 당일 전장에서 한번, 다음날 텅 빈 헝가리군의 진영을 두번째로 약탈한 제국군은 수도로 승첩장계를 올렸고 얼마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금문(Golden Gate)으로 개선하였다.

5 영향

발칸 서북부에 대한 영유권 다툼은 더 이상 논쟁거리가 되지 않았다. 본래 영유권을 주장하던 달마티아와 시르미움이 할양되었음은 물론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지역까지 여기에 더해졌다. 이스트반 3세는 크게 입지가 약해졌고 그를 배후에서 지원하던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은 축소 되었다. 헝가리는 동로마에 종속되었고 마누일 1세는 헝가리의 왕위 계승과 대주교좌도 통제하에 두었다. 1169년 알렉시오스 2세가 태어나 장녀 마리아와 벨라 3세의 결혼이 취소되었음에도 새로이 획득한 영토는 여전히 동로마의 것이었으며 1172년 이스트반 3세가 죽자 벨라 3세는 자연스럽게 헝가리의 왕위에 올랐다. 이후 헝가리는 공물을 바치고 황제의 원정에 군대를 보내는 등 종속국 노릇을 하다 마누일이 죽는 1180년 이후에야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된다.
  1. 망명 중인 안드로니코스 1세를 이때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2. 각각 달마티아, 시르미움, 트란실바니아 지역에 대한 공세로 보인다.
  3. 마누일의 누이 안나 콤니니와 결혼한 슈테판 콘토스테파노스의 아들 - 즉, 마누일의 조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