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랑기아 친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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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황제에 대해 충성을 바쳤고 황제를 가족처럼 보호했으며 신성한 믿음은 대를 거듭하여 전해져 내렸다. 이 충성스러운 자들은 순수함을 유지했으며 배신의 사소한 징후마저도 그대로 넘기지 않을 것이다.

- 안나 콤네누스

Varangian_Guard.jpg
1066년 바랑기아 친위대를 복원한 그림.출처
동로마의 자랑, 충성심의 대명사
바랑기아 친위대(영어명: Varangian Guards)는 동로마 제국의 근위대를 이르는 명칭이다.

1 바랑기안이 무슨 뜻인가?

이름에 들어가는 "바랑기안"은 스칸디나비아계의 민족을 뜻하는 말로, 9~10세기에 남하해서 남우크라이나 지방에 정착한 바이킹의 일파이다. 그 이름의 어원은 스웨덴어로 맹세를 뜻하는 단어라고 한다. 이들은 주로 장사, 노략질 등 그들의 본가와 거의 비슷한 생업을 가졌는데, 그들 중 일부는 북유럽식 전투 방식을 살려 인접국인 동로마 제국용병으로 건너갔다.

2 역사

사실 바랑기아인들 전에도 본가인 바이킹들이 건너가서 용병 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988년 노브고로드 공국블라디미르 대공[1]이 6000명의 군대를 원조했고,외화벌이꾼? 이들을 굴려본 바실리우스 2세는 이들이 그리스인들보다 훨씬 충성스럽다는 것을 깨달아 본격 북유럽인 모집공고를 하면서, 본격적인 용병 활동이 개시된다.

이들은 높은 충성심으로 명성이 높았다. 혼란한 시기였고 반란이 매우 많았던 동로마 제국에서 그만큼 강하고 크며 결속력이 높은 집단이 대규모 반란을 한 번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고, 황제들의 마음을 동하게 만들었다[2]. 그들은 주로 도끼와 방패로 무장했는데, 안나 콤네누스에 따르면 이들은 쇠사슬로 된 체인메일을 이용해서 중갑을 착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프셀리우스에 따르면 이들은 도끼뿐만 아니라 롱소드와 롬파이아[3]로도 무장했다고 한다.

2.1 주요 활약

사실 이들이 이름을 날린 '전투'는 얼마 없다. 하지만 참전한 전투마다 상당히 강한 인상을 주었는데, 먼저 바실리우스 2세는 바랑인 용병들을 중심으로 내전을 제압하는데 성공했고, 칸나이 전투[4]에서도 바실리우스 보이오안니스와 바랑인 친위대를 파견하여 노르만 기사들을 격파했다. 이들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목숨 걸고 싸워서 투르크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으며 4차 십자군 때도 용맹하게 저항했다고 한다.물론 이 때 몸값을 높게 부른건 안자랑

그러나 이들이 치룬 전투 중 가장 유명한 전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랑기안 때문에 패배한 디라키움 전투다. 이 전투에 투입된 바랑기안 친위대는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 쫓겨난 앵글로-색슨족들로 구성되었다고 전한다. 잉글랜드에서 그리스 끝자락이라니, 대체 어디까지 쫓겨난 거야(...) 바랑기안 친위대는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끌던 노르만 기사들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격퇴했지만 복수심에 불탄 나머지 전열을 무너트리고 달아나는 노르만 기사들을 추격했다. 그러나 너무 깊숙히 추격한 나머지 노르만인들의 반격을 받아 밀리게 되었고 결국 바랑기안들은 근처 교회로 들어가 저항한다. 그러자 로베르 기스카르는 교회에 불을 질러 바랑기안들을 태워죽였다. 정예 전력에 큰 피해를 입은 알렉시우스 1세는 로베르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패퇴하고 만다.[5]

2.1.1 여담

바랑기아 친위대 중에서 하랄 하르드라다라는 자는 황제의 사무실에서 직접 봉급을 받고, 공주를 유괴했다고한다. 이 미친놈사람은 나중에 노르웨이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어디선가 들어봤다 싶은 역덕이라면, 헤이스팅스 전투 직전 스탬포드 다리 전투에서 해럴드 2세에게 패사한 그 사람 맞다. 다만 이 일화는 바이킹의 기록이며, 동시기 동로마의 사서들과 교차검증되지 않는다. 사실 동로마 사서들도, 하랄 하르드라다가 쫓겨났다는 것만 일치할 뿐,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일치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뻥카일 가능성이 꽤 높다.
  1. 그도 바랑기안 출신이었다.
  2. 이 부분은 당시 동로마 제국 내에서 외국인인 바랑인 친위대가 가졌던 입지에서 이해해야 한다. 당대 기준으로 고도화된 정치 시스템을 갖추었던 동로마 제국에서는 그만큼 내부의 정치적 알력도 강할 수 밖에 없었고, 내국인이라면 각자의 연고에 따라 이런 정치적 파벌들과 다양한 관계를 가지기 쉬울 수 밖에 없었던 것. 그에 비해, 멀리서 온 외국인인 바랑기안 친위대는 고용주인 황제 이외의 다른 인물과는 별다른 연고가 없기에 정치적 갈등에 끼어들 여지도 그만큼 적었던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동로마 제국의 숙적인 이슬람 제국들이 노예병(길람이나 맘루크)에게 군사력의 중추를 맞겼다는 점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난다.
  3. 트라키아 지방에 전해지는 낫 형태의 검인 펄스(Falx)를 개량한 무기.
  4. 당연하게도 한니발로마군을 발라버린 전투와는 다르다.
  5.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오랜 기간동안 알렉시우스 1세는 정예 군대의 부재로 크게 고생했다. 동로마 제국이 다시 종전의 전력을 회복하려면 레부니움 전투 이후 한숨 돌릴 때까지 20년 이상이 소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