슘슈 섬 전투

(시무슈 섬 전투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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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 占守島の戦い(しゅむしゅとうのたたかい)
러시아어 : Взятие Шумшу, Взятие острова Шумшу, Десант на остров Шумшу

1 개요

1945년 8월 18일 ~ 20일에 소련일본 제국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최후반기를 장식한 전투 중 하나. 무려 히로히토의 항복 선언이 있은지 3일 후에 일어난 대규모 전투였다. 다만 이것이 소련과 일본 사이의 마지막 전투는 아니며, 그 이후에도 쿠릴 열도사할린 등지에서 일본군과 소련군의 산발적인 교전이 더 이어졌지만 이만큼 뻑적지근하게 벌어진 대규모 전투라고 부를 만한 규모의 사건은 이게 마지막이다. 다만 만주지역의 요새에 고립된 일본군을 소탕하는 작전은 예외다.

2 전략적인 배경

제2차 세계대전의 끝 무렵 소련은 일본과의 불가침협정을 파기하고 극동쪽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당시 일본 제국의 영토였던 만주를 포함한 태평양의 최북단, 쿠릴 열도까지 공략하려 하였다. 이는 과거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빼앗긴 영토들을 되찾는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상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연합국과의 종전 회담에서 소련으로 하여금 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주장하려는 기반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3 지리적 배경

일본 북부의 쿠릴 열도(Kuril Islands), 일본어로는 치시마 열도(千島 列島)의 섬들과 사할린 섬은 본래는 아이누와 같은 여러 원주민들이 나름대로의 삶을 영위하던 곳이지만, 18세기 이후 러시아가 진출하면서 러시아와 일본 간에 영토권을 놓고 분쟁이 시작되었다. 당연하겠지만 양측은 서로 "이 섬도 내 것, 저 섬도 내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일본은 이때까지 홋카이도도 아직 제대로 영토로 확보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여기는 일본의 영토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후 두 나라간의 교섭이 19세기 내내 계속된 끝에 1875년의 가라후토·지시마 교환조약(또는 화태천도교환조약樺太千島交煥條約)이 조인되면서 쿠릴 열도는 전체가 일본령이 되고, 사할린은 러시아령이 되었다. 하지만 1904년에 벌어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전쟁배상금 대신 사할린 섬의 남쪽 절반을 할양해야 했고 이 모든 땅은 1945년까지 일본 영토가 되는데, 이는 마치 지금 일본이 "북방 4도"를 대하듯이 러시아로서는 억울하게 빼앗긴 땅이 되어 되찾을 대상이 된 것이었다.

쿠릴 열도의 자연적 배경에 대하여 간단히 배경 설명을 깔고 가자면, 이곳에는 대소 30여 개의 섬이 전장 1,200km에 걸쳐서 늘어서 있으며 각각의 섬은 모두 화산섬으로 비교적 험준한 지형이나 최북단에 있는 시무슈 섬(점수도, 占守島)만은 해안선이 대부분 단애로 이루어져 있기는 해도 대체로 평탄한 편이었으므로 일본군은 이를 이용해서 이 섬에 항공기지를 만들어두고 있었다.

시무슈에서 가장 가까운 소련 영토인 캄차카 반도의 로파트카 곶까지는 15km에 불과하고, 맑은 날이면 반대편 해안의 소련군 초병이 하품하는 모습까지 쌍안경으로 관측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캄차카와 시무슈 사이에 있는 시무슈 해협은 암초가 많아 안전항해를 할 수 있는 통로의 폭이 3km에 불과해서 해난사고가 잦은 곳이기도 했다.

점수도의 전체 면적은 385㎢, 토질은 지표면에서 2m 깊이까지는 화산암이 풍화한 적토로 이루어져 있고 그 밑은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밑에는 암반이 있는데, 일부 산악지역이나 해안 단애에서는 이 기반암층이 노출되어 있었다.
북쪽에 위치한 이곳에서는 날씨도 좋지 않아 5~6월이 되어야 봄이 오는데, 70여종의 고산식물이 꽃을 피우는 이 봄이라는 계절에도 바닷가에는 여전히 유빙이 떠다니고 시계가 5~6m밖에 되지 않을 만큼 진한 안개가 끼곤 했다. 안개가 끼는 계절이 지나고 8월이 되어 여름이 오면, 차가운 바다안개가 가끔 끼는 정도로 안개는 약해졌지만 기온은 여전히 낮았기 때문에 하복이 필요하지 않아서 이곳의 일본군 수비대 병사들은 옷을 바꿔입을 필요 없이 1년 내내 동복만 입고 지냈다고 한다.

날씨가 쾌청한 8~9월을 보내고 나면 점수도의 날씨는 가을 따위 없이 곧바로 겨울로 바뀌었다. 10월 하순에서 5월 상순까지 반년 동안 내내 겨울이고, 11월부터는 지독한 강풍과 눈보라가 몰아치는데[1], 지금 당장은 맑더라도 30분 안에 일기가 확 뒤집히면서 풍속 30~40m짜리 폭풍이 몰아치는 일이 예사였고, 이런 날은 시계가 거의 제로가 되곤 했으며 이런 날에 사병들이 막사 밖에 소변 보러 나갔다가 길을 잃어 실종되는 일도 한해에 한두 번은 꼬박꼬박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해륙 양면에서 사고가 많은 섬이었는데, 특히 12월~2월 사이의 기간에는 해상에 삼각파도가 발생하여 해상교통이 아예 두절되는 일도 잦았다. 이는 주둔군에 대한 각종 지원 및 식량공급에 심각한 장애가 되는 문제기도 했으며, 때문에 이 섬에서 전투에 적합한 계절은 8~9월을 중심으로 두세달 정도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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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북쪽의 171 고지. 소련군의 상륙거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이 작은 고지는 소련군이 극복해야할 첫 목표였다.

이런 자연조건 때문에 나무도 별로 크게 자라지 못했다. 강한 바람 때문에 나무가 위로 자라지 못하고 땅으로 기게 되는데, 10m가 넘는 소나무가 뱀처럼 구불구불한 모습으로 땅바닥에 붙어 있는 이런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으니, 도로가 아니면 인마와 차량의 통행은 불가능했다. 단독으로 움직이는 사람도 길 밖으로 벗어나지 못할 지경이니, 통행의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만 이런 특징은 방어군에게 유리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지독한 자연환경에도 불구하고 이 섬의 전략적 가치는 꽤 큰 것이었다. 단지 소련과의 국경을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치시마 열도 자체가 오호츠크해 입구를 통제할 수 있는 요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과 소련의 연락 루트도 이 시무슈 해협을 지났으므로 시무슈에서는 이를 확실히 제압할 수 있었다(하지는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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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남쪽. 남쪽에는 작은 선착장과 항공기용 활주로, 몇 안되는 건물 등이 몰려있었다. 섬 전체에 참호선과 토치카들이 있었으며 포진지도 다수 존재하였다. 소련군은 섬의 북쪽에 상륙하였다. 섬 둘레를 보면 알겠지만 상륙이 불가능한 지형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치시마 열도는 미국 영토인 북방의 알류샨으로부터 일본 본토로 가는 중계기지였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시무슈는 서부에 자리잡은 해군의 카타오카 항공대 기지를 제외하고도 2곳에 비행장 건설에 적합한 부지가 있었다. 또한 폭이 2~3km정도 되는 시무슈와 이웃한 파라무시르 섬(황연도) 사이의 파라무시르 해협(황연해협)은 기항지/정박지로 아주 좋았기 때문에 중부-북부 치시마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해공군 기지가 점수도에 자리잡고 있었다. 점수도 이남에서 해공군 기지를 모두 가진 섬은 거의 치시마 남쪽 끝에 있는 에토로후 섬밖에 없었다. 즉 여기가 뚫리면 바로 전선이 쿠릴 열도 남쪽 끝까지 밀리게 되는 것이고, 쿠릴에서 시무슈 이후 별다른 대규모 전투가 없었던 것도 여기에 기인하고 있었다.

시무슈는 이렇게 중요한 가치를 가진 섬이지만 공격은 좀 까다로웠는데, 섬 주위를 빙 두른 해안단애 때문에 병력을 상륙시킬 곳이 별로 없었다. 소련측 해안과 가장 가까운 동북부의 다케다하마(竹田浜), 서북부의 벳토부누마(別飛沼) 정면 및 남쪽의 가게마(蔭澗) 정면만이 공격 가능한 포인트였다.

4 양측 전력

4.1 일본 제국

당시 섬에 주둔한 일본군은 육군 제91사단이었으며 아래와 같은 예하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보병 대대는 총 6개 대대 규모였다.

제73 보병여단 (지휘관 : 이와오 스기노 중장)
제74 보병여단 (지휘관 : 사토 준장)
제11 전차여단 (지휘관 : 이케다 대좌)
제2 독립 전차부대 (제11 전차 여단과 혼합 편제됨)
제91사단 제1 포병부대
제91사단 제2 포병부대
제91사단 정비부대
제54 항공연대

총병력 2만 3천 명에 64량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선박은 없지만 1500명의 해군과 7대의 전투기, 폭격기들이 남아 있었다. 당시 이곳에 주둔중인 제11전차연대는 19량의 97식 전차 을형과 20량의 97식 전차, 25량의 95식 경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시무슈 섬의 일본군은 대전말기에 급히 징집된 병사들이 아니라 대전 기간 동안 중국, 태평양 전선에서 전쟁 경험을 쌓은 베테랑 병사들을 배치하였다.[2] 초기에 8만여명에 달했던 일본군의 전력은 다른 곳으로 차출되어 2만여 명만이 남게 되었다.

4.2 소련

소련군은 7개 보병대대를 가지고 상륙하였다. 적정평가의 실수로 일본군이 더 적은 병력과 옅은 방어선을 가지고 있다고 오판하였으며, 전차 등은 상륙의 어려움으로 끌고 오지 못하였다. 포병대가 같이 상륙하였으며 캄챠카에서 40여대의 항공기가 지원하였다. 호위함급 이하의 전투함정들과 다수의 수송선이 참가하였다.

5 전투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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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17일 이전

지휘관인 쓰쓰미 소장은 1944년 말의 소련이 일본을 맹비난한 일과 불가침조약 연장 거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곳의 일본군은 방치되었고 고립에 가까운 상태였다. 15일 항복선언 방송을 들은 쓰쓰미 소장은 미군이 이곳에 상륙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15일 오후부터 소련군은 집결지로 해양수송을 시작하였다. 소련군은 17일 23시부터 상륙전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5.2 18일

소련군의 상륙은 안개와 암초 때문에 지연되고 있었다. 상륙시간은 지연되어 18일 새벽 4시에 소련군의 상륙부대가 섬에 상륙함을 기점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캄챠카 반도의 소련 해안포들이 사격을 시작하였으며 상륙정들이 안개 속에서 조용히 이동하였다. 소련 해군 함정에서 발포된 포탄이 작렬하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공군의 폭격이 가세하였고 상륙 주정을 통해 보병이 상륙하기 시작했다. 새벽 5~6시에 소련군 상륙주정들이 발각되어 해안포 사격에 피해를 입었다. 앞서 상륙한 선견대들은 내륙으로 진출하는데 급급하여 해안진지들을 방치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일부 선견대는 부족한 병력으로 방어전을 치루어야만 하였다.

시무슈 섬은 전쟁 내내 전투가 벌어진 적이 없던터라, 탄약과 장비 모두 부족함없이 넉넉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18일 오후에 171고지(170고지와 동일)로 진출하던 소련군 선봉대를 16시, 70여문의 야포 지원을 받는 제11연대 전차 40여기가 덮쳤으며 소련군은 백여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최초 상륙지로 후퇴하였다. 이에 소련군은 상륙이 지연되어 몇기 없던 45mm 대전차포와 100여정의 대전차총으로 일본군 전차들을 격파한다. 일본군은 2시간 가량 이어진 전투에서 투입한 40량의 전차중 30여기를 상실하였고 연대장까지 전사한다.

살아남은 전차들도 계속되는 소련군 증원병력을 막기위해 투입되었으며 결국 18일 하루만에 모든 전차를 상실하고 부대는 전멸했다.

5.3 19일

19일 오전에 일본군은 항복교섭을 위한 대표단을 소련군 진지로 보냈고, 오후에 항복 타협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교섭상태는 모호하게 유지되었고, 산발적인 교전이 지속되었다.
전차부대를 상실하고 항공기를 띄울 수 없게된 일본군은 고지와 언덕을 기점으로 방어전을 지속했다.

5.4 20일

소련군의 항공지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일본군은 고지를 중심으로 방어전을 펼치려 하였다.

5.5 21일

삿포로의 일본군 사령부에서 항복 지시를 내린다. 22일부터 일본군은 포로가 되었고 시무슈 섬 외의 다른 쿠릴열도 섬들도 항복한다. 소련군은 다른 섬들을 접수하기 시작한다.

6 결과

소련 - 1567명 사상(516명 전사,1051명 부상및 실종)
일본 - 1018명 사상(256명 전사, 762명 부상)

3일간 이어진 전투에서 소련군은 섬을 점령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였다. 일본군 사상자에 비해 소련군의 사상자가 의외로 많은데 이는 상륙한 소련군은 전차도 제대로 증원 안 된 채로 알보병으로 이루어진 데 반해 일본군은 비록 쓰레기지만 전차부대로 소련군을 압박하는게 가능했고 정예병들이었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건 스탈린이 어느 정도 의도 했던 것으로 일본군과의 전투로 소련군이 다수의 사상자를 내어 쿠릴 열도 영유권에 대해 자신들이 흘린 피의 정당한 대가를 요구 하려는 노림수가 들어가 있었다. 즉 저렇게 허술하게 공격을 시작한 것도 소련군 병사들의 목숨을 제물로 던져 소련의 주장을 뒷받침하려는 계략이란 것

다만 데이비드 M 글랜츠의 저서에서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상륙전이 이루어진 이유는 소련군이 이곳의 전투력 파악을 소흘하게 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또한 상륙 당일의 짙은 안개는 소련군의 상륙 시도를 가려주었지만, 역으로 항공지원과 포병지원을 어렵게 만들었다. 거기에다 소련군의 최초 상륙부대들은 가지고 내린 무전기는 고장나고 예비 무전기들은 배에 실은 상태였기 때문에 정확한 상황 보고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소련군의 피해는 상륙 첫날에 집중되었는데, 일본군은 잘 위장된 해안포와 진지에서 상륙주정과 호위함에 피해를 많이 입혔고, 여기에 먼저 상륙한 소련군 선견대는 무리하게 교두보를 확장하려다가 박격포를 동반한 일본군 예비대의 재빠른 전개에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또한 소련군의 포병대는 다음날인 19일 오후 늦게서야 상륙을 시작할 수 있었다. 결국 소련군의 상륙 첫날은 무전기의 부족으로 인한 화력지원의 부족으로 열세에 처한 상태였다. 다만 상륙 초기의 혼란이 진정된 18일 밤 이후 소련군의 전투력이 집중되어 다음날부터는 일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7 그 이후

일본 제국 제11전차연대가 참전했던 곳으로써 그 당시 격파된 일본 전차들의 잔해가 아직도 남아있다. 이들은 반약한 전력으로 그나마 전과다운 전과를 보여준 정말 몇 안되는 일본군 전차부대였기 때문에 이들의 이름을 딴 육상자위대 전차대대가 홋카이도 인근에 주둔하고 있다. 시무슈 섬은 현재 러시아령이며 출입이 제한되어있다.

수비대였던 91사단 소속 장교 한 사람이 후에 남긴 증언을 보면 바로 항복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섬에 있는 1,200여명의 여성 비전투원(학도동원된 여고생 정신대원도 있음)들이 소련군에게 강간당할 것을 걱정해서라고 한다. 수비대는 시무슈에 있는 배란 배는 모두 긁어모아 어선을 개조한 구잠정 2척과 100톤 미만의 소형 범선 9척으로 선단을 편성하고 18일 밤에 이 비전투원들을 여기 태워서 홋카이도로 탈출시켰고, 정비병과 사병들도 가능한 배편과 비행기를 이용해 내보냈다. 장교와 하사관들은 모두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로 갔다.

다만, 탈출시킨 것은 일본 본토 출신 장병들뿐이고 원주민 출신 병사들은 거의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8 기타

PKKA라는 이글루스, 기갑갤러리 유저가 데이비드 글랜츠의 시무슈 섬 전투 내용을 정리한 글이 있다.

소련군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는 극동지역 최대 피해지로 기록되어있다고 한다.

일본의 만화가 세이호 타키자와의 작품 환영의 표범 제2장 우크라이나 혼성 여단의 첫 전투씬이 바로 이 전투이다. 주인공 가와세 전차장의 97식 전차가 나름 활약하지만 소련군의 대전차총 사격으로 개박살난다.
  1. 초록배매직스에서 나온 창공의 포효에 수록된 <빙설>이라는 에피소드를 보면 이곳의 이런 날씨가 잘 묘사된다.
  2. 확인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