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약

沈約
(441∼513)

남북조시대 역사가이자 문학가로 자는 휴문(休文)이다.

오흥군 무강현의 사람으로 강동세족의 하나인 오흥심씨(吳興沈氏)의 출신이다. (宋)ㆍ(齊)ㆍ (梁) 세 왕조에서 학문을 일으켜 당대 최고의 학술, 문화 권위자로 자리잡았다. 또한, 경릉왕 소자량의 ‘서저(西邸)’에서 남제 무제 시기의 최고 학자들과 두각을 나타내어 이른바 영명기(483~493)를 주도하였다. 이때 심약은 뒷날 양나라를 세운 무제 소연(蕭衍) 그리고 사조, 왕융(王融), 소침, 범운, 임방 등과 함께 당시 ‘팔우(八友)’라고 불릴 정도로 교분을 쌓았는데, 이런 까닭에 제ㆍ양 교체기에 많은 관여를 하게 되었다. 심약은 사서 편찬에도 많은 공을 세웠는데, 『진서(晉書)』 110권과 『송서』 100권, 『제기』 20권 그리고 『양무기』, 『신정관품』 등의 사서들과 『문장지(文章志)』와 자신의 문집 등을 저작으로 남겼다. 현재는 안타깝게도 『송서』와 그의 문집만 존재한다. 양나라 때 상서복야(尙書僕射)를 거쳐 (侯)로 봉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양무제와 의견이 맞지 않아 사이가 나빠졌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뒷날 ‘심은후(沈隱侯)’라고 칭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