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융

  •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를 찾아왔다면 왕륭 항목 참조.

王戎
(234 ~ 305)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와 서진의 인물로 자는 준충(濬沖). 양주자사를 맡은 왕혼의 아들이며, 아들로는 왕만, 왕흥, 왕수(王綏)[1], 딸로는 배위의 처가 된 인물이 있으며, 왕상과는 같은 일족으로 종형인 태위 왕연이 있다.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죽림칠현에서는 최연소이며,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나 조예, 완적 등에게도 인정받을 정도이면서 배해, 순우, 두묵과 함께 이름을 날려 총명함이 어른을 뺨칠 정도였다. 하지만 뒤에 나오지만, 인색하고, 오만하고, 높은 관직에서 무능한 면도 보였고, 욕심 많고, 관직에서 줄타기와 권력다툼도 하는 등 버라이어티하게 문제가 많아서, 후대로 갈 수록 왕융을 죽림칠현에서 빼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이 늘어난다.

2 생애

6, 7세 때 왕융이 선무장에 갔을 때 명제가 발톱 자른 호랑이를 가져다놓고 백성들이 와서 구경하자 호랑이가 우리 안에서 난간을 잡고 울부짖자 그 소리는 땅을 뒤흔들었다. 구경꾼은 놀라서 피하거나 넘어졌고 왕융은 태연히 움직이지 않고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조예는 왕융을 보고 큰 그릇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

동네의 아이들과 길가의 자두나무에 가지가 휘어지게 많은 자두가 달려있는 것을 보았는데, 여러 아이들은 자두를 따려고 나무로 갔지만 왕융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어떤 사람이 왜 따러가지 않냐고 묻자 나무가 길가에 있는데도 저렇게 많이 달려있는 것은 써서 먹지 못하는 자두일 것이라고 했으며, 아이들이 그 자두를 따서 맛을 보니 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

완적과 왕융의 아버지 왕혼은 친구였고 248년에 왕혼을 따라 완적이 있는 곳에 갔는데, 완적은 왕혼을 만나면 몇 마디만 나누었으나 왕융과는 긴 시간 동안 담론을 나누었다고 하며, 완적은 왕혼에게 그대와 이야기하는 것이 아융(왕융)과 이야기하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왕혼이 양주에서 죽자 왕혼의 관리들이 수백만을 보내자 왕융은 받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왕융의 이름은 드러나게 되었다.

종회가 배해와 함께 추천해 사마의를 섬겼고 상국연이 되었다가 이부랑의 자리가 비웠을 때 종회가 왕융은 대범하면서도 요령이 있다고 하면서 배해와 함께 추천하자 이부랑이 되었다. 이후에는 산기상시, 하동태수, 형주자사 등을 거쳐 출세했지만 형주자사 때 역인을 사적인 용건으로 사용해 면직되어 벌금을 물게 되었으며, 이후에는 예주자사로 옮겨졌다.

왕융이 완적의 집을 방문했다가 연주자사 유창이 왔는데, 완적이 좋은 술을 가지고 와서 왕융에게 둘만 마시자고 하며, 유창에게는 한 잔도 건네지 않았지만 세 사람은 친하게 농담을 주고받았다. 왕융이 완적 등과 함께 죽림에서 보내다가 왕융이 지각한 적이 있었는데, 완적은 속물이 늦게 와서 사람의 흥을 깬다고 하자 왕융은 웃으면서 선배님들의 흥이 어디 깨지기나 하냐고 말했다.

예주자사에 있을 때 모친상을 당했는데, 성품은 효성스러웠지만 예법에는 구애받지 않았아서 술 마시고 고기를 먹거나 장기나 바둑 두는 것을 구경했다. 하지만 용모는 초췌해 지팡이를 짚은 후에야 일어났다. 여남의 화교도 이름나서 친상을 지킬 때 죽을 예법에 따라 가려서 먹었지만 초췌함과 애통함은 왕융에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종회가 촉나라 정벌을 갈 때 왕융은 이별을 아쉬워했는데, 종회가 자신의 계획이 이루어질지 묻자 왕융은 공을 이루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공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고 했다. 종회가 패하자 사람들은 왕융이 말한 뜻을 알았다.

세설신어에도 예주자사일 때 어머니의 상에 대한 일화가 있다.

  • 어머니의 상에 대한 일화

왕융은 화교와 동시에 친상을 당했는데, 둘 다 효성으로 이름나 있었다. 왕융은 슬퍼서 뼈만 남은 채로 침상에 의지하고 화교는 곡읍하면서 예를 갖췄는데, 사마염이 유의에게 왕융과 화교를 자주 보았냐고 하면서 화교는 애통함이 지나쳐서 사람들을 걱정하게 한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유의가 화교는 예는 갖췄지만 정신과 기력은 손상되지 않고 왕융은 예를 갖추지 않았지만 애통함이 몸을 망쳐 뼈만 남았다면서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화교는 살아서 효도를 하고 왕융은 죽더라도 효도를 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화교를 걱정하기보다는 왕융을 걱정해야 한다고 했다.

272년에 양호를 따라 보천을 구하러 갈 때 양호가 군법을 들어 죽이려 했기에 왕융은 양호를 미워해 기회가 날 때마다 그를 깎아내리는 발언을 했다.

279년에 서진의 오 토벌전에 건위장군의 직책으로 종군해 무창으로 진군할 것을 명령받았으며, 오를 평정한 공으로 안풍현후에 봉해졌고 석위를 천거해 이 공으로 시중에 임명되었고 남군태수 유조가 뇌물을 바치자 사례교위가 탄핵했지만 왕융은 뇌물을 받지 않았기에 죄를 묻지 않게 되었다.

이후 광록훈, 이부상서를 지내다가 290년에 사마충이 즉위하고 가을 8월 26일에 태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배해, 화교와 더불어 덕망을 갖춰 양준이 이를 꺼린 바가 있었기 때문에 모두 조정에 함께 있지 못했다고 하며, 282년에는 시중을 지내다가 291년에 양준을 주살할 때 이 일이 끝나면 사마요에게 권세로부터 멀리 떠나라고 충고했지만 듣지 않았으며, 중서령, 광록대부, 상서우복야 등을 지내고 가남풍이 정권을 잡자 배해와 함께 주요 기밀 사항을 관장하게 되었다.

297년에 9월 사도로 임명되지만 정무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이익에만 집착했다고 하며, 각지에 장원이 있고 제분소까지 대거 가지고 있어서 매우 재산이 많은 자산가였지만 아주 인색한 인물이었다. 조카 결혼식 때 홀옷 한 벌을 선물로 줬다가 나중에 다시 달라고 했으며 자두를 팔 때 씨앗에 구멍을 뚫고 팔았는데, 혹여나 자두 씨앗을 종자로 쓸 것이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완함의 아들인 완첨과 대화를 나누다가 그에게 감탄해 완첨을 추천한 적도 있으며, 300년에 팔왕의 난으로 사마륜가남풍을 몰아내자 여름 4월 4일에 장화, 배외 등과 친한 무리라는 죄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301년에 제왕 사마경, 장사왕 사마예(사마애),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 등이 사마륜을 몰아내자 3월 21일에 상서령이 되었으며, 302년에 사마경이 권력을 잡다가 사마영, 사마옹 등이 연합해서 공격해서 사마경이 어떻게 해야 할 지 묻자 권력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높여 양보해야 한다고 했지만 종사중랑 갈여가 이러한 논의를 한 자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하자 거짓으로 약 먹은 것이 탈이 난 것으로 하고 변소에 빠졌다가 살아남았다.

304년에는 사도를 지내다가 장방이 황제(사마충), 태제 사마영, 예장왕 사마치를 끼고 장안으로 달려가자 겹으로 달아났으며, 예장왕 사마치가 황태제가 되어 사마영이 사저에 돌아가게 되자 조정의 정사에 참여했다. 305년에 겹에서 죽었고 시호는 원후(元候).

3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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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1
삼국지 13

삼국지 시리즈에서의 능력치는 평범한 편. 후기 인물이라 안짤리면 다행이다. 305년에 죽기 때문에 등장인물 중 가장 늦게까지 살아있는 경우가 좀 된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60/36/72/56/48로 평범하지만 전 등장인물 중 사망년이 305년으로 가장 늦다. 그 다음은 302년에 죽는 조환. 물론 그 연도에 딱딱 죽는건 아니라 조환이 더 오래살때도 있다. 특기는 죽림칠현답게 명사 특기가 있지만 나머지 특기가 없다.

삼국지 11에도 등장해 지력이 72로 70대를 돌파했다. 게다가 삼국지 11에서 가장 늦게 죽는다.(자연사일 시)

크라운산도로 패러디 되었던 산도와 마찬가지로 같은 죽림칠현이라 그런지 삼국전투기에는 오징어땅콩으로 등장한다. 산도와 달리 "나는 양호보다 뛰어나다"고 말하며 그가 오만방자한 인물이라고 알려주는 대사이다.
  1. 자는 만자(萬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