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량의 역대 황제 | |||||
남제 7대 화황제 소보융 | ← | 초대 고조 무황제 소연 | → | 2대 태종 간문황제 소강 | |
비정통 임하왕 소정덕 |
묘호 | 고조(高祖) | |
시호 | 무황제(武皇帝) | |
연호 | 천감(天監, 502년 4월 ~ 519년) 보통(普通, 520년 ~ 527년 3월) 대통(大通, 527년 3월 ~ 529년 9월) 중대통(中大通, 529년 10월 ~ 534년) 대동(大同, 535년 ~ 546년 4월) 중대동(中大同, 546년 4월~ 547년 4월) 태청(太淸, 547년 4월 ~ 549년) | |
성 | 소(蕭) | |
휘 | 연(衍) | |
자 | 숙달(叔達) | |
생몰기간 | 464년 ~ 549년 | |
재위기간 | 502년 ~ 549년 |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초대 황제(재위 502∼549). 무제는 시호이며 묘호는 고조(高祖). 본명은 소연(蕭衍).
막장 황제들의 릴레이였던 남조의 몇 안 되는 명군. 하지만 그 역시도 말년의 암군 행각을 피할 수 없었다. 역시 남조답다! 이게 다 손권 때문이다.
긴 치세 동안 천감(天監), 보통(普通), 대통(大通), 중대통(中大通), 대동(大同), 중대동(中大同), 태청(太淸)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1 즉위 과정
송나라 대명 8년(464년), 말릉 동하리에서 출생했으며 자는 숙달(叔達)이고 아명은 연아(練兒)이다. 소순지(蕭順之)와 장씨[1]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한나라 상국 소하의 25대손라고 일컬었다지만 실제로 다른 겨레로 여겨진다. 남란릉(南蘭陵) 중도리[2] 사람으로 남제의 종친이다. 뒤에 태조(太祖) 문황제(文皇帝)로 추존된 아버지인 소순지는 송나라 때 단양윤을 지냈다. 소순지는 제나라의 고제 소도성의 삼종제(三從弟)이기에 소연은 소도성의 삼종질(三從姪)이다.
소연은 효성이 지극하여 6살에 모친을 여의자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슬피 울었다. 또 형주에 있을 때 부친마저 세상을 등지자 아무것도 안 먹고 비바람이 불어도 밤낮을 걸어 수도 건강으로 돌아왔는데 너무 수척해서 친구들도 알아보지 못했다. 아버지 영전에서는 곡을 격렬하게 해서 피를 토하고 여러 번 기절하기도 했다. 소연은 원래 공부를 좋아해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 박식하고 재능있는 학자가 되었다. 특히 음률과 서예, 문학에 뛰어나 <통사> 6백권 외에 개인 저작 2백여권도 썼다. 그는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해서 붓을 들면 문장이 되었고 황제가 된 후에도 신하들이 모르는 점이 있으면 하나하나 해석해 주었다. 제나라 융창 원년(494년), 중서시랑에 있던 소연은 당시 황제였던 명제 소란에 의해 다음해 황문시랑에 되었다. 또 다음해 북위군이 의양을 공격해오자 선봉을 자청하여 격파하고 사주별가에 임명되었다. 또 영태 원년(498년) 3월, 북위군이 이번에느 수만 기를 이끌고 등성을 공격해오자 통수 최혜경은 대경실색하여 도주하고 그의 군대도 전멸했다. 하지만 소연은 완강하게 싸우고 돌아왔으머 옹주자사, 보국장군이 되었다. 하지만 소란이 죽고 그의 아들 동혼후 소보권이 즉위하자 양주자사, 시안왕 소요광 등 여섯 사람이 보좌했는데 이들을 여섯 귀인(육귀)이라고 불렀다. 소연은 권력이 여러 사람에게 분산됐으니 반드시 변란이 생길 거라고 예상하고 은밀히 병기를 만들고 참대나무와 참나무를 베어 강밑에 가라앉힌다음 배를 건조할 목재로 삼아 전쟁에 대비했다.
영원 2년(500년) 겨울, 소보권이 소연의 큰 형이었던 상서령 소의(蕭懿)[3]를 살해하자 소연은 형을 무고하게 죽인 일로 소보권에게 불만이 생겼다. 거기에 소보권은 군대를 보내 소연도 죽이게 했는데 소연은 이해득실을 따져 토벌군을 막아내고 이듬해 3월, 강릉에서 남강왕 소보융을 황제에 즉위시키고 10월에 건강을 포위했다. 12월, 건강을 수비하던 장직과 왕진국이 소보권을 죽이고 그의 머리를 기름칠한 누런 명주에 싸서 바쳤다. 소연은 군사들에게 국고를 봉하고 궁녀 2천 명을 풀어 장병들에게 시집보냈으며 스스로 중서감, 대사마, 녹상서사, 표기대장군, 양주자사, 건안공이 되어 조정의 대권을 장악했다. 중흥 2년(502년) 정월, 상국과 양공에 책봉되고 2월에는 양왕으로 책봉되었으며 마침내 3월에는 화제 소보융이 강압에 의해 제위를 양위했다. 결국 4월, 건강 남교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선양이란 이름으로 소보융을 폐하고 제를 멸망시켰다.
소연은 국호를 양(梁)이라 불렀고 결국 소보융을 비롯한 제나라 황족을 남조의 전통적인 풍습에 따라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모두 죽였다. 제나라 황족은 서로 죽이고 죽고를 반복했고 소연이 나머지 황족도 몰살하는 바람에 소란의 장남 사술공 소보의와 소란의 6남 파양왕 소보인을 제외하고 모두 죽었다. 소보의는 폐질때문에 말을 못하는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화를 면햇지만 천감 8년(509년)에 죽어 그다지 천수를 누리지는 못했다. 소보인은 북위로 망명하여 목숨을 건지고 효문제 원굉의 부마가 되었으나, 역모죄로 처단되었다. 거기에 아들 셋은 아버지의 역모에 휘말려서 죽거나 요절했거나 아내와 짜고 친어머니(원굉의 딸 남양장공주)를 죽였다가 처단되어 대가 끊겼다. 그리고 소보권의 차남 소종도 살아남았는데 자세한 것은 소종 항목을 참조하길 바란다.
2 재위기간
2.1 종리전투와 북벌
즉위 직후인 507년, 북위의 중산왕 원영과 맹장 양대안은 호왈 100만 대군으로 남하했으나 막아냈다.[4] 이것이 비수대전과 함께 위진남북조시대 최대의 전투인 종리전투인데, 종리성의 창의지가 불과 3천의 병력으로 절망적인 농성을 버텨가고 있을 때 명장 위예(별명으로 위호(虎)라고도 불린다.)의 2만 지원군이 전세를 뒤엎어버렸다. 위예는 전차로 기세가 오른 북위군의 요격을 막아낸 후 한번에 북위군을 포위, 전멸시켜버렸다. 아무도 종리전투를 기억하지 못하고 양무제의 선정만을 기억하는 것만 봐도 위예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위예는 가마에 탄 채 지팡이를 두드리며 지휘를 했고, 북위군이 회수에 놓은 다리를 화공으로 날려 버리며 퇴로가 사라진 적에게 무참한 패배를 안겼다. 북위군은 일찌기 합비 때부터 양대안 휘하 장수들의 무능함으로 스스로 탈영병이 속출하는 전력이 있었던 만큼 다시 무참히 무너졌고, 참수당한 북위군이 10만, 익사한 북위군이 10만이었다. 종리성에서 이 모습을 지켜본 창의지는 "승리다! 승리다!"라고 외치며 환호하였다나. 이후로도 양나라는 계속 종리전투에서 300 기병대로 활약한 지장 진경지 등을 통해 여러차례 북벌을 시도했으나 양대안의 선방으로 실패했다. 물론 낙양을 일시적으로 회복하는 등 공수가 바뀌었다는 측면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2.2 빛나는 치세
앞서 언급한 대로 소연은 촌수는 꽤 멀었지만 멸망한 제나라 황족이었으므로 국가가 바뀌었으나, 황족의 성과 핏줄은 그대로인 몇 안되는 사례중 하나로 역사에 기록된다. 실제로 오행의 덕도 바뀌지 않았다. 시작은 피바람이 몰아치는 등 상서롭지 못했지만 그 피바람은 황족에게만 국한된 것이었으며, 백성들에게는 소연이 선정을 베풀었다. 게다가 무제의 치세는 48년이란 긴 세월이었고,[5] 그동안 내정을 정비하여 구품관인법을 개선하고 불교를 장려하여 국내를 다스리고 문화을 번영시켰다. 대외관계도 비교적 평온하여 약 50년간 태평성대를 유지하여 남조 최전성기를 보내었다. 또한 31살의 젊은 나이에 죽은 무제의 장남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이 편찬한 '문선(文選)'은 후세에까지 전해지는 훌륭한 문헌이었다.
그런데...
2.3 빛 좋은 개살구
뱃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진 후 생긴 병으로 죽은 소통의 요절은 그렇잖아도 암울한 양나라의 미래를 더욱 암울하게 만들었다. 훗날인 555년 소통의 삼남 소찰이 서위의 괴뢰정권 후량의 황제가 되자 소통은 고종(高宗) 소명황제(昭明皇帝)로 추존되지만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확실한 후계자가 없는 상황이라 후경의 난이 발발하자 즉시 양나라에서는 분열이 발생하였고, 이는 결국 양나라를 멸망으로 가게 만든 것이었다.
게다가 소연의 50년에 걸친 치세 후반에는 불교에 너무 심취하여 스스로 동태사(同太寺)에 여러번 투신하는 무모한 행동, 한마디로 자기자신을 절의 노예로 바쳤다라는 행동을 일삼았으며, 그럴 때마다 신하들은 막대한 돈을 들여 무제를 다시 사들여서 되찾아 왔기에 국고가 크게 궁핍해졌다. 황제를 팝니다 퇴위 후 법황의 신분이라면 모를까 재임 중에 황제를 잃어버리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비슷한 예로는 백제 법왕이 있겠다. 하지만 소연이 괜히 정신착란을 일으켜서 불교에 심취한 것이 아니었다.[6]
그리고, 남조의 각 국가는 황제와 국가는 바뀌지만 귀족들은 그대로인 사실상의 귀족정에 가까운 체제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황제의 권위와 능력, 그리고 자금력은 상당히 실추된 상황이었다. 이런 점을 개선하고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상업을 장려한 것은 좋았으나, 경제가 번영할수록 인플레이션은 심화되었고, 국가에서 동전을 만들 구리가 부족했기 때문에 철로 만든 철전은 사람들에게 외면받아 거스름돈 목적에나 쓸 정도로 가치가 하락하였다. 덕분에 경제는 좋아졌지만 빈부격차가 미친듯이 늘어났으며, 수도의 귀족들과 거상들은 신선같은 복장을 하고 화장을 하는 등의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지만 옷도 안 입혀주면 못입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는 반무능력자의 상태에 돌입해서 청담사상에 따른 뜬구름잡는 소리나 하고 있고, 빈민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었다. 따라서 치세 후반기에는 무제에게 더 이상의 경제대책은 없었으므로 그 자신도 자포자기하고 불교에 빠져버린 것이다.
3 연이은 실정
소연은 불교를 지나치게 신봉했고 함부로 관직을 설치했다. 거기에 종친을 지나치게 감쌌으며 친분 관계에 따라 사람을 등용했다. 송나라와 제나라가 골육상잔으로 멸망해서인지 소연은 종친들의 잘못을 바로잡지 않았다. 그의 여섯째 동생 임천왕 소굉(萧宏,473~526)은 사치를 좋아하고 백성의 재물을 수탈하여 집에는 창고 백여칸이 있고 엄청난 재물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소연은 오히려 동생아, 너의 살림이 엄청 괜찮구나라며 칭찬하고 밤늦도록 그와 술을 마셨다. 이에 소굉은 더욱 제멋대로 남의 재물을 빼앗고 다른 종친들도 소굉을 본받았다. 대낮에 사람을 죽이고 밤에는 약탈했으며 어느 죄인은 종친의 집으로 도망가는 바람에 관리가 감히 들어가지 못해 잡지 못했다. 소연은 이걸 알면서도 방치했다.
소연은 원래 자식이 없어서 소굉의 아들 소정덕을 양자로 키웠지만 태자 소통이 태어나자 소정덕을 자기 집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소정덕은 황제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보통 3년(522년), 북위로 달아났다. 하지만 북위에서는 그의 어이없는 망명에 의아해지고 의심을 품어 야박하게 대했다. 결국 다시 양나라로 돌아왔지만 소연은 그를 다시 후작으로 봉했고 살인, 약탈, 강간 등 나쁜 짓을 일삼아도 감싸주었다. 그래도 인간 쓰레기 소정덕은 후경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를 끌여들여 숙부 소연을 죽이고 자기가 황제가 되려고 했다. 그 외에도 소연은 날이 갈수록 충언을 듣지 않고 탁상공론을 중시했다. 후경이 난을 일으키자 당시 반란 진압 회의를 하던 문무백관 중에 말을 탈 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몇몇은 말이 히히힝 거리는 소리를 듣고 놀라서 호랑이에 비유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말해 그의 신하들이 아가리 파이터들였다는 것이다.
중대통 5년(534년), 부패로 시들어가던 북위가 내부 혼란으로 서위와 동위로 분열되었다. 소연은 이 틈을 타 국력을 증강시켜 북벌을 강행했다면 성공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국력이 겉으로는 강화되었지만 내실은 좋지 못했다. 덤으로 앞서 말했듯이 말을 타기는커녕 말보고 놀라는 작자들이 군대를 이끈다면 잘해봐야 침공군 전체가 개관광이나 당하는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4 비참한 최후
태청 원년(547년) 정월, 동위의 장수 후경이 동위의 권력자 고징과의 알력으로 하남을 점령하고 서위에 투항했다. 또 동시에 하남을 양나라에 바치고 투항하겠다는 서한을 보내왔다. 소연은 후경의 속마음도 파악하지 않고 공짜로 엄청난 영토를 얻는다는 욕심에 후경을 하남왕, 대장군에 봉했다.
그런데 이듬해 정월, 후경이 동위군에게 패배하자 구원을 요청해왔다. 이에 소연은 후경을 도와주고 오히려 남예주목에 임명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후경은 자신이 가졌던 영토를 거의 잃어버리고 고작 수백 명의 병사만 이끌고 간신히 도망쳤으며, 소연이 보낸 구원군은 일격에 동위군에게 개발살나서 지휘관인 소연명이 사로잡히는 참사를 기록했다. 한마디로 말해 작은 욕심 부리다가 개망신 당한 셈.
설상가상으로 동위의 고징은 양나라와 후경을 이간질하기 위해 2월, 우리 다시 사이좋게 지내요라며 서한을 보내왔는데, 후경은 고징의 음모를 간파하고 소연에게 이를 알렸으나 무시당했다. 사실상 이 시점에서 후경의 존재가치는 양나라에서 평가절하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동위에서, 이전에 동위와의 싸움에 패배하여 사로잡혔던 소연의 조카 정양후 소연명과 후경을 바꾸자는 서한을 보내오자 소연은 동의하고 '정양후를 아침에 보내주면 후경을 저녁에 보내주겠소'라고 답변을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후경이 고징의 명으로 위조하여 보낸 가짜 편지였다. 소연이 자기를 버릴 것이라는 확신을 얻은 후경은 정예병을 이끌고 건강으로 진격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양나라가 후경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후경은 자기 땅 다 날려먹고 돈도 물자도 별로 없어서 정예병이라고 해봤자 이름뿐이며, 그 숫자도 1,000여 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양나라는 오랜 세월 태평세월이 지속되고 내부는 썩어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소정덕이 몰래 수십척의 큰 배들을 보내 후경의 군대가 강을 건너는데 도와주었고 그를 건강으로 안내했다. 11월, 후경은 승상이 되어 소정덕은 허수아비 황제가 되어 자신의 한을 풀었다. 태청 3년(549년), 소정덕은 후경에 의해 폐위되고 살해당해서 자신이 저지른 대가를 그대로 돌려받았지만...
일단 앞서 언급한 양나라의 문제점 덕분에 수도인 건강성 남문을 지키는 총책임자가 갑옷을 입고 얼굴 방어용 철면을 장착한 기병 단 1기에 놀라서 성문을 버리고 도망치는 막장 상황이 발생했고, 적은 병력에도 불구하고 후경은 건강성을 완전히 장악하고 군대를 보내 건강성 안에 있는 궁성을 포위하고 물자와 수로를 차단했다.
궁성 안은 시체들이 즐비했고 숨이 곧 끊길 사람들도 태반이었다. 이 상황에도 대도독 유중례(柳仲禮)는 기생과 첩을 끼고 술판을 벌였으며 휘하 장수들이 후경 토벌을 하려해도 오히려 막았다. 이는 무제의 6째 아들인 소륜(蕭綸)과 같이 짜고 한 짓이었기에 가능했는데 양무제를 죽이고 황제에 오르려던 소륜이 부귀영화를 약속했기에 벌인 짓이었다. 그러나 제위에 오르지못한 소륜은 후경에 저항해 2년 가까이 맞섰지만 이 와중에도 황제먹으려고 형제인 소각이나 여러 형제들이랑 내전이나 벌였다. 이러니 다같이 힘합쳐 싸워도 될까말까인데 이렇게 스스로 자멸한 셈이니 결국 패해 551년 잡혀서 끔살당한다. 그리고 유중례는 항복하여 목숨을 구제받았으나 모든 권력을 잃고 재산이나 챙기고 달아나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양나라의 빈부격차의 확대로 인해 많은 빈민들이 있었는데, 후경이 약탈을 허용하자 빈민들이 후경의 군대에 입대하는 통에 후경의 세력은 날로 증가해서 정예병만 10만이 넘게 되었다. 거기에 소연의 다른 아들들은 대부분 힘이 약하거나, 그렇지 않아도 오히려 아버지를 도와주지 않았는데, 이유는 아버지가 죽으면 그들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늙었어도 그나마 정신이 멀쩡한 무제는 왜 유중례나 소륜이 반군에 맞서지 못하냐고 하자 신하인 유진이 이렇게 깠다.
그들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오로지 폐하가 죽고나서야 제위나 노리고 올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알아보지 못했으니 다 자초한 거 아니옵니까?
12월, 후경은 입성하여 소연을 만났는데 후경은 비록 늙었지만 소연의 카리스마를 보고 쫄아서 땀을 흘리며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래서 후경의 심복 임약이 대신 대답을 했다.
소연: '그대가 양나라로 망명할 때는 몇 명이었는가?' 임약: '수백 명이었습니다.' 소연: '그대가 강을 건널 때는 몇 명이었는가?' 임약: '10만이었습니다.' 군세에 눌렸는지 점점 소연의 포스가 떨어지자 후경은 그제서야 자신이 대답했다. 소연: '그대가 건강을 포위할 때는 몇 명이었는가?' 후경: '이 나라 백성 전부입니다. 폐하.' |
후경은 모든 권력을 장악하자 소연은 정거전에 유폐되었고 음식도 후경에 의해 통제되었다. 양무제의 최후는 원술과 유사한데 바로 죽기 전에 꿀물을 달라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하고 울분이 터진 병들어 죽은 것이다. 결국 소연은 후경을 '괘씸한 놈'이라고 두 번이나 목멘 소리로 욕을 하다가 죽었다. 이 정도면 안습이다.
그의 뒤는 셋째아들 소강이 뒤를 이었는데 그가 간문제다. 5월, 86세의 나이로 정거전에서 양무제 소연은 굶어 죽었고 후경이 평정된 후 11월, 수릉(修陵)에 안장되었다.
말년에 한정하면 정말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야 또는 신도 부처도 없단 말인가라는 표현이 이렇게 잘 들어맞을 수가 없다(…).
참고로 양무제 소연의 황후 무덕황후(武德皇后) 치씨(郗氏)[7]는 유송 문제 유의륭[8]의 외손녀였다. 치씨는 소연이 죽기 무려 50년 전에 죽었으며 31살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당시에는 소연이 제나라의 실권자로써 양공(梁公)이었기에 양공비(梁公妃)로 사망했다. 훗날 소연이 즉위하자 치씨를 무덕황후로 추증했다. 치씨는 소연과의 사이에서 장녀 영흥공주(永興公主)[9], 영세공주(永世公主)[10], 영강공주(永康公主)[11]을 뒀는데 그 중 장녀 영흥공주는 천하의 개쌍년이었다. 남편 은균이 있었으나, 숙부였던 임천왕 소굉과 간통했고 소굉과 통모해 아버지를 죽이고 소굉이 황제가 되면 자기는 황후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진작에 발각되어 영흥공주는 숙부와 사통하고 그를 꼬셨다는 이유로 주살되었다. 그러나 양무제가 사랑하는 소굉은 죄를 받지 않았는데, 상술했듯이 소굉의 악행을 보면 친족에 대해 너무나 관대한 소연이 왜 패망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려 성종대의 문신 최승로는 그 유명한 시무 28조에서 지나친 불교 숭상을 삼갈 것을 주장하며 소연의 예를 들었다.
5 황제보살의 업적
동북아시아 불교의 승려들이 고기를 못 먹게 한 주범이자 콩고기 탄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이전에는 동북아 불교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고기를 먹었고, 초기 불교는 물론이고[12][13], 현재의 남방 불교에서는 어지간한 육식은 허용했다.
그런데 양무제가 종묘 제사에조차 고기와 술을 쓰지 않고, 술과 육식을 금하는 포고령인 <단주육문(斷酒肉文)>을 공포하면서 본격적으로 금육이 시작되었다.(참고링크) 황제를 포함 전국이 불교국가가 되기로 작정한 것. 승려들이 황제의 뜻에 거스르지 않으려고 채소류만으로 만들면서 고기와 비슷한 맛이 나는 정진요리를 개발했고, 이 과정에서 콩고기가 발명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고착화된 승려의 육식금지가 불교가 전래되는 과정에서도 죽 유지되면서, 결국 동북아 불교에서 육식은 사라졌다.[14]
6 야사
생전에 인도에서 '선(禪)'을 전파하러온 고승 달마대사도 그를 만난 적이 있으나, 자신을 중국의 아육왕(인도의 아소카 왕)이라며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며 얼마만큼의 공덕이 되겠느냐고 달마대사에게 질문하였으나 달마대사는 한마디로 "無"라고 하였다. 선업선과 악업악과의 유위적이고 외적인 공덕이 아니라, 실제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에 도달하는 무위적이고 내적인 공덕에 비할 바 없다는 의미라고 한다. 흠좀무
그런데 도올 김용옥 등은 이를 실화가 아니라 맹자와 양혜왕의 이야기 구조를 그대로 따와서 만든 은유라고 풀었다.
한 야사에 따르면 이에 열을 받은 무제는 자객을 보내 달마를 암살(혹은 독살)하고는 위선적으로 장례를 치러주었는데, 탑에서 짚신 한 짝만 두고 살아나와 서쪽으로 내빼 영영 사라졌다고 전한다. 이 때 추격하는 군사들을 큰 강에서 갈대 하나를 꺾어 수상스키 타듯 따돌렸다고 한다. 짚신 나머지 한 짝은 막대에 꿴 체였다. 물론 실제 역사기록에 따르면 달마는 양무제 치세에 죽었으니 그의 때 맞춘 죽음에 보태어 만든 이야기로 보인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야사로, 애당초 달마에 대한 기록들이 하나같이 전설 수준인데다, 불교에 그토록 심취한 대인배 황제가 불교에서 죄악시하는 살생을 열폭때문에 저질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는 선종의 달마 띄워주기 과정에서 황제가 비교열위로 낮잡혔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게다가 양무제가 달마대사의 열반 이후 그의 깨우침을 기리며 친히 추모비를 세워줬다는 기록도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견지부견(見之不見) 봉지부봉(逢之不逢) 고지금지(古之今之) 회지한지(悔之恨之).
눈으로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고또 다른 야사가 있는데, 살생을 금지했던 불교의 교리에 따라서 양무제는 기존의 사형제도를 폐지했다. 대신 새로운 형벌을 만들어 냈는데, 누각을 하나 짓고 중죄인에게 새의 깃털로 만든 날개를 달아준 다음에 누각 위에서 스스로 줄없는 번지점프를 하게 하는 형벌이었다.맞이해서 만나고도 뜻을 맞지 못했으니
예고 지금이고
후회하고 한스럽구나(고금회한)
- ↑ 문헌황후(文獻皇后) 장씨(張氏)로 추존되었으며 이름은 장상유(張尙柔)이다.
- ↑ 현조부 소정이 동해군 난릉현 중도향 중도리 사람이었다. 나중에 난릉현이 난릉군으로 승격되어서 난릉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남난릉은 강남에 교치된 난릉군이다.
- ↑ 훗날 장사선무왕(長沙宣武王)으로 추존되었다.
- ↑ 양무제가 장군 왕무선을 통해 만족을 회유하려다가 선무제가 파견한 양대안의 카운터를 맞은 것. 숙예를 내주는 등 양나라 군사는 회북 5개 성을 내주며 패퇴했다가 위예에 의해 합비를 수몰시켜 되찾고, 다시 무제가 파견한 동생 임천왕 소굉 역시 두려움에 스스로 기세를 꺾어 북벌에 실패하고 패퇴하면서 일진일퇴하고 있었다.
- ↑ 그 사이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분열하였으며, 얼마 못가 북제와 북주로 왕가가 바뀌게 된다.
- ↑ 사실 이것은 불교와 함께 들어온 인도 풍습이다. 인도는 종교적인 국가여서 종교가 정치보다 위에 있는 시스템이다. 이런 문화 속에 종교인(수행자)에게 재물 등을 바치는 공양을 하게 되는데 형식적으로 나라를 바치고 다시 재물로 사오는, 즉 형식이 나라를 바치고 실제로는 그것을 이유로 큰 재물을 바치는 것이다. 이런 예로는 인도의 아소카왕이 있다.
- ↑ 이름은 치휘(郗徽)
- ↑ 치씨의 아버지는 치휘, 어머니는 유의륭의 딸 심양공주 유씨였다.
- ↑ 이름은 소옥요(蕭玉姚)
- ↑ 이름은 소옥완(蕭玉婉)
- ↑ 이름은 소옥현(蕭玉嬛)
- ↑ 당연하지만 불교에서 금하는 건 살생이지 육식이 아니다. 보시받은 음식이 채소든 고기든 맛있게 먹고 보시한 사람의 복을 빌어주는 게 탁발의 기본이다.
- ↑ 엄밀히 말하면 좋다 싫다는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 것을 수행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불교는 그런 탁발문화가 없었고 또 왕의 후원으로 인해 밥을 얻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승려가 고기를 먹는 것은 직접 살생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래도 강제한 것은 좋지 않다고 본다. 종교를 강제하는 것은 정치권력이 결합된 현상으로서 순수한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 ↑ 일본 승려들은 대처승에다 먹을 거 다 먹었다지만, 사실 이것도 지금처럼 매우 당연시된 것은 메이지 유신 시기 신토를 부흥시키고 불교를 억제하던 정책 하에서 나온 부산물이니 논외다. 거기다 이것도 원래 개방적/민간 친화적 성향이 강한 종파인 진언종이나 일련종 쪽 얘기지, 같은 일본불교도 선종 계열은 승려의 결혼이나 육식에 상당히 엄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