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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슈몽의 동상)
Arthur III, Duke of Brittany (Arthur de Richemont)
1 소개
잔 다르크와 함께 샤를 7세를 위해 싸운 장수로 잔 다르크가 잉글랜드군에게 잡혀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잉글랜드인들과 싸워 잉글랜드군을 물리치고 백년전쟁을 승리로 이끈 프랑스의 명장이다.
2 행적
브르타뉴 공작 쟝 4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고 형인 쟝 5세에게 잉글랜드의 리치먼드 백작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리슈몽의 어머니인 잔은 남편이 죽은 뒤 잉글랜드 왕 헨리 4세와 재혼해 잉글랜드 왕가와 브르타뉴 사이의 인척관계를 다시 맺었다. 그러나 리슈몽의 관심은 주로 프랑스 문제에 쏠려 있었다. 발루아 왕조의 갈래인 오를레앙[1] 가문과 부르고뉴 가문 사이에 격렬한 분쟁이 일어났을 때 리슈몽은 전자의 편에서 싸웠다. 같은 시기에 리슈몽은 프랑스 왕 샤를 6세의 아들인 루이 왕세자의 친한 친구이자 열성적인 지지자로 활동하였다.
아쟁쿠르 전투중에 부상을 입은 리슈몽은 잉글랜드군에 포로가 돠었다. 그는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충성서약을 하고 석방되어 잉글랜드 편으로 돌아섰다.
그는 자신의 형 쟝을 설득해 잉글랜드 왕 헨리 5세를 프랑스 왕위 계승자로 규정한 트루아 조약을 지지하도록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이에 헨리는 보답으로 프랑스의 이브리 백작령을 리슈몽에게 주었다.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연합세력과 리슈몽의 관계는 젊어서 죽은 루이 왕세자의 미망인인 부르고뉴의 마르그리트와 그가 결혼함으로써 더욱 긴밀해졌다. 이 결혼으로 리슈몽은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립과 잉글랜드의 섭정인 베드퍼드 공작의 인척이 되었다. 그러던 그는 돌연 베드퍼드 공작과 까닭 모를 분쟁을 일으켰고 잉글랜드 편을 떠나 아르마냐크 프랑스에 충성하는 입장으로 돌아갔다.
샤를 7세에 의해 프랑스의 군사령관에 임명된 그는 패퇴해 무기력해진 프랑스의 군사력을 정비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며 완전히 프랑스 편에 서서 자신의 형을 설득해 프랑스와 소뮈르 조약을 체결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리슈몽은 태도가 거친데다가 전쟁 속행을 완강하게 고집했으므로 이내 인기없는 인물이 되었으며 정치적 능력이 총리 대신인 조르주 트레무아유에게 미치지 못하였고 점차 샤를 7세에게 꺼림받기 시작한다.
설성가상으로 궁정에서 브르타뉴가 다시 잉글랜드 편으로 돌아서면서 리슈몽의 영향력은 더욱 약해졌고 쟝 5세와 섭정 베드퍼드가 조약을 맺자 리슈몽은 결국 프랑스 궁정에서 배척당하였다.
하지만 리슈몽은 군사령관이였던 사이 군에 영향력이 커졌고 자신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황실은 리슈몽을 경계하고 의심하며 동향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던 때 1429년 잔 다르크가 등장하여 오를레앙을 구출하고 랭스 원정길에 오르던 중 리슈몽은 잔 다르크와 합세하고 잉글랜드에 맞서 싸우고 특히 파타이 전투에서 라 이르의 활약으로 큰 승리를 거두고 샤를 7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신임을 되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후 잔 다르크의 파리 공격이 실패하고 콩피에뉴에서 잔 다르크가 부르고뉴군에게 잡혀 화형 당한 뒤 조르주 트레무아유의 공작에 의해 군에서 쫓겨나고 만다. 하지만 리슈몽은 브르타뉴와 샤를 7세가 렌 조약을 맺어 다시 한번 손잡도록 만들어 신임을 되찾는데 성공하고 조르주 트레무아유가 마침내 축출된 뒤 사령관으로써 궁정에 복귀했다.
리슈몽은 자신과 부르고뉴 가문과 맺고 있는 인척관계를 이용해 아라스 조약을 주선했으며, 이로 인해 결국 부르고뉴 공작 필립과 프랑스 국왕 사이의 오랜 분쟁이 끝났다. 아라스 조약은 백년전쟁의 정치적·외교적 전환점이었고 프랑스 내부의 다툼이 끝나고 순수하게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전쟁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전쟁에서 군사적 문제가 존재하였으모 파리에서 잉글랜드 주둔군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을 때 리슈몽은 파리로 진군했을 때 군대의 엉성한 조직력 때문에 전과를 올리지 못하게 되었고 리슈몽은 프랑스 군대의 전면개혁을 결심했으며, 군대 유지에 필요한 세입을 조달하기 위해 국가재정도 재편하기로 했다.
샤를 7세의 강력한 지지를 얻고 나아가 노세와 소금에 대한 과세로 고정적인 수입원까지 확보한 리슈몽은 프랑스 기병대를 개편했다. 이러한 준비 덕분에 리슈몽은 짧은 휴전이 끝난 뒤 압도적인 성과를 거두어 전세를 뒤바꿔놓을 수 있었다. 백년전쟁의 최종국면에 접어들어 리슈몽은 코탕탱 반도에서 잉글랜드인들을 몰아내고 포르미니에서 벌어진 결전에서 큰 공을 세우는 등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그 뒤 곧 노르망디를 차지하였고 기옌을 점령한 뒤 마침내 백년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었다. 전쟁이 끝난 뒤 리슈몽은 일선에서 물러난 뒤 1457년 조카 피에르 2세의 브르타뉴 공작을 계승한지 1년 만에 죽었다.
3 대중 문화 속 리슈몽
- 게임 JEANNE D'ARC
- ↑ 이후 아르마냐크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