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5세

역대 잉글랜드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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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헨리 5세(Henry V)
별칭몬머스의 헨리
(Henry of Monmouth)
생몰년도1386년 9월 16일 - 1422년 8월 31일
재위기간1413년 3월 21일 – 1422년 8월 31일
대관식1413년 4월 9일

영국의 왕.

1 행적

세익스피어의 극에 나오는 모습과는 달리 진지하고 성실한 성격이었으며, 능력이 대단해 헨리 4세가 병에 들었을때 잠시 아버지 대신에 왕의 일을 했는대 이때 너무 유능해서 회복한 헨리 4세는 아들을 견제해 이후 헨리 5세에게 아무런 공직도 주지 않았을 정도다. 결국 그는 건강이 좋지 않은 아버지가 사망하기를 그냥 기다렸다.[1]

1.1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다

즉위했을 때가 한창 프랑스백년전쟁으로 투닥대던 시기라 그는 왕위에 오르고 대부분의 시간을 프랑스군과 치고받으며 지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Jean sans Peur/John the Fearless)이 이끄는 부르고뉴 파와 오를레앙 공작 샤를이 이끄는 아르마냑 파[2]가 실권을 두고 암투를 벌이고 있었다. 대립이 격화되어가는 와중에도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이들을 제어하지 못하여 국내의 혼란은 지속되었다. 양 파벌은 서로를 누르기 위해 심지어 잉글랜드의 헨리 5세에게 손을 벌리기까지 했고 헨리 5세는 이러한 대립을 잘 이용하여 장차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얻기 위한 발판으로 삼고자 했다. 그리고 1415년, 헨리 5세는 잉글랜드 군을 이끌고 드디어 프랑스 땅에 상륙하게 된다.

그는 용맹공 장에게 자신이 정당한 프랑스 왕위의 상속권을 가진 자임을 주장하며 그에게 협력할 것을 요구했다. 용맹공 장은 처음엔 잉글랜드 군과 결탁하고자 하는 조짐을 보였으나 일단 아르마냑 파와 동맹을 맺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헨리 5세의 잉글랜드 군과 아르마냑 파가 주도하는 프랑스 군이 충돌, 그 유명한 아쟁쿠르 전투가 발발했다.

프랑스의 영국군은 진이 쭉 빠져 프랑스에게 언제 쓸려나갈지 몰랐으나 프랑스군이 아쟁쿠르 전투에서 알아서 자폭해준 덕분에 프랑스 기사들을 철저히 발라버리고 승자가 되었다. 이때 헨리는 프랑스군 포로를 모조리 학살하도록 지시했으며, 자신의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날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간신히 생환할 수 있었다. 한편 아쟁쿠르 전투로 인해 사망한 프랑스 군 지휘관 중에는 용맹공 장의 동생들도 있었으나 정작 용맹공 장 휘하의 부르고뉴 군은 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

이후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동맹국이었던 제노바의 해군을 격파하고 외교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를 갈라놓아 프랑스를 고립시킨 뒤, 1417년 다시 프랑스로의 원정을 재개했다. 그런데 이 때 아르마냑 파와 부르고뉴 파는 다시 내부 항쟁에 돌입해 있었다. 아르마냑 파는 아쟁쿠르 전투에서의 처참한 패배로 인해 세력이 많이 약화되어 있었으나 파리의 지배권은 여전히 아르마냑 백작 베르나르 7세에게 있었고, 부르고뉴 파는 라이벌인 아르마냑 파를 찍어누르고 프랑스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자 했다. 헨리 5세는 이들의 분쟁이 더욱 격화되도록 교묘히 유도하여 그들이 힘을 합쳐 자신에게 대항하는 것을 막으며, 프랑스 군을 각지에서 격파, 점차 남진하여 파리를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1418년, 부르고뉴 군이 폭동을 일으켜 파리를 무력으로 탈취했고 라이벌인 아르마냑 백작 베르나르 7세가 부르고뉴 군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샤를 6세의 아들이자 원래 왕위계승권자인 도팽 샤를은 원래 부르고뉴 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살아남기 위해 파리를 떠나 시농으로 도피했다.

이후 도팽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용맹공 장에게 회담을 신청했고, 몽트로 다리에서 양자가 회동하기로 약속이 맺어졌으나, 회담 장소에서 용맹공 장이 도팽 샤를의 부하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1419년). 이에 격분한 용맹공 장의 아들 선량공 필립은 영국군과 연합하여 도팽 샤를을 적대하게 되었고, 따라서 파리 역시 헨리 5세의 세력권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1420년 5월, 헨리 5세는 샤를 6세와 트루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샤를 6세의 딸인 발루아의 카트린느와 결혼하고 샤를 6세의 뒤를 잇는 프랑스 왕위계승자이자 프랑스 왕국의 섭정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하였다.

당시 프랑스의 왕이었던 샤를 6세는 헨리 5세보다 나이도 많고 병약했기 때문에 헨리 5세로서는 샤를 6세만 죽으면 자신이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의 왕이 될 거라고 여겼다. 비록 도팽 샤를과 그를 지지하는 아르마냑 파가 트루아 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반항하고 있었지만, 프랑스 내의 다른 주요 파벌인 부르고뉴 파는 헨리 5세의 즉위에 찬동하고 있었고 헨리 5세 본인이 이미 아쟁쿠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프랑스 포로들을 대부분 학살하여 자신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커질 가능성을 미리 차단해 놓았기에 명분으로나 실력으로나 그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명백한 운명처럼 보였다. 그런데....

1.2 사망

아들 헨리 6세가 태어나고 얼마 뒤 사망.[3] 문제는 헨리 5세가 사망한 시점에 샤를 6세는 살아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을 아들 헨리 6세는 아직 열 살도 안 된 꼬마....일이 이렇게 되자 트루아 조약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르마냑 파의 목소리는 점차 힘을 얻게 되었고 이에 힘입어 도팽 샤를은 자신이 정당한 프랑스의 왕위계승자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부르고뉴 파는 이러한 도팽 샤를의 주장을 트루아 조약 위반이라고 비난했다. 비록 도팽 샤를이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했으나 전통적으로 프랑스의 왕이 대관식을 올렸던 랭스[4] 는 영국군 + 부르고뉴군의 점령 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그는 대관식도 치르지 못한 채 시농 성에서 골치를 썩이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프랑스의 성처녀 잔 다르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2 평가

결국 갑작스러운 자신의 죽음, 그리고 뒤를 이은 아들 헨리 6세의 어린 나이와 무능, 잔 다르크로부터 시작된 도팽 측의 반격으로 인해 자신이 거둔 가장 커다란 성과가 무효화되고 만 셈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동안 견원지간처럼 으르렁거렸던 영-불관계로 인해 프랑스 군을 격파하고 그 왕위계승권까지 한때나마 차지했던 헨리 5세는 오랫동안 영국인들에게 영웅으로 숭배되어 왔다. 더럽게 이질로 죽은 건 안 자랑 잔 다르크한테 공을 빼앗긴 건 안 자랑 그래서 영미권에선 대체역사를 좋아하는 역덕들이 그가 장수했을 경우 과연 어떻게 역사가 바뀌었을지, 특히 이럴 경우 잔 다르크가 역사에 등장할 수 있었을지나 잔 다르크와 대결할 경우 누가 이겼을지에 대한 떡밥의 글이 종종 인터넷 포럼에 올라온다.

3 트리비아

  • BBC에서 제작하는 연작드라마 할로우 크라운에서 톰 히들스턴이 헨리 5세를 연기했다.
  • 셰익스피어가 이 사람을 주인공으로 '헨리 5세' 라는 희곡을 썼는데 이 희곡의 한 구절, 정확히는 4막 3장의 'St. Crispin's Day Speech(성 크리스핀 데이의 연설)' 이 유명하다. 아쟁쿠르 전투만 언급되면 빠지지 않는 유명한 장면이다.[5]
And Crispin Crispian shall ne'er go by,

크리스핀 데이는, 오늘로부터 세상이 끝나는 그 날까지,
From this day to the ending of the world,
우리를 기억하지 않고서는...
But we in it shall be remembered-
절대로 이어지지 못하리라.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적은 우리, 적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한 형제들이다.
For he to-day that sheds his blood with me
오늘 나와 함께 피 흘리는 자는
Shall be my brother
모두 나의 형제일지라.

이 구절에서 제목을 차용한 작품에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위 해피 퓨가 있다. 전자는 이 구절의 긍정적 의미를 강조했지만, 후자는 비꼬는 듯한 부정적인 어조.
  • 김성한의 소설 '바비도'에서 왕세자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주인공 바비도[6]에게 약간의 동정심을 가지고 뉘우치는 말을 하면 살려주겠다며 회유하나, 바비도는 끝내 거절을 한다. 마지막에 "나는 오늘날까지 양심이라는 것은 비겁한 놈들의 겉치장이요, 정의는 권력의 버섯인 줄로만 알았더니 그것들이 진짜로 존재한다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네가 무섭구나 네가 . . .”라며 한탄한다. 직접 연관이 있지는 않지만 이 바비도가 훗날 헨리 5세의 아들 헨리 6세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막은 잔 다르크와 겹치는 부분[7]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리고 바비도의 모티브가 된 실존인물인 존 배드비가 1410년 화형을 당한지 2년도 지나지 않아 잔 다르크(1412년생으로 추정)가 태어난 걸 생각하면 묘하게 느껴질 수 있다.
  1. 임종의 자리에서 헨리 4세가 숨을 거뒀다고 생각한 헨리 5세가 왕관에 손을 대자, 헨리 4세가 눈을 뜨더니 "그건 아직 네 것이 아니다. 내 것도 아니었지만."이라고 말하고 숨을 거뒀다는 일화가 있다(....). 아빠 안 잔다 나 아직 안죽었어
  2. 오를레앙 공작 샤를의 아버지 루이 1세가 용맹공 장에 의해 암살당한 이후, 샤를의 장인인 아르마냑 백작 베르나르 7세가 불과 14세의 나이로 작위를 승계한 어린 공작을 재정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지원하며 파벌의 핵심인사로 떠올랐기에 파벌의 명칭이 아르마냑 파로 굳어졌다. 양측의 대립이 루이 1세 생존시부터 있었던 일이기에 이 시점의 파벌까지도 소급하여 아르먀낙 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3. 암살이나 전사는 아니고 자연사이긴 한데 이게 심장마비 같은 걸로 죽은 것도 아니고 계속 프랑스를 무리하게 침략하다가 한참 젊은 나이에 전염병인 이질에 걸려 죽은 거다.(똑같이 진중에서 병사한 제갈공명은 그래도 50대를 넘겨서 그 당시엔 제법 살만큼 산 나이였고 그 나이에 쌓인 과로와 스트레스로 병사한 거였다.) 한마디로 자업자득. 당시 위생상태가 얼마나 안좋았으면 국왕이란 사람도 그런 병에 걸려 죽는지 알 수 없다. 이질의 발병 원인도 그렇고, 이질이라는 병의 증상을 보면 국왕의 위엄이고 뭐고 구토와 설사를 하면서 정말 지저분하고 비참하게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전사라도 하거나 잔 다르크처럼 적에게 당당하게 처형당하면 멋지고 장렬하기라도 하지... 영국인들이 만든 역사를 다룬 작품과 영화들에서 멋지게 나오는 것과 정말로 대조적인 죽음. 그래서인지 죽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솔직히 이런 죽음을 고증하면 곤란하잖아.
  4. 프랑크 왕국의 실질적인 창업주 클로비스 1세가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른 이래, 프랑스의 왕은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르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베르됭 조약과 메르센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실제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도 아니고 명목상 로마의 황제인 신성 로마 제국도 아닌 프랑스로서는 랭스의 대관식을 통해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이어지는 나름의 정통성을 확보했던 것이다.
  5. 번역 출처
  6. 실존인물로 원래 이름은 존 배드비(John Badby)이며 작가의 착오로 바비도라고 쓰게 된 듯 하다.
  7. 두 사람 다 평민의 신분으로 영국 왕실과 맞섰으며, 이미 타락해버려서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권력만 챙기는 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하여 이단자로 몰려 재판을 받을 때도 당당하게 나서면서 의지를 끝까지 지키다가 화형 당했고, 심지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면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거절한 공통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