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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le of Agincourt[1]
Bataille d'Azincourt
1415년, 백년전쟁 중반에 일어난 대규모 전투. 아래 서술된 내용을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명량 해전의 지상군 버전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비슷하다.
영국왕 헨리 5세가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이나 푸아티에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던 장 2세의 미납된 몸값과 프랑스 내 영국령의 영구적인 인정 둘 중의 하나를 내 놓으라고 프랑스 왕실에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프랑스를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투다. 영국에서는 국왕이 친정했지만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당시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어서인지 대신 샤를 달브레가 지휘했다.
아쟁쿠르 전투 | ||
날짜 | ||
1415년 10월 25일(성 크리스핀의 날) | ||
장소 | ||
프랑스 아쟁쿠르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잉글랜드 왕국 | 프랑스 왕국 |
지휘관 | 헨리 5세 | 샤를 달브레† |
병력 | 약 6000명 | 약 20000~30000명 |
피해 규모 | 최소 112명 전사 | 4000~10000명의 전사 (3명의 공작) (5명의 백작) (90명의 남작) |
결과 | ||
잉글랜드의 결정적 승리. |
1 배경
헨리 5세는 만여명의 병력으로 8월 프랑스를 침공, 항구도시 아르플뢰르(Harfleur)의 공성전에서 많은 병력과 시간을 들여 9월 22일 항복을 받아내었다. 하지만 이미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영국군은 아르플뢰르를 벗어나 북 프랑스의 영국 거점인 칼레로 퇴각하려 했다.
프랑스는 병력 모집에 시간이 걸려 아르플뢰르 구원에는 실패했으나 영국군보다 우세한 병력으로 그들이 칼레에 들어가기 전에 격파하기 위해 추격했으며, 헨리 5세는 군내 전염병의 만연과 무리한 공성전으로 인한 병력 및 물자, 군량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의 병력이 더 증강되기 전에 추격군을 격퇴하기 위해 아쟁쿠르 근교에서 방어진을 펴고 프랑스군을 맞아 싸웠다.
프랑스군은 소집령에 따라 모여드는 프랑스 기사들을 보강하기 위해 전투를 지연 시키려는 속셈으로 협상을 제의했으나 헨리 5세측에서 거부, 10월 24일 전투가 벌어진다.
2 전개
양군의 병력차이는 사료마다 제각각 달라 정확한 내역을 알수 없는데, 주로 영국측 자료에서는 최소 3배, 최대 10배까지 프랑스군이 우세였다고 하며, 프랑스측 자료에는 최대 4배, 최소는 약 1.2배로 역시 프랑스군의 우세였다고 한다. 영국측 자료는 어떻게든 프랑스군의 우세를 부풀리고 있으며, 프랑스 측은 어떻게든 프랑스군의 병력을 축소시키려는 의도가 보인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현대의 역사가들은 아무리 적어도 대략 프랑스군 병력은 최소 2배 이상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게다가 영국군은 공성전에서 고전한 탓에 지치고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고, 진영에는 전장이동 간 환경의 악영향 때문에 전염병까지 약간 돌고 있었다.[2] 반면 프랑스군은 사기가 충천해서 서로 선봉을 다투는 상황이었다.
전장은 숲으로 둘러싸인 좁은 개활지에서 벌어졌으며, 프랑스의 기사들은 이전세대의 프랑스 기사들이 영국의 활공격에 피해를 입다가 결국 패퇴당한 교훈을 받아들여, 보다 강력한 플레이트 갑옷으로 무장하고, 말이 활 공격에 쓰러져 낙마하는 것을 피하고자 선발대를 제외하고 영국 진영을 향해 걸어서 진격했다. 이러한 전략은 나름 효과를 발휘하여, 영국군의 장궁은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물론 선발대로 출격한 승마 기사들은 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말을 노린 사격에 당해 상당수가 낙마하여 땅에서 싸울 것을 강요받았다.
3 참혹한 패배
선발대의 패퇴에도 불구하고 숫적으로 압도적인 우위였던 프랑스의 기사들은 이미 싸우기도 전에 이긴거나 다름 없다는 자신감에 도취되어 있었으며, 푸아티에 전투, 크레시 전투의 복수를 할 생각으로 궁수대는 대충 무시하고 왕을 중심으로 귀족, 기사, 중장보병으로 구성된 영국군의 중앙으로 몰려 들어 갔다. 컨스터블, 즉 총사령관이던 샤를 달브레가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분투 하고 있었으나 헨리 5세는 장궁병대에게 사격으로 도발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프랑스군은 이에 반격한답시고 멋대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좁은 지역에 과다하게 몰린 프랑스 기사들은 자기들끼리 방해되어 무기를 제대로 휘두르기도 어려울 지경이 되어 버렸다.[3] 더군다나 이렇게 멋대로 돌격했기 때문에 초장부터 프랑스군 궁병대는 무력화됐다. 아군의 등에다 대고 사격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영국군과 싸우기도 전에 이미 많은 기사들이 자기들끼리 밀치다가 넘어져 압사당했으며, 프랑스군의 진형은 혼란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기사들이 입고 있었던 플레이트 아머의 탓도 큰데, 펑퍼짐한 판금 갑옷의 표면에 진흙의 흡착효과 발생으로 쉽게 떼어지지 않고 물에 젖은 상태이기 때문에 거의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무게를 지닌다. 더군다나 진창이 심한 곳은 기사들의 정강이까지 진흙에 빠질 정도였다. 이에 영국의 보병, 기사들과 활이 통하지 않자 진지 구축용 망치와 도끼를 들고 달려든 영국 궁수들에 의해 프랑스 기사들의 도륙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궁수대는 혼란에 빠진 아군 탓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고, 아군을 구하기 위해 다시 투입된 말탄 기사들은 아군을 구출해 내기는 커녕 영국 장궁수들의 공격에 말을 잃고 낙마해 돌격력을 상실했다. 게다가 퇴각하는 기사들이 하마기사들의 틈에 섞여 프랑스군의 혼란만 가중 시켰다.
전투 후반, 일부 프랑스군이 영국 후방으로 난입, 군수마차를 불태우고 경비병력을 살해하자, 놀란 헨리 5세는 프랑스 포로들을 학살해 버린다. 이는 후에 프랑스 국내의 반영 분위기를 만들어 결국 백년전쟁에서 영국이 프랑스에서 패배하는 결과를 만드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당장 상당수의 병력이 여기서 증발했기 때문에 잔다르크의 등장 전까지 백년전쟁은 잉글랜드의 우세로 흘러간다.
4 결과
결국 프랑스군의 공세는 실패로 돌아가고 최소 4000에서 1만에 달하는 전사자가 발생했다. 전사자의 대부분이 기사였으며 귀족도 많이 죽었다. 심지어 총사령관 샤를 달브레도 전사했으며, 공작 3명, 백작 5명, 남작 90명이 사망했다. 이에 반하여 영국군의 전사자는 100명에서 500명 남짓했으며, 기사와 귀족의 사망자는 10여명에 불과했다.
프랑스군은 여전히 영국군에 대해 병력의 우위에 있었으나 손해가 너무 컸고, 진창에서 굴러다니느라 지쳐 있었으며, 사기도 떨어지고 사령관과 주요 귀족들이 전사하여 지휘할 사람도 마땅치 않았다.
결국 프랑스측은 헨리 5세와 프랑스 왕 샤를 6세의 딸 카트린느 공주의 결혼, 그리고 둘사이에서 나오는 아들이 영국과 프랑스의 왕이 되는 것을 골자로 한 트루아 조약에 동의하고, 헨리5세는 승자가 되어 프랑스 공주를 데리고 영국으로 귀환한다.
그러나, 헨리 5세는 아들인 헨리 6세가 태어난 직후 사망하고 카트린느 왕비도 요절하여 어린 헨리 6세가 영국왕에 오르자 나중에 샤를 7세가 되는 프랑스의 왕세자 샤를과 프랑스 왕실은 조약을 무시하고 헨리 6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을 거부한다. 이에 부르고뉴 공작이 새로운 영국왕의 섭정을 자처하여 프랑스에 반기를 들었고, 결국 영국-부르고뉴 연합군(섭정파라고도 불린다)의 공격에 프랑스 왕실은 파리를 잃는 등 연패.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 버려 수시에 몰리고 만다. 그러던 와중 오를레앙에서 어떤 처녀가 나타나면서...
여담으로 먼나라 이웃나라에 영국군은 쇠뇌를 구사했고 이것이 판금 갑옷을 관통할만큼 강력한 투사무기였다고 기술된 유명한 병크가 있으나, 물론 영국의 주력이 장궁이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실제 전투 양상은 프랑스의 쇠뇌수 및 이탈리아 제노바의 쇠뇌수 용병단 vs 영국의 장궁수였다. 당연히 그 승패의 여부도 장비 때문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엉망진창인 프랑스군 지휘 및 명령체계를 대놓고 무시하는 군인. 특히 기사들의 기강 문제가 더 컸다. 상황을 보자면, 사격을 명령하고 기사들이 돌격한다거나, 쇠뇌수들이 제대로 진형을 갖추고 궁시전을 개시하기도 전에 보병들을 내보내서 진형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버린다거나 파비스 같은 필수방호장비들도 없이 화살비로 내몰고, 화살에 피해가 급증하자 파비스 방패를 장비하러 후퇴하는데, 이를 적전 도주라고 처형하였다.
여담으로 프랑스 기사들은 전투 전 영국 장궁병들에게 손가락을 잘라버리겠다고 협박했는데 막상 전투가 영국의 승리로 끝나자 궁병들은 프랑스 기시들을 모욕하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이 멀쩡하다는 뜻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고....
5 창작물에서의 아쟁쿠르 전투
셰익스피어의 연극[4]에서 이 전투를 앞두고 헨리 5세가 하는 대사가 매우 유명하다. 창작물에 나오는 대사인데 사실인 줄 아는 사람도 많을 정도. 아쟁쿠르와 백년전쟁을 논하면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구절이다.
번역본
"오늘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자식에게 두고두고 전할 것이고,성 크리스핀의 날[5]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니,
오늘부터 세상 끝날까지 우리는 이 날마다 기억될 것이다-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기에 행복한 우리들,
우리는 모두 한 형제이니라.
오늘 이 전투에서 나와 함께 피를 흘리는 자는
내 형제가 될지니, 그 신분이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오늘부로 그 신분은 귀족이 될 것이고,
지금 영국에 남아 편히 침대에 든 귀족들은
여기 있지 못한 것을 땅을 치며 후회할 것이고
우리와 성 크리스핀의 날에 함께 싸운 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의 용기를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다."
영문
This story shall the good man teach his son;And Crispin Crispian shall ne'er go by,
From this day to the ending of the world,
But we in it shall be remembered-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For he to-day that sheds his blood with me
Shall be my brotherbe he ne'er so vile,
This day shall gentle his condition;
And gentlemen in England now-a-bed
Shall think themselves accurs'd they were not here,
And hold their manhoods cheap whiles any speaks
That fought with us upon Saint Crispin's day." ||
미디블2: 토탈 워에서도 역사적 전투로 나온다. 우선 프랑스군의 기병 돌격과 보병의 진군이 진창에 빠져 저지되고 그딴 거 없다. 프랑스 병력이 1,2,3차 축차투입으로 돌격을 감행해온다. 기병돌격을 막을 병사라곤 하마 영국기사대뿐이고, 거기에 후방의 기습이 재현되어 있기 때문에 얘네를 막으려면 유일한 기병전력인 하마기사대를 후방으로 빼기까지 해야 한다. 정말 열심히 하다 보면 어찌어찌 이길 수는 있지만, 프랑스군의 병크가 하나도 재현되어 있지 않아서 어이없는 전투.
사실 전열만 유지한다면 이기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후방에서 치고 들어오는 기사들은 후방에 배치된 미늘창병대로 어느 정도 저지가 가능하며(미늘창병대는 써있기는 중보병이지만 취급이 창병과 비슷해서 기병에 상성이 좋다) 좌측에 위치한 장궁병대로 그들이 아군의 후방으로 진입할 때에 사격하여 수를 줄이는 것도 가능하다. 제 1파로 전방에서 들어오는 기사들은 양쪽 장궁병대의 화살 세례로 아군 전위에 도달할 때 쯤이면 이미 절반 쯤은 줄어 있다. 그러므로 전열만 유지하고, 헨리 5세만 전사하지 않도록 이리저리 잘만 빼돌린다면 그리 어려운 싸움은 아니다. 무엇보다 기사단은 AI의 한계로인해 어지간해서 장궁병대가 쳐놓은 말뚝을 못넘고 알아서 들이박아 박살나준다. 어찌보면 재현에 충실한 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오히려 프랑스의 전 병력이 일거에 들어왔다면 더 어려운 난이도를 보였을 것이다. 당장 전력이 분산되어 축차투입되면 아무리 수적으로 우세하더라도 전투에서 우위를 점할 수 없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 정복자의 역사적 전투 캠페인에서도 재현된다. 부대를 충원할 수 없고 적지를 주어진 병력만으로 어찌어찌 돌파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임무지만, 위와 달리 장궁병으로 쏙쏙 적병을 점사하면 어이없이 쉽게 이길 수 있다. 기사도 점사 앞엔 장사 없다. 아니면 헨리 5세만 목표지점까지 찍으면 혼자서 적들을 요리조리 쏙쏙 잘 피해서 배까지 간다.
다나카 요시키 소설인 아르슬란 전기에서도 이 전투 여러가지를 쓴 게 나온다. 장 보댕이 이끄는 4만 병력에 맞서싸운 기스카르가 이끄는 2만 8천 병력이 중무장을 벗고 가벼운 무장을 한 채로 전투에 임하는데 이를 본 보댕군은 적은 돈이 없어 갑옷도 없다고 비웃었으나 진흙탕이 가득한 전투에서 오래가지 않아 중무장한 보댕군이 처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