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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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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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에서 1980년까지 사용된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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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에서 1987년까지 사용된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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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에서 1992년까지 사용된 국기


1978년에서 1992년까지 아프가니스탄에 존재했던 공산주의 국가.

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1919년 왕국으로 독립한 아프가니스탄은 1933년 자히르샤 국왕이 즉위하면서 정치, 경제적으로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파슈툰, 하자라, 타지크 등 아프간 내 여러 민족들의 갈등과 왕정을 지지하는 왕당파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하자는 공화파와 사회주의파,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이슬람 원리주의파 등으로 나뉘어져 내부분열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때 자히르샤 왕정 통치였던 1965년 소련의 공산주의 이념에 심취되어 있었던 누르 무하마드 타라키 등 아프간 국내 좌익 인사들이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이라는 정당을 세웠고 이들은 농민, 노동자, 극빈층 등의 지지를 키워나가 아프가니스탄 최대 좌익 정당으로 성장했다.

그러던 1973년 전 총리였던 무하마드 다우드 칸이 쿠데타를 일으켜 자히르샤 국왕을 몰아내는 사건이 발생했고 쿠데타로 실권장악에 성공한 다우드 칸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언하여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한편 쿠데타를 일으켜 실권을 장악한 다우드 칸은 쿠데타를 일으킬 당시 왕정통치에 반대하던 아프가니스탄 최대 공산주의 정당인 인민민주당 등 아프가니스탄 국내 좌익세력들의 지지를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막상 대통령이 된 다우드 칸은 안면몰수하듯이 인민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취소하고 인민민주당 등 국내 공산세력 밑 좌익세력들을 탄압하고 불법화하는 반공산주의 정책을 펼쳤고 동시에 마수드, 랍바니 등 국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도 같이 탄압하는 등 독재정치를 펼치면서 아프가니스탄 내부에서도 다우드 칸 대통령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던 1978년 4월 소련의 공산주의 이념을 지지하던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들 쿠데타 좌익 반란군들은 대통령궁을 공격하여 다우드 칸 대통령과 그의 일가족은 반란군들의 총에 맞아 전원사망하고 말았다. 쿠데타에 성공한 반란군들은 다우드 칸 정부의 탄압을 받아 감옥에 투옥되어있던 인민민주당 당원들을 석방시켜 새 정부를 구성하게 했고 같은해인 4월 30일 인민민주당의 지도자였던 누르 타라키가 새 정부의 대통령에 취임하여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인민민주당 1당 독재 정권 수립을 선포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은 공산화되었다.

한편 공산 아프가니스탄의 초대 대통령이 된 타라키는 토지국유화와 사유재산 금지 밑 조혼금지와 농촌부채 탕감등의 전형적인 소련식 개혁정책을 밀어붙여 민중들의 지지를 얻어내려했다. 그러나 대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의 특성상 인민민주당은 이슬람교를 탄압하는 화를 불렀다. 결국 이러한 인민민주당 공산 독재 정권의 이슬람 탄압은 이슬람 문화가 뿌리깊은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의 민심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더욱이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이른바 무자헤딘이라는 이름의 반란군들이 곳곳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면서 아프가니스탄은 인민민주당 공산 정부군과 공산정권에 저항하는 국내 무자헤딘 반란군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정부군과 무자헤딘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과정에서 죽어나가며 피를 흘렸다.

더구나 인민민주당도 내부적으로도 여러 파벌들로 분열되어 서로 권력쟁탈전을 벌이는 등 그 상태가 영 아니었다. 또한 대통령이 된 타라키마저도 정권 내부의 갈등조정과 국내 무자헤딘 반군 진압 등 강력한 지도력을 내지 못했고 인민민주당 내 일부 인사들도 타라키 대통령을 의심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은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이듬해인 1979년 그의 심복이었던 하피줄라 아민이 9월 16일 자신의 지지파 세력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타라키 대통령을 암살하였다. 타라키 대통령을 암살한 아민은 타라키의 사인을 심장마비로 위장발표하였고 같은해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대통령이 된 아민은 공산 정권 통치에 반대하는 자국국민들과 정치적 반대자들을 가혹하게 탄압, 학살하는 등 억압적인 독재정치를 펼쳤고 과거 친소련 성향을 띄던 타라키와 달리 자신을 아프가니스탄의 티토로 자처하며 소련과는 거리를 뒀다. 그리고 1978년 공산정권 출범이래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할거하며 무장투쟁을 펼치던 국내 무자헤딘 반란군들에 대한 반군 진압 또한 더욱 강화했다.

그러나 이러한 아민의 폭력적 독재통치에도 아프가니스탄 정국은 잠잠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아민의 지나친 소련에 대한 반발도 소련의 불만을 더욱 키웠다. 결국 이러한 아프가니스탄의 정국불안은 근접해있던 소련을 더욱 더 자극했고 소련 정계 내부에서도 이러한 아프가니스탄의 내분을 방치하여 이슬람 인구가 밀집한 소련 남부의 공화국에 영향력이 미칠 가능성을 판단하여 무력 침공 계획을 수립하였고 결국 1979년 12월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국내 내분 종식을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카불을 점령하고 아민 대통령은 결국 소련군에게 사살당하고 말았다.

한편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아민을 살해한 소련은 아민과 타라키와의 권력쟁탈전에서 밀려나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좌천되어버린 바브라크 카르말을 아프가니스탄으로 귀국시켜 새 대통령으로 옹립하고 사실상 아프가니스탄을 친소련 위성국가로 만들어버렸다.그러나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국내 공산정권을 상대로 저항하던 무자헤딘 반란군들을 모든 총부리를 아프가니스탄 점령 소련군에 돌려 공격하였고 결국 아프가니스탄은 무자헤딘 아프가니스탄 반란군과 소련군 사이에 전쟁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소련의 지원을 받아 대통령이 된 카르말은 공산 독재 통치를 어느정도 완화하면서 국내 내정 안정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한편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정부군의 전력을 강화하는등 소련군과 합동으로 정부통치에 저항하는 국내 무자헤딘 반란군 토벌 작전도 벌였다. 그러나 이러한 카르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은 좀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더욱이 국내 영토 장악에도 실패해 결국 수도 카불과 일부 지역들을 제외하고 모든 아프가니스탄의 지역들을 통제력을 상실했다.

결국 카르말은 소련군과 국내 무자헤딘 반란군 사이에 전쟁이 절정에 달하던 1987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그의 뒤를 이어 카르말 정부 아래에서 비밀경찰 국장직을 맡고 있었던 무하마드 나지불라가 새 대통령이 되었다. 물러난 카르말의 뒤를 이어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공산정권의 대통령이 된 나지불라는 사회주의 경제 체제 폐지와 일단의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도입했고 억압적이었던 사회 분위기도 대폭 완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국호도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에서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으로 개정하고 집권여당이었던 인민민주당도 해체하는 등 공산주의와 단절하는 조치도 취했다. 거기다 1978년 공산정권 수립 이래 사실상 내전 상태에 놓여있었던 아프가니스탄의 불안정한 정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내 무자헤딘 반란군 세력들에게 화평을 제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지불라 정부 역시 실권의 대부분을 구 인민민주당 세력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나지불라가 무자헤딘들을 상대로 펼친 화평시도 또한 무자헤딘들이 거부하면서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아프가니스탄의 정국 불안에 극에 달하던 1980년대 말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고 결국 1989년 2월 소련군이 철수하자 침공 소련군에 저항하던 무자헤딘 반란군들은 나지불라 정부를 공격하면서 결국 아프가니스탄 정국은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 반란군 사이에 내전으로 벌어졌다. 소련군이 철수한 뒤에도 소련은 나지불라 정부군에 대해 지속적인 군사지원을 벌였고 계속되는 소련의 지원에 나지불라는 무자헤딘의 거센 공격에도 권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991년 무자헤딘 반란군과 내전중인 아프가니스탄 나지불라 정부군을 지원하던 소련의 지원이 끊기면서 나지불라 정권은 고립무원 상태에 내몰렸고 이듬해인 1992년 무자헤딘 반란군은 나지불라 정권과 구 인민민주당 세력들의 최대 거점지인 카불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펼쳐 나지불라 정권이 붕괴되면서 결국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은 1992년 4월 국내 무자헤딘 반란군들에 의해 패망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