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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아프가니스탄의 반군 게릴라 단체
내용
아프가니스탄의 반군 게릴라 단체. 무자헤딘은 ‘성전에서 싸우는 전사’를 의미한다. 모자헤딘, 무자히딘, 가지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좁게는 아프간의 반군을 의미하나 넓게는 아프간뿐만 아니라 이슬람 국가의 반정부단체나 무장게릴라 조직, 혹은 자발적으로 타국의 전쟁에 개입한 외국인 이슬람 무장단체 등을 통칭한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기존의 공산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친소 정권을 수립했을 때 저항에 나선 이들을 무자헤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보다 앞서 전년도인 1978년 군부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군사쿠데타로 공산정권이 성립되었을 때 공산 정부군과 반군 군벌 세력간에 내전이 벌어지는데 이들 반군 군벌들을 무자헤딘의 시초 보기도 한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미국은 돌풍작전(Operation Cyclone)이라는 이름으로 소련에 저항하는 아프간 내 무자헤딘에게 ISI(파키스탄 정보부, Directorate for Inter-Services Intelligence)를 통해서 자금과 무기지원을 하고 있었다. 이슬람 국가들도 이에 동참하였는데, 사우디아라비아는 매년 600만 달러를 지원하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특히 무슬림 형제단 단원이었던 압둘라 아잠(Abdullah Azzam)과 오사마 빈 라덴이 창설한 마크탑 알-키타맛(MAK,Maktab al-Khidamat)은 사우디아라비아와 ISI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막대한 자금을 이용해 무기를 공급하고 해외에서 오는 무자헤딘들을 훈련시켰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국이 배후에서 지원을 하고, ISI가 이를 현장에서 지휘했으며, 사우디 아라비아는 무자헤딘 알선책 역할을 담당했다. 즉,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랍 국가에 득시글한 실업자들을 막대한 돈으로 고용해 아프가니스탄에 무자헤딘으로 보내고, ISI는 미국에서 오는 지원의 분배 및 이슬람 국가에서 고용된 실업자들을 무자헤딘으로 아프가니스탄에 투입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파키스탄 대사관에서는 하루에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비자를 내주었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은 하루에만 비자를 수백 명씩 받아갈 정도로 극도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도 아닐 뿐더러, 하루에 비자 수백 개를 발급한다는 것은 실상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마구 비자를 '퍼주었다는' 의미다. 즉 이들 및 탈레반의 탄생에는 두 이슬람 국가 사우디 아라비아와 파키스탄의 지대한 공헌이 있었다는 것.
정부군을 상대로 내전을 치르던 무자헤딘은 소련의 아프간 침공 이후 소련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르게 된다. 무자헤딘들은 산악 지대와 협곡이 많은 아프간의 지형을 이용해 게릴라 전 방식을 통해 소련군을 공격했다. 이 때 이슬람권 전역에서 무슬림 전사들이 소련에 맞서고자 아프가니스탄으로 몰려들었다. 소련을 견제하고자 했던 미국은 무자헤딘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같은 이슬람계열인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등도 이들을 지원했다. 결국 소련은 10년간 5만 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내고 1989년 2월 철수했다.
그러나 무자헤딘 반군은 이번에는 새로 수립된 아프간의 나지불라 정부군과 내전을 벌였다. 1992년 무자헤딘은 정부군의 공세를 뚫고 수도 카불을 탈환함으로써 결국 나지불라 정권은 패망했고 이듬해인 1993년 망명 무자헤딘 수장 부르하누딘 랍바니를 대통령, 국내 무자헤딘 사령관 굴부딘 헤크마티아르를 수상으로 하는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정권을 잡고 나서도 내분이 극심했고 여기에 반발한 탈레반에 의해 1996년 수도 카불을 빼앗겼으며 나지불라는 고자가 되고 무자헤딘은 다시 무장 게릴라 조직이 되었다. 2001년 미국에서 9·11 테러가 발생했을 때 알카에다 및 이들을 지원한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고 있자 미국은 다시 이 무자헤딘들을 지원했고, 무자헤딘은 2001년 11월 다시 한 번 카불을 점령하고 탈레반을 몰아냈다. 한편 미국이 키운 반소 무자헤딘은 상당수가 각기 본국으로 돌아가 반미 이슬람주의 무장 세력의 주축이 됐다.
한편 1988년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투입되었던 해외 무자헤딘들은 투쟁 방향을 상실하고 혼란에 빠져있는 상태였다. 주적 소련이 물러난 이후, 본국으로 돌아가기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었고, 그렇다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누구를 위해 누구와 싸울지 목표가 없어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참전한 무슬림들은 주로 이집트, 알제리,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 아랍 국가들 출신이었는데, 이들 국가에서는 이들 무자헤딘들이 돌아오면 감시, 체포, 감금을 일삼고 있었다. 이슬람 원리주의 성향이 강하고 아프카니스탄에서 대규모 게릴라전 경험을 쌓고 온 무자헤딘들을 각 나라의 독재 정권들이 껄끄러워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다수 아랍 국가들이 정권의 무능으로 인해서 경제적으로 침체되면서 실업자가 넘쳐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무자헤딘 입장에선 본국에 돌아간다고 해서 뭔가 뾰족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몇몇 무자헤딘들은 중동권 외의 다른 이슬람권 분쟁지역을 찾아서 일종의 군사 고문관이나 용병 같은 일을 하기도 했다. 구체적으로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타지키스탄 내전, 보스니아 내전, 코소보 전쟁, 체첸 사태 등에서 군사 훈련의 부재를 겪는 편에서 섰는데 이런 무자헤딘 중 러시아에서 가장 악명높은 인물은 바로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이븐 알 하타브(Ibn al-Khattab(ابن الخطاب). 이슬람판 MSF? 다만 부작용이 있다면, 전쟁 때는 좋았는데 이게 계기가 되어서 중동 본토 직송(...) 와하비즘 이슬람 극단주의 사상 같은 것이 현지에 퍼지는 골때리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현지 수피파 세력이 무자헤딘 및 친 무자헤딘 세력(ex)샤밀 바샤예프)의 민폐 및 또라이짓에 학을 떼고 러시아에 붙어 버린 체첸이 좋은 예시.